‘스토리 보물창고’ 고전문집, 한글번역 속도낸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2월 17일 03시 00분


■ 고전번역원, 권역별 연구소와 함께 ‘30년내 협동번역’ 대장정

한국고전번역원이 지역 민간 연구기관의 신청을 받아 번역하게 될 한국문집총간. 통일신라시대 최치원의 ‘계원필경’부터 구한말 선비 심재 조긍섭의 ‘암서집’까지 662종의 문집을 모은 것이다. 김재명 기자
한국고전번역원이 지역 민간 연구기관의 신청을 받아 번역하게 될 한국문집총간. 통일신라시대 최치원의 ‘계원필경’부터 구한말 선비 심재 조긍섭의 ‘암서집’까지 662종의 문집을 모은 것이다. 김재명 기자
《‘정조 20년(1796년) 11월 25일 제주 목사가 기생 만덕(萬德)이 재물을 풀어서 굶주리는 백성들의 목숨을 구했다는 보고를 했다. 만덕이 금강산을 유람하기를 원해 그렇게 하도록 허락해 주고 양식도 지급했다.’ 정조실록에 나오는 제주 기생 만덕에 대한 짧은 대목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주요 사건을 간략하게 기록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실을 구하기 어렵다. 만덕의 온전한 이야기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역사를 대중 스토리로 만드는 작가들의 퍼즐 맞추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국고문헌은 번역원이 전담
민간문집은 대학 등에 맡겨

연간 120책이상 한글 번역
드라마-소설 콘텐츠활용 기대

당시 정승을 지낸 채제공(1720∼1799)의 ‘번암집(樊巖集)’에 만덕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단서가 있다. 만덕의 성이 김 씨이고 제주 양민의 딸이었다는 사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기생집에 의탁해 살다가 기생 문서에 이름이 오른 사연, 장사 수완이 좋아 큰돈을 모았다는 내용이 ‘만덕전’으로 기록돼 있다. 채제공이 직접 만덕을 만나 나눈 대화도 있다. 3월 6일부터 KBS 1TV에서 방영하는 ‘거상 김만덕’의 김진숙 작가는 채제공의 ‘번암집’ 등에서 영감을 얻어 만덕전을 ‘약자의 도전’이라는 이야기로 재탄생시켰다.

그는 “만덕 드라마 제안을 받고 맨 먼저 찾은 게 번암집이었다”며 “다른 자료에 나온 만덕에 대한 얘기와 동화로 각색된 이야기를 모아 ‘약자의 도전’이라는 콘셉트로 만들 수 있었다”고 말했다.

조선왕조실록이 이야기의 ‘뼈대’라면 조선시대 민간에서 낸 문집은 ‘살집’이다. 하지만 이처럼 우리네 옛 삶을 풍성하게 담고 있는 고전이 제대로 번역된 것은 미미한 수준이다. 국가에서 발행한 ‘국고문헌’은 27%(2008년 기준), 문집 경서 역서 기술서 등 민간의 ‘일반고전’은 20%에 불과하다. 국고문헌 중 조선왕조실록만 1968년에 번역을 시작해 1993년 완역됐다. 한국고전번역원(원장 박석무)은 민간 고전의 완역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대학부설 연구기관 등과 함께 번역 사업(권역별 거점연구소 협동번역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 민간 고전 번역은 30년 안에 끝낼 것

한국고전번역원은 역사 인물들의 문집 663종을 모은 한국문집총간 중 서영보(조선 순조 때 문신)의 ‘죽석관유고(竹石館遺稿)’ 등 312종 1400여 책을 먼저 번역할 계획이다. 이런 문집에는 산문이나 시를 비롯해 상소문, 편지 등 문인이 일생 동안 적은 글이 포함돼 있어 당대 상황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고전은 새 이야기의 원형이 된다. 3월부터 방영될 KBS TV 드라마 ‘거상 김만덕’(위)과 시즌 3를 제작 중인 MBC 드라마넷의 ‘별순검’(가운데), 영화 ‘왕의 남자’ 등이 대표적이다.
고전은 새 이야기의 원형이 된다. 3월부터 방영될 KBS TV 드라마 ‘거상 김만덕’(위)과 시즌 3를 제작 중인 MBC 드라마넷의 ‘별순검’(가운데), 영화 ‘왕의 남자’ 등이 대표적이다.
민간 고전과 달리, 국가가 간행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비변사등록 각사등록 등 5종의 ‘국고문헌’은 고전번역원 국사편찬위원회 세종대왕기념사업회 3곳에서 번역을 해오고 있으나 역부족인 실태다.

서정문 고전번역원 사업본부장은 “연간 20여 책이던 일반고전의 번역량을 이번 협동 번역을 통해 120책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고전번역원은 국고문헌 번역에 주력하겠다”며 “100년 이상 걸릴 번역 기간이 30년 이내로 단축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업에서는 대학이나 지방의 연구 기관들이 지역색을 살린 번역을 할 수 있도록 번역 대상을 선택하도록 했다.

○ 고전은 역사 스토리텔링의 보고(寶庫)

국고문헌과 일반고전을 활용한 대중 스토리텔링은 꾸준히 개발돼 왔다. TV 드라마로 시작해 한류 문화의 원형이 된 대장금도 ‘중종실록’에 나오는 이름에서 시작했다. 이름(장금)과 의녀라는 직업에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인기 콘텐츠가 됐다.

KBS 2TV ‘추노’가 방영된 이래 고전번역원의 검색어에 드라마와 관련된 ‘노비’ ‘소현세자’ 등의 검색 횟수가 증가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고전 번역 자체가 독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도 한다.

정조 때 만든 형사 사건의 기록인 심리록 등은 MBC드라마넷이 시즌 3를 제작 중인 드라마 ‘별순검’의 재료가 됐다. 조선 시대에도 과학수사대가 있었다는 사실에 입각해 2008년에 방영된 시즌 2에서는 이야기를 대한제국으로 확대했다. MBC드라마넷 콘텐츠마케팅팀 이홍철 팀장은 “조선시대 법의학서인 증수무원록(增修無원錄)도 당시 의학지식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됐다”며 “한국적 소재를 지닌 과학수사 드라마이기에 세계 시장에 진출하기에도 유리하다”고 말했다.

한국 영화로 1000만 관객을 동원했던 ‘왕의 남자’도 ‘연산군일기’에서 공길이라는 배우가 극을 빙자해 연산군에게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라며 간쟁을 하는 대목에서 시작했다. 거상 김만덕을 쓴 김 작가는 “역사의 구체적 사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하지만 실존인물이라는 사실 자체가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 데 큰 기여를 한다”고 말했다.

선조들의 일상사나 고전 속 이야기를 재해석한 책의 출판이 많아진 것도 고전번역 덕분이다. ‘열하광인’ 등 고전을 바탕으로 한 책을 펴낸 소설가 김탁환 씨는 “고전문학을 전공해 한문을 해독할 수 있지만 한글로 번역된 자료를 접하면 손쉽게 작업을 할 수 있다”며 “역사 소설을 많이 쓰기 때문에 고전번역원의 자료를 늘 참고한다”고 말했다.

이 사업을 계획한 신승운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장은 “고전은 국가 지적재산의 기초 중의 기초”라며 “국고문헌과 일반고전이 씨줄과 날줄로 완성이 되면 우리 고유의 스토리 개발이 급격히 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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