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사색기행’… 여행의 끝, 새로워진 나를 만났다

  • 입력 2005년 4월 22일 17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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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저자는 이스라엘 정부 초청으로 현지 견학 여행을 갔다가 나중에 숙소를 팔레스타인인이 경영하는 호텔로 바꾼 뒤에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양측의 갈등을 보게 됐다고 말한다. ‘통곡의 벽’ 앞에 모인 이스라엘 사람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여행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저자는 이스라엘 정부 초청으로 현지 견학 여행을 갔다가 나중에 숙소를 팔레스타인인이 경영하는 호텔로 바꾼 뒤에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양측의 갈등을 보게 됐다고 말한다. ‘통곡의 벽’ 앞에 모인 이스라엘 사람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사색기행/다치바나 다카시 지음·이규원 옮김/588쪽·2만1000원·청어람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기차로 약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 수도원 내 이곳저곳을 돌아보다 여행객은 완전히 녹초가 돼 버렸다. 돌아가는 열차의 출발시간이 꽤 남아 아무도 없는 대성당에 들어가 잠시 그냥 앉았다. 그때 문득 파이프오르간이 울렸다.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였다. 왠지 갑자기 눈물이 나와 그칠 줄 모르고 계속 흘렀다.

그는 그때 왜 울었는지 설명할 수 없었고, 지금도 설명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냥 저절로 그런 것이었고, 굳이 설명하라면 일상성을 뛰어넘은 곳에서 일어난 갑작스러운 감동, 혹은 감정의 분출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저자는 방대한 독서로 독자적 세계관을 구축해 왔다는 평을 받고 있는 일본의 저술가. 이 책은 한 분야에 대한 글을 쓸 때 보통 관련 서적이나 자료를 500건 가량 읽는다는 그가 써 온 세계 여행기 묶음이다. 대학 1학년 때 왕복 비행기표만 갖고 유럽으로 떠난 반 년 동안의 무전 여행기는 물론 프랑스 와인 시음 여행, 미국 뉴욕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 취재여행 등 농도 짙은 보고서도 실려 있다.

이 책에는 날씨나 풍경으로 시작하는 ‘다분히 기행문 같은 글’은 없다. 대신 여행을 계기로 머릿속을 스쳐간 다양한 생각을 기록했다. 그는 “인생의 고비마다 여행을 통해 의식의 전환을 이뤘고, 최대한의 자기학습을 해 왔다”고 고백한다.

저자는 여행이야말로 사람을 고쳐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여행 전과 후의 사람은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사람은 무수한 작은 여행, 또는 여행의 무수한 작은 구성 요소에 따라 부단히 변화하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 예로 저자는 1972년 이스라엘 정부의 저널리스트 초청 여행에 참가했던 경험을 든다. 이스라엘 정부가 마련한 일정에 따라 견학할 때와 그 후 혼자 현지에 남아 오랫동안 머물며 자유롭게 둘러볼 때 전혀 다른 시각을 갖게 됐다는 것.

“정부 초청 투어로 움직이는 동안 팔레스타인인이 모두 외계인처럼 보였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된 후 팔레스타인인이 경영하는 호텔에 묵었다. 그 뒤 이상하게도 거리를 돌아다닐 때 총을 든 이스라엘 병사가 더 무섭게 보였다.”

따라서 저자는 “여행은 곧 발견이며, 여행의 패턴화는 곧 여행의 자살”이라고 단언한다. 여행의 본질은 일상성이라는 패턴을 벗어났을 때 내가 무엇을 발견하는지, 뭔가 전혀 새로운 것을 접했을 때 내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여행기 가운데 여러 편이 미완성인 채 실려 있다. 그는 이렇게 변명한다. “정말로 황홀한 섹스를 할 때 그 섹스의 황홀경에 대해 글을 쓰자는 생각이 들겠는가. 한창 여행을 하는 중에 그 여행에 대해 뭔가 글을 쓰려고 시도하는 사람은 변변찮은 여행을 하는 사람이 아닐까.”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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