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필체에 날짜도 일치… 전문가들도 32년간 눈치못채

  • 입력 2005년 4월 5일 19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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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송우혜(사진) 씨의 고증을 통해 이순신(李舜臣)의 ‘함경도 일기’가 30여 년 만에 가짜로 판명됐다. ‘이순신 평전’을 집필 중인 송 씨는 당시 자료를 검토하던 중 이 문서가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의 일기와 거의 같다는 사실을 발견해 5일 공개했다.

▽발견부터 가짜 판명까지=이 문서는 시조시인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相)이 1973년 저서 ‘태양이 비치는 길로’에서 “1967년 발견했다”며 처음 공개했다. 그는 “이 일기에서 보는 충무공의 글씨는 난중일기의 것과 틀림없는 같은 솜씨, 같은 체제의 것”이라고 썼다.

이후 이 문서는 이순신을 다룬 학술 서적과 ‘칼의 노래’ 등 문학작품에서 빠질 수 없는 소재가 됐다. 수군(水軍) 장수로만 각인된 이순신의 육군 시절 일기인데다 내용도 전략가의 면모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서를 엄밀하게 고증한 이우성(李佑成)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은 “이순신의 글이 아닌 게 확실하며 내용도 변방을 지키는 장수가 쓴 글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누가 위조했나=이 문서를 위조한 장본인이 누구인지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 이순신의 친필 일기라고 고증한 이은상 이가원(李家源·전 성균관대 교수) 이종학(李種學·서지전문가) 씨 모두가 고인이 된 데다, 입수 경위도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노산도 ‘태양이 비치는 길로’에서 “어쩌다 이 일기의 한 조각이 떨어져 돌아다니는 건지 유래를 알 길이 없다”고 적었을 뿐이다.

전문가들은 이순신이 김성일의 일기를 습작 삼아 베꼈을 가능성도 없다고 말했다. 당시 이순신과 김성일은 교류가 없었고, 가짜 일기의 원본이 된 ‘북정일록’이 실린 ‘학봉전집’도 1972년에 처음 간행됐다.

특히 날짜와 간지를 바꾼 것은 한학과 고문서에 정통한 인물의 솜씨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 전문가들은 ‘함경도일기’는 ‘북정일록’을 접할 수 있었던 이에 의해 위조된 것으로 보인다고 추측했다.

▽백의종군은 단순 보직해임=송 씨는 선조 21년 1월 조선군이 여진족 시전부락 토벌전을 그린 전투그림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 하단에 기록된 장수들의 명단과 직책을 검토한 결과, 당시 ‘백의종군’한 이순신이 병졸이 아니라 장수인 ‘우화열장(右火烈將)’으로 참전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 그림은 선조 21년(1588) 1월 함경도 북병사(北兵使)였던 장양공 이일(李鎰)이 총대장으로 지휘한 시전부락 토벌전을 그린 채색 전투도로, 현재 육군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그림 아래에는 당시 참전 장수들의 명단과 직책이 기록돼 있다.

‘우화열장급제이순신 일계원장통정대부종성도호부사원균(右火烈將及第李舜臣 一繼援將通政大夫鍾城都護府使元均)’

이 자료에서 이순신과 원균은 우위(右衛)에 속한 장수였다.

송 씨는 “당시 백의종군은 가장 가벼운 처벌이었다”며 “이를 마치 장수를 일개 병졸로 강등시켜 귀양지에서 복무하도록 한 충군(充軍)으로 묘사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북정일록’ 원문:

< > 안은 ‘함경도일기’(이은상 검토)에서 바뀐 글자

十八日丁巳<八日丙戌>晴

朝與穩城話別 出城 到<至>五里 長松擁途十餘里 又行三十餘里 有<누락>巨嶺 西來橫截海口 名慶<蔓>嶺 李施愛叛 據此嶺 以拒官軍 憑高布陣 矢石雨下 官軍不得進 魚有沼潛由海汀 繞出賊軍後 比<夾>擊之 賊棄旗鼓敗遁處也 但審形勢 賊若據嶺 則海汀之路 在眼底咫尺 賊若以數十騎抗<拒>之 則雖有武騎千群 難於越險 而平朔方序 乃曰潛由海汀 未知其故

嶺一支 當中臨海斗斷 所謂侍中臺也 松林鬱鬱 碧海茫茫 景致甚勝 小<少>기 獨酌數盃<杯>而罷 到居山驛 日己暮 小<少>기 促駕到北靑 日己훈矣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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