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이 있는 편지/정이현]‘현재’와의 끈이 없다면…

  • 입력 2005년 2월 25일 17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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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2월의 마지막 주말이에요. 곧 3월, 그리고 봄이 오겠지요.

샌타클래라의 봄맞이 풍경도 궁금해집니다. 타국에서 맞는 명절에 김영하의 ‘검은 꽃’을 떠올리셨다는 선생님 편지를 읽었어요. 1905년 4월 제물포항을 떠나 미지의 땅 멕시코로 향했던 1033명 조선인들의 운명. 그러고 보니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의 아픈 역사로군요.

최근 젊은 작가들이 역사소설을 많이 발표하고 있습니다. 학계나 평론계에서는 그 이유를 밝히려는 노력이 분분하고요. 선생님, 그러나 저는 이것이 새삼스러울 게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나 문학은 사실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거든요.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고 말한 사람이 크로체였던가요? 역사에 완벽한 객관적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역사가도 소설가 못지않게 상상력이 중요한 직업은 아닐는지요.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결국 ‘기억’의 문제이며, 역사와 문학은 모두 창조적 기억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왜 요즘 역사소설을 쓰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20세기 초의 신여성을 다룬 미욱한 단편을 상재한 경험이 있는 제 소견을 말씀드리자면, 일단 소설 소재의 확대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그 역사적 소재를 이전의 전통 역사소설과는 다른 방식의 서사로 재구성하려는 소설적 기획의 일환일 테고요. 그것은 나아가 문학적 상상력의 확대이며, 그 안에는 독자에게 풍부한 읽을거리를 제공하고 싶은 의지도 포함되어 있겠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이 단지 흥미로운 소재거리로만 다루어질 때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의견에 공감합니다. 자칫 역사 그 자체에 함몰되거나, 과거가 현재에서 도피하기 위한 판타지의 일부가 되는 경우에 특히 그렇겠지요. 역사소설이 그저 공허한 울림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지난 역사를 통해 ‘지금, 여기’의 삶을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당대와 연결된 끈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와 동갑인!) 재프랑스 중국인 여성작가 샨사의 장편 ‘여황 측천무후’는 깊은 의미를 던져주는 소설이에요. ‘승리한 남자들의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천하의 악녀로 낙인찍혀 온 측천무후의 삶이, 후대 여성작가의 간결하고 비장한 문장을 통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광경에 전율이 일었습니다.

훌륭한 역사소설의 핵심은 새로운 사실의 발견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의 재발견에 있다는 것, 개체적 특수성을 가진 인물을 그릴 뿐 아니라 그것을 넘어 인간의 근원적 보편성의 영역을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 새삼스럽습니다.

선생님, 그것은 역사소설뿐 아니라 모든 훌륭한 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궁극적 감동이겠지요? 언제쯤에나 저는 역사에 주눅 들지 않는 새로운 역사소설을 쓸 수 있을까요. 샨사의 역사적 상상력, 그 아름다운 재능이 진심으로 부럽습니다.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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