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신간]“한국 현대사 오욕의 역사 아니다”

  • 입력 2005년 1월 28일 18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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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영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광복 이후 유신까지(1945∼1972년) 한국현대사를 담은 책 ‘건국과 부국’(생각의 나무·1만5000원)을 최근 펴냈다. 이 책은 남북 분단과 6·25전쟁의 책임을 소련과 북한보다는 미국과 남한에 더 떠넘기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좌파적 ‘자기비하(自己卑下) 사관’을 뛰어넘어 관심을 모은다. 거시적이고 비교사적인 ‘포스트 수정주의’ 시각에서 한국현대사를 서술한 이 책은 최근 고교 근현대사 교과서 편향성 논란에도 해답을 줄 것으로 보인다. 김 교수는 “수정주의의 학문적 공로는 인정하지만 한국 현대사를 반민중, 반민족, 반민주의 오욕의 역사로 평가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와의 문답을 통해 책 내용을 알아본다.

○체제불문 통일지상주의 경계해야

“그런 사고의 이면에는 통일 정부를 수립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민족주의적 회한이 깔려 있다. 그러나 체제를 불문하는 통일지상주의나 사회주의적 통일을 아쉬워하는 사고에는 단호한 평가를 내려야 한다. 당시 냉전의 세계사적 전개 속에서 이승만의 단정(單政) 노선은 냉전의 양대 세력 중 미국에 편승해 먼저 정부를 세우고, 이를 토대로 북한을 통일하자는 2단계 전략의 일환이었다.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로 냉전이 끝난 현 시점에서 볼 때 단정은 최선은 아니지만 가능한 범위 내에서 차선의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50년초 농지 70∼80% 분배 끝내

“미국 수정주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그의 책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6·25전쟁 이전 남한에선 농지개혁이 이뤄지지 않았고 이승만은 지주계급의 압력 때문에 농지개혁에 미온적이었다’고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농민을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끌어들이려 했던 이승만은 농지문제 해결이 급선무라는 것을 알고 농지개혁을 서둘렀다. 1950년 3∼5월 적어도 전체 농지의 70∼80%에 대한 분배가 단행됐다. 전쟁 발발 후 남한을 점령한 북한군이 토지 재분배를 했지만 이미 농지를 분배받아 소농(小農)화된 대다수 농민들은 큰 호응을 보이지 않았다.”

○통수권자 근시안적 태도 美묵인 불러

“물론 미국의 묵인이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군통수권자 중 한 사람인 장면 총리는 수도원으로 잠적해 3일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그동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장 총리는 미 대사관에 세 차례 연락해 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대응조치를 물었다. 또 다른 통수권자인 윤보선 대통령은 ‘어떤 불상사와 희생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친서를 일선 군 지휘관에 보내 쿠데타에 내응하는 듯한 태도까지 보였다. 이런 한국 정치인들의 유약하고도 근시안적 태도가 미국의 묵인을 가져왔다.”

○장면 정부案 수정 ‘한강 기적’ 이끌어

“절반만 타당한 주장이다. 장면 정부의 계획안에 따른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흉작과 통화 팽창, 통화개혁 실패, 외자 도입 부진 등으로 난관에 봉착했다. 1963년 박 대통령은 미국의 강권을 받아들여 재정안정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개발의 중점은 중농주의에서 공업으로, 기간산업 위주의 내포적 공업화에서 비교우위에 입각한 경공업 중심의 수출산업으로 옮아가는 수정안을 만들었고, 1964년부터 적용된 이 수정안이 이후 ‘한강의 기적’을 이끌었다.”

○외자도입 불가피… 국가발전 기초형성

“당시 미국은 제3세계 국가에 대한 개발 원조를 차관으로 돌리고, 일본에 동아시아 지역의 경제 군사적 지원의 일부를 분담하도록 했다. 이를 위해선 일본과 한국, 대만 사이의 관계 회복이 필수였다. 내자(內資) 동원에 실패한 한국에 외자도입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대일(對日) 종속이 심화되고 무고한 젊은이들이 다치고 죽는 등 정치적 부작용과 부담이 컸지만, 한일 국교정상화와 베트남 파병으로 거둬들인 외자는 이후 발전국가의 물질적 기초를 형성했다.”

○先경제발전 선택… 현시점 비판 잘못

“산업화 초기 단계에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을 병행 추진한 예는 역사적으로 찾아볼 수 없다. 박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이라는 두 가지 선택 중 경제 발전을 택했다. 그것은 산업화 초기에 민주화를 이룬 경험적 사례가 없었고, ‘빵’ 없는 민주주의는 지탱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산업화가 성숙된 현 시점에서나 적용 가능한 병행발전론으로 박정희 정권을 단죄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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