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山別曲]<6>단양 벼루 공예가 신명식씨

  • 입력 2003년 10월 15일 18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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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제12차 남북장관급회담 1차 전체회의에서 정세현 남측 수석대표(왼쪽)와 김영성 북측 단장이 악수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15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제12차 남북장관급회담 1차 전체회의에서 정세현 남측 수석대표(왼쪽)와 김영성 북측 단장이 악수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남한강을 따라 충북 단양군 영춘면으로 가는 길은 험했다. 굽이굽이 언덕을 돌아 오르는 구절양장(九折羊腸) 산길로 차를 몰아 하리(下里)에 닿았다. 푸른 강물이 넘실거리고 소백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싼 마을이었다. 여기 묻혀 사는 벼루 공예가 신명식씨(52).

“경치 좋다고? 인심이 더 좋은 동네예요.”

그의 할아버지는 대한제국 말기에 이름을 날리던 벼루 공예가였다. 그 솜씨를 이어받은 선친도 틈날 때마다 돌을 깎았다. 그도 덕택에 어릴 때부터 검은 돌과 조각칼을 장난감처럼 다뤘다. “제법 솜씨가 쓸 만하다”는 칭찬도 들었다.

벼루가 그의 삶 한가운데로 다가온 것은 1969년 열여덟 살 때. 고향인 충남 보령에 살던 당시 어느 날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총독부 사역에 동원돼 단양에 갔던 얘기를 꺼냈다. “그곳에서 붉은 돌로 벼루를 만들었는데, 정말 좋은 돌이었어. 먹이 고르게 잘 갈리고, 물기를 빨아들이지 않아 먹물이 마르지 않고….”

무작정 단양을 찾았다. 노인들의 말을 듣고 일제강점기의 자석(紫石) 폐광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인부들을 동원해 사흘 밤낮을 파내려가니 암맥이 나왔다.

“좋은 재료는 구했지만 그것만으로 되나요? 할아버지의 벼루를 연구하고, 여기저기 수소문해 귀하다는 옛 벼루들도 보러 다녔죠. 도록(圖錄)도 변변치 않을 때라….”

이때 단양에 눌러앉은 그는 우선 벼루를 보는 심안(心眼)을 키웠다. 돌만 봐도 문양이 떠올랐다. 옛 문인화(文人畵)를 들춰가며 십장생 사군자 등의 도안을 벼루에 새겼다. 그의 작품을 아끼는 서예가들의 평가만큼이나 “할아버지 따라가려면 멀었다”던 아버지와 고모들로부터 인정받게 된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건성으로 만들어서는 금방 표가 나서 내놓을 수가 없어요.”

30여년 전 암맥을 찾아 들어온 단양. 이제 이곳의 강과 산은 벼루를 만드는 그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집에서 돌 다듬는 곳까지 4, 5km 떨어져 있습니다. 광산까지는 또 몇 시간이 더 걸리죠. 매일같이 산길을 걷고 강물을 내려다보며 떠오른 생각이 몇 뼘 크기의 벼루 뚜껑에 담기는 셈이죠.”

돈도 벌 만큼 벌었지만 마음 한구석에 걱정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자신이 가고 나면 누가 이 힘든 일을 이어갈까. 다행히 조각칼과 함께 자란 아들 민호씨(27)가 선뜻 맡겠다고 나서 고맙기 이를 데 없다.

단양이 그에게 전해준 모든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그는 마을 초등학교에 서예교실을 여는 한편 노인들의 무료 이발을 주선하는 등 봉사활동도 잊지 않고 있다.

부자(父子)와 얘기꽃을 피운 남한강 강둑에서 내려다보니 푸른 강물이 마치 벼루의 용무늬처럼 굽이쳤다.

“강에서 용이 승천하는 꿈은 안 꾸시나요”라고 물었다.

“아이고, 그러게 말이에요. 그렇게 많이 용을 새겼으니, 한번 나올 법도 하건만….”

단양=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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