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이윤택/밀양에서의 '연극 독립운동'

  • 입력 2003년 7월 18일 18시 12분


코멘트
1999년 봄 나는 출판 부수가 고작 500부밖에 안 되는 계간지 ‘게릴라’를 창간하고, 짧은 창간사를 이렇게 썼다.

“‘게릴라’가 21세기의 대중사회, 정보의 바다 속에서 결국 작은 섬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는 20세기 인문주의 잔당들의 긴급 피난처이자 최후의 저항이기를 바란다.”

▼연극다운 연극위해 서울 탈출 ▼

그리고 1999년 여름이 끝날 무렵 서울에서는 한 연극 집단의 엑소더스, 즉 서울 탈출이 감행된다. 이윤택과 연희단거리패라 불리는 연극단체가 홀연히 서울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다. 그들은 왜 서울을 떠났는가. 이제 여기에 답변을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연극이 연극답게 존재할 수 있을까. 문학이 문학답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어두운 시대의 터널을 가로질러온 20세기 인문주의자들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자신의 존재 의미를 증명할 수 있을까. 나는 여기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더 이상 무거운 책이 팔리지 않고 진지한 연극이 살아남을 수 없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세상의 가벼움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끝까지 20세기적 인간으로 남겠다는 것이었다.

20세기적 인문주의 잔당들은 그렇게 서울을 떠났고, 그들의 긴급 피난처는 ‘비밀스러운 양지(密陽)’란 의미를 지닌 인구 13만의 소도시 밀양으로 정해졌다. 밀양역에서 택시로 20분 정도 걸리는 도시 외곽, 폐교가 되어 버린 초등학교 건물과 운동장이 그들에게는 ‘약속의 땅’이었다. 이 적막강산에서 연극을 한다고? 서울 대학로에도 연극 관객이 없어 시 지원금으로 연명하는 마당에 거기서 굶어 죽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아예 농사를 짓겠다는 것인가.

그리고 4년이 흘렀고, 우리는 세 번째 여름 연극축제를 연다. 첫해는 숙소와 극장을 짓는 데 시간을 다 소비했다. 극장이래야 운동장 귀퉁이에 있는 울창한 숲에 마루판을 깔고 조명기를 설치한 정도였다. 그러나 극장 이름만은 그럴 듯하게 ‘숲의 극장’이라 짓고 영문 표기도 생각해냈다. ‘그린 시어터(Green Theatre).’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값싸고 멋진 극장을 세운 것이다.

자연과 연극이 어우러지고 모기 매미가 관객과 하나 되는 극장. 여기서 우리는 동네 주민들을 대상으로 주말마다 공연을 시작했다. 첫해는 무료였고 이듬해는 5000원, 올해부터는 입장료가 1만원이다. 그러나 어린이와 노년층은 6000원이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관객과 만나기 시작했다. 대부분 연극이라고는 전혀 접해 보지 못했지만, 그래서 더욱 연극에 목말랐던 관객들이었다. 관객은 점차 불어났다. 밀양뿐 아니라 인근 부산 마산 창원 울산 대구 등지에서 몰려온 승용차들로 운동장은 주차장으로 둔갑했다.

첫해를 무사히 넘기면서 우리는 전국의 연극인들에게 연락했다. 여기 와서 공연 한번 해 보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시작한 것이 ‘밀양 여름 공연예술축제’였고, 첫해에는 밀양시에서 예산 1500만원을 지원해 주었다. 연출가 박근형 이기도 전훈 양정웅, 마이미스트 남긍호 등 후배 연극인들이 경비 100만원만 받고 참가해 주었다. 젊은 대학 연극인들도 참가해 숙식과 노동을 함께 하면서 축제를 치러냈다.

지난해에는 문예진흥기금으로 ‘젊은 연출가상’이란 시상제도를 마련했다. 그리고 올해 세 번째 여름 연극축제(7월 17∼31일)가 거행되고 있다. 독일 일본 스페인에서도 참가하고, 전국의 젊은 연극인들로 37편의 연극이 공연되고 있다. 부대 공연으로 시인들의 시낭송과 춤꾼들의 축하공연이 있고 타악그룹과 소리꾼도 참가한다. 055-355-2308·www.stt1986.chollian.net

▼ 부산서 대구서 몰려오는 관객들 ▼

무엇보다 4년 전 20세기 서울 엑소더스를 감행했던 연희단거리패가 건재하고 있다. 40명이 조금 넘는 연극인들이 한솥밥을 먹으면서 하고 싶은 연극을 하면서 살아간다. 연극 만세! 우리는 이렇게 21세기 속에서 ‘연극 독립지역’을 확보하면서 살아남았음을 보고 드린다. 이만 총총.

이윤택 '밀양연극촌' 예술감독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