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동거男女…대학원생들이 본 드라마속 동거 유형과 현실

  • 입력 2003년 6월 22일 17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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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흐흐, 정은아 이제 왔니.” MBC 월화드라마 ‘옥탑방 고양이’. 정은(정다빈)의 옥탑방에 빌붙어 사는 경민(김래원)이 정은에게 던지는 인사말은 느끼하기 짝이 없다. 부잣집 손자였던 경민은 사정이 궁핍해지자, 과거 자신이 집 얻을 돈을 빌려주었던 정은을 찾아가 옥탑방에 대한 ‘지분’을 주장하며 눌러앉는다. SBS 주말드라마 ‘스크린’. 일면식도 없던 소현(김태희)과 준표(공유)는 집주인이 이중 계약을 한 탓에 졸지에 한집살이를 한다. 방송사 드라마에 최근 ‘동거’가 등장하고 있다. 이들 드라마는 사랑이 아닌 경제적 궁핍 때문에 남녀가 함께 살게 돼 결국 사랑에 빠진다는 동거 아닌 동거를 소재로 하고 있다. 이를 어떻게 볼 것 인가. 조현정(31·여) 이정미씨(23·여) 등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학생들이 두 드라마에 나타난 ‘동거’에 대해 분석했다. 그들의 견해를 옮긴다.》

● 열린 공간 vs 닫힌 공간

‘옥탑방’이 ‘스크린’보다 더 현실적인 동거 공간이다.


우선 ‘옥탑방’은 ‘열린 공간’이다. 여자는 남자가 기거하는 거실을 통하지 않고는 화장실에도, 출입문에도 갈수 없다. 여자의 방문과 화장실 문이 거실과 붙어 있다. 여자는 문만 열면 남자와 마주친다. 이 때문에 여자는 소변보는 소리가 들릴까봐 화장실에도 가지 못하고 배를 움켜쥐기도 한다. 여자의 방문은 미닫이다. 문을 닫으면 외부와 차단되는 여닫이와 달리, 미닫이는 안팎의 경계를 희미하게 하는 ‘소통’과 ‘가능성’의 문이다.

부엌도 남자가 머무는 거실과 맞붙어 있다. 남녀는 결국 함께 밥을 먹을 수 밖에 없다. 남자가 2000원을 주고 여자에게서 참치통조림을 얻어먹는 장면이나 포개놓은 접시 사이에 여자가 비상금을 숨기는 장면은 이들의 연기가 실제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디테일이다. 시청자는 이런 ‘열린 공간’에서 ‘무슨 일이 발생할 것’을 은연 중 기대한다.


반면 ‘스크린’은 ‘닫힌 공간’이다. 여자는 남자가 머무는 거실에 많이 노출되지 않고도 부엌이나 화장실, 출입문을 향할 수 있다. 화장실 문이 거실과 직면하지 않는다는 점은 중요하다. 자신의 프라이버시가 지켜진다. 여자의 방문은 여닫이로 문을 닫으면 소통이 중단된다. 부엌도 거실과 분리돼 밥을 따로 먹을 수 있다.

두 사람이 이 집에 살게 된 이유는 미국으로 떠난 집주인이 애지중지하던 난(蘭)을 돌볼 사람이 필요해서다. 그러나 난이 있는 베란다는 남자의 공간(거실)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난이 남녀간 매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이유다. 이런 빌라 구조 탓인지 ‘동거’란 설정이 주는 남녀간 성적(性的) 긴장이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남녀는 대신 ‘생활’이 아닌, 영화라는 ‘가치’를 공유한다. 남자는 여자가 자신이 존경하던 영화감독의 딸이라는 이유로, 여자는 남자가 자신의 오랜 꿈인 영화감독이라는 이유로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두 사람이 진솔한 대화의 테이프를 끊는 것도 이런 ‘닫힌 공간’을 뚫고 나오면서부터다. 남자는 급기야 여자에게 산책을 제안하는 것이다.

● 동거 패턴

‘옥탑방’ 동거의 특징은 서먹서먹했던 남녀가 동거를 시작하자마자 성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런 패턴은 사실 주위 외국 유학생들이나 어학연수생들에게서 심심찮게 발견된다.

그간의 드라마나 영화들은 ‘일면식도 없던 남녀가→불가피하게 동거를 시작하고→생활습관의 차이 등으로 원수처럼 싸우다가→미운 정이 쌓이고→한 사람이 급기야 떠나자→서로의 빈자리를 느끼고→결국 사랑(성관계)하게 된다’는 동거 패턴을 보였다. 이는 심은하 이성재 주연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1998)에서도 보인 바 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동거 환경에 처하면→사소한 일로 눈이 맞고→충동적으로 성관계를 가진 뒤→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곤혹스러워하거나 또는 간밤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다.

‘옥탑방’에서 남녀는 일단 ‘저지르고’ 후회한다. 남녀가 사랑을 깨달아가는 과정은 그 다음이다. ‘사랑→육체’가 아닌 ‘육체→사랑’의 수순은 최근 외국 영화 ‘포르노그래픽 어페어’나 ‘베터 댄 섹스’에서 더욱 현실적으로 다루고 있다.

90년대 중반까지 TV 드라마는 ‘연상의 여자, 연하의 남자’를 다뤘다. 90년대 후반까지는 ‘미혼모’을 내세웠다. 요즘엔 ‘동거’다. 이런 소재들을 통해 드라마들은 “시청자여 깨어나라, 여성들이여 깨어나라”는 다소 계몽적 메시지를 과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드라마가 현실을 반영하더라도, 아니면 심지어 현실을 앞서가더라도 한 가지 변치 않는 분명한 게 있다.

부모들은 드라마를 보고 점점 더 자식들을 걱정하고 간섭할 것이란 사실.

정리=이승재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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