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3년 3월 12일 19시 57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8일 오후 주룽(九龍)반도에 자리잡은 홍콩 문화센터 대극장에서 열린 아시아 초연에서 객석을 가득 메운 2000여명의 동서양 관객들은 2시간15분에 걸친 공연이 끝나자 10분여간 기립박수로 이 고독한 천재 예술가의 생애와 업적에 경의를 표했다. 고전발레와는 다른 남성 무용수들의 격렬한 몸짓과 힘찬 도약, 동성애를 상징하는 육체의 겹침과 신들린 듯 발작하는 몸동작, 다채로운 무대변화에 관객들은 넋을 잃었다. ‘춤추는 남자가 가장 섹시하며, 이는 최고의 상품’임을 유감없이 입증한 공연이었으며 50여명의 무용수 중 특히 니진스키역을 맡은 지리 부베니체크 등 남성 무용수들에게 박수가 집중된 ‘남성의 무대’이기도 했다.
러시아 키예프에서 태어난 니진스키는 페테르부르크 왕립발레학교에 다니던 10대 때 이미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는 찬사를 받았던 발레 신동. 그의 등장으로 발레의 역사는 비로소 현대발레와 고전발레로 나뉘게 된다. 기교를 넘어 애크러배틱하기까지 했던 그의 춤은 이제껏 여성 무용수(발레리나)의 보조자에 머물렀던 남성 무용수(발레리노)를 무용의 주역으로 부각시켰다. 그의 뒤를 이어 루돌프 누레예프,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등 스타들이 출현했지만 ‘발레의 신’이라는 찬사는 오직 니진스키에게만 바쳐졌다.
하지만 대부분 천재들의 삶이 그렇듯 그의 개인적 삶은 순탄치 않았다. 특히 스승이자 동성애 연인이었던 디아길레프와의 불화와 갈등은 30세의 그를 정신질환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그의 창작 안무작은 네 작품에 불과하며 무대 공연은 단지 20여회에 지나지 않았지만 생시부터 이미 ‘추앙’의 대상이 됐다. 조각가 로댕은 그가 춤추는 장면을 담은 3점의 조각품을 남겼고 장 콕토는 그의 공연 포스터와 팸플릿을 직접 디자인하기도 했다. 1913년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 맞춰 발표된 ‘봄의 제전’은 폭동에 가까운 객석의 반응을 이끌어 냈다고 전해진다.
그의 사망 50주기인 2000년 파리와 뉴욕에서는 대규모 추모전시와 공연이 열렸고 세계무용축제 ‘모나코 댄스포럼’은 영화의 아카데미상에 준하는 무용상으로 ‘니진스키상’을 제정했다.
예술의 전당이 최근 전관 개관 10주년을 맞아 함부르크 발레단의 ‘니진스키’ 내한공연을 추진했으나 개런티와 일정 등이 맞지 않아 무산돼 2004∼2005년경에나 국내공연이 실현될 전망이다.
홍콩=오명철기자 oscar@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