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엔드 포커스]버려진 아기 6명 기르는 스님들

  • 입력 2002년 12월 26일 17시 12분


작은 스님이 윤건이를 업고 윤주를 안고 있다. /신석교기자
작은 스님이 윤건이를 업고 윤주를 안고 있다. /신석교기자
여섯째 업둥이 성이는 아직 눈도 뜨지 못했다.

몸무게가 일반 신생아의 절반 정도인 1.5㎏쯤 돼보였고 배꼽도 아직 떨어지지 않은 채였다. 뒤꼭지가 톡 불거진 작은 얼굴은 고구마처럼 빨갛고 배가 고프면 들릴락말락 강아지 앓는 소리를 냈다. 조그만 얼굴에 코는 주먹만해 스님들은 “노무현 닮았다”며 웃었다.

성이가 서울의 모 사찰에 들어온 날도 대선이 치러진 19일 밤이었다. 작은 스님(48·여)은 밤 11시쯤 절문을 닫으러 나갔다가 검정색 잠바에 둘둘 말린 성이를 발견하고는 그만 소리를 질렀다.

“스님! 누가 또 아기를 놓고 갔어요.”

그 전날 밤에도 어김없이 노스님(88)의 꿈에는 아기가 보였다. 성이가 고추를 달고 버려진 날은 성이의 생일이다. 성이보다 먼저 이 곳에 온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큰 딸 경이가 7월25일, 둘째딸 주야가 10월6일, 사내 쌍둥이 건이와 수야가 10월24일, 셋째딸 진이가 11월14일에 각각 강보에 싸인 채, 혹은 라면 박스에 담긴 채 생년월일과 출생 시간이 적힌 쪽지와 함께 절문 앞에서 발견됐다.

●업둥이 대부분 저체중 미숙아

업둥이들은 하나같이 몸집이 작았다.

“아마 칠삭둥이나 팔삭둥이들인 가봐요. 몸무게가 모두 1.5㎏ 안팎이었지요. 버려지면 더 악착같이 생존 본능이 생기는지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모두들 건강해 보이지요?”

노스님과 작은 스님은 젖을 빨 힘도 없는 업둥이들에게 우유를 한 방울 한 방울 입에 떨어뜨려 먹이며 키웠다. 그리고 윤경 윤주 윤건 윤수 윤진 윤성이라고 이름을 지어 불렀다.

아이들이 하나 둘 들어오면서 두 스님이 생활하는 ‘절간’같던 사찰이 번잡스러워졌다. 노스님이 기거하던 3평 남짓한 방을 아이들에게 내주었는데 방안 가득 비릿한 젖내가 진동을 한다. 한쪽 구석에 펴놓은 이불을 걷어 젖히면 다섯 아이가 꼬물거리며 배냇짓을 하거나 쌔근쌔근 잠을 자고 있다. 막내 성이는 혹시라도 ‘밟힐까봐’ 아예 침대에 눕혀두었다.

스님들의 하루는 정신이 없다. 동이 트기 전 노스님과 작은 스님은 번갈아가며 인근 약수터에서 약수를 길어다 보리차를 끓여 우유물을 댄다. 오전 6시는 작은 스님이 학교에 가는 시간이다. 승가대 3학년인 작은 스님이 공부를 마치고 오전 11시쯤 돌아올 때까지 5시간 남짓 여섯 남매는 큰 스님 차지다. 작은 스님 손에 익은 아기들은 노스님과 있을 때면 더 자주 울어댄다. 아흔을 앞에 둔 노스님은 바쁘게 젖병을 물리고 안아 어르고 기저귀를 갈아준다.

큰 딸 경이는 백일이 막 지났지만 벌써 큰 애 같다. 보행기에 앉혀놓으면 동생들 돌보라고 울지도 않고 저 혼자 딸랑이를 가지고 논다. 동생이랄 것도 없이 모두들 임오년 말띠생들이지만.

저녁을 지어먹은 뒤에는 목욕 시간이다. 30여개 되는 젖병을 큰 솥에 넣어 삶은 뒤 두 대야에 물을 데워 방안에 들여놓으면 목욕이 시작된다. 작은 스님이 작은 아이부터 차례로 첫 번째 대야에서 비누로 씻기고 두 번째 대야에 헹궈 노스님께 건네면 노스님은 물기를 닦고 베이비 오일을 발라 배냇저고리를 입힌다. 노스님은 더운 목욕물에 축 늘어진 작은 불알을 손가락으로 종치듯 치면서 “원차종성…”하고 염불을 외 작은 스님을 웃긴다. 굵기가 젓가락만한 120개의 손발톱 깎기는 노스님 차지다.

“노스님의 시봉(侍奉)을 받는 걸 보면 분명 전생에 도를 닦던 아이들이었을 거예요.”(작은 스님)

‘올 때는 모르고 왔지만 갈 땐 알고 가야겠다’며 13세에 출가한 작은스님. 하루 2시간만 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수행하던 작은 스님은 이제 수업 시간에 깜박깜박 졸고 삭발할 틈도 없는 여섯 남매의 엄마다.

“전생에 버린 인연들이 이생에서 모자의 연을 맺자며 이리로 왔나봐요. 먹물옷 입고 있으니 내 몸안에서는 못 태어나고….”

법당을 짓느라 형편이 여의치 않은데도 작은 스님은 아기들에게 한 통에 1만8000원이 넘는 고급 분유에 정장제를 타서 먹인다. 예쁜 옷을 입고 지나가는 아이를 보면 “그것 어디서 사 입히셨어요?” 하고 어머니를 멈춰 세운다.

작은 스님은 아이들의 예방 접종을 위한 보건소 나들이가 즐겁다. 아이가 4명일 때까지는 스님 혼자 아이들을 안고 다녔다. 기저귀 가방 2개에 아기를 하나씩 넣어 양쪽 어깨에 둘러 매고 두 아기는 양손으로 안았다. 차 안에서는 앞쪽 보조 좌석에 아이 둘을 눕히고 뒷좌석에 나머지를 눕혔다. 몸무게를 재고 진찰한 뒤 “그 작은 아기들을 건강하게 키우셨네요” 하는 소리를 들으면 그동안의 고생이 눈 녹듯 했다.

‘엄마’노릇을 하는 작은 스님과 여섯 업둥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가운데에 누운 것이 막내 윤성이./신석교기자

●“얘들이 나날이 예쁜짓을 해”

“얘들이 나날이 예쁜 짓을 해요. 하나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무슨 재미로 아이들을 키우겠어요?”

작은 스님은 큰딸 경이를 특히 예뻐한다. 길쭉길쭉한 손가락을 보면서 “우리 윤경이는 피아노 가르쳐야지” 한다. 발바닥을 들여다 보면서는 “어머, 발바닥에도 금이 있네. 스님, 발바닥에 금이 있으면 좋은 거예요?” 묻는다.

작은 스님은 노스님이 디스코 음악에 맞춰 춤추는 인형을 아이들에게 들이대면 “스님, 그런 음악은 애들에게 좋지 않아요” 하며 질색을 한다. “애들 젖 토한 냄새도 이리 좋을까” 하고 젖을 잘 내놓는 쌍둥이를 양 뺨에 대며 흔들흔들 하다가 노스님의 꾸중을 듣기도 한다.

“자꾸 그러지 말아요. 아이들을 하나하나 보듬어줄 수도 없는데 손을 타게 하면 어떻게 해요. 그럴수록 아이들에게는 고통을 주는 거예요. 부모는 엄해야 합니다.”

여섯 남매의 장래를 걱정하느라 노스님은 잔정에 매달려 있을 수가 없다. 노스님은 절 안으로 들어오는 아이를 내치지 않고 자비로 다 거두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은 스님이 여섯째 성이를 보고는 “스님, 전 여섯은 자신 없어요” 했다가 노스님께 야단을 들었다.

“한 번 버려진 것만 해도 마음 아픈데 두 번을 버리라고요? 그러려면 얘들 다 버리세요.”

아이들이 어느 정도 살이 올라 사람 모습을 갖추면 노스님은 출생신고를 한다. 낳아준 부모를 모르니 아이들은 스스로 호주가 돼 호적에 오른다.

“부모는 전생에 소금 한 줌 꿔다 쓰고 갚지 않은 인연으로 자식을 만나는 것입니다. 알을 깨고 나온 봉황의 새끼는 제 어미를 잡아 먹고 큽니다. 부모 자식은 그런 관계입니다. 자식은 회초리이고 고통입니다.”(노스님)

“아이들이 우리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받을 것을 받고 있는 것이지요.”(작은 스님)

작은 스님은 문밖에서 바구니 비슷한 것만 봐도 깜짝 놀란다. 노스님의 꿈에도 아기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스님들은 자신들의 업둥이 키우기가 세상에 알려진 뒤 혹시라도 아이를 절 문 앞에 두고 가는 사람들이 더 생길 것을 염려했다. 알음알음 분유를 갖다주고 옷과 성금을 보태주는 신도들이 있다해도 두 스님의 힘으로는 여섯명 이상의 젖먹이를 키울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두 스님은 아이 키우기는 수행의 일부분이라며 실명을 밝히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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