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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11월 14일 17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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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시인으로만 알고 있으나 그는 미술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다.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했고 미술관기행집 ‘시대의 우울’을 펴냈으며 가나아트센터의 미술강좌를 맡기도 했다.
12일 오후 그를 만나러 홍대앞 카페에 들어섰다. 손님없는 썰렁한 찻집에서 그는 지인들에게 보낼 책들을 봉투에 담고 있었다.
“점쟁이가 마흔 넘어 못산다고 했는데…. 버스 내리다 문에 머리가 끼질 않나, 지난 달엔 장보러 갔다가 다리를 다치질 않나. 아직도 계단을 오르내리면 다리가 저리고 아파요.”
언젠가 지나던 행인의 핸드백에 부딪쳤던 손도 성치 않다. 손에 무리가 갈까봐 옷장, 신발장의 문이고 서랍이고 아예 열어놓고 지낸다. 이런 와중에 고생고생끝에 책이 나왔다.
‘화가의…’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시대별 거장의 삶과 작품이야기를 담고 있다. 미술교양서에서 자주 다루는, 뻔한 작품은 제쳐놓았다. 들라크르아의 ‘제니의 초상’ 등 시인의 눈으로 다시 발견한 숨은 명작들을 만나는 기쁨, 예리한 감성이 담긴 글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가 그림에 말 걸고 긴 대화를 나눈 듯, 그림과 글이 하나로 어우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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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그림들, 그 중에서도 한 시대를 보여줄 수 있는 그림들을 골랐죠.”
그는 바로크 미술에 빠져있다. ‘천상과 지옥처럼 정반대되는 것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한 선배시인이 그의 시에 대해 ‘모순되는 것들의 공존’이라고 평한 것과도 맥이 닿는 것일까.
그는 책에서 베르메르의 ‘연애편지’와 ‘음악수업’을 펼쳐보였다.
“겉으로 보기엔 브르조아 가정의 안온한 실내를 그린 것 같죠. 자세히 보면 악기가 바닥에 버려져 있어요. 쾌락을 의미하는 음악이 끝난 것은 곧 인생무상을 은유합니다. 표면은 화려해도 죽음을 상징하는 거죠.”
그의 삶에서도 정반대되는 것이 공존한다. 첫 시집을 통해 90년대 문단의 혜성처럼 나타났던 그의 화려한 학력과 외모에서 ‘1970년대, 잊을 수 없는 가난의 언저리’나 ‘누런 바셀린 크림 한 통으로 온 식구가 겨울을 났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평생 온실속에 살면서, 원하는 건 다 쉽게 차지했을 거라는 부러움과 질시의 시선들. 그에겐 무거운 짐이었다.
늘 ‘세상과의 불화’로 힘겨웠던 그는 말한다. 그림도 “사는 만큼 (살아온 만큼) 보인다”고. 그래서인지 이 책에선 그가 살아내야만 했던 삶의 흔적이 언뜻언뜻 포착된다. 고통의 저 밑바닥까지 내려가본 한 시인의 섬세하고 예민한 감수성의 촉수가 그대로 느껴진다.
20세기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햇빛속의 여인’과 ‘빈방의 햇빛’을 보며 시인은 ‘충분히 지루했던 40년 생애’와 ‘얼마나 더 떠돌아야 이 지루한 여행이 끝날까’를 되새긴다. 그리고 “그림 속의 빈방은 바로 나였다”고 고백한다.
시에 흥미를 잃었다는 그는 이제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다. 10년 동안 습작한 원고가 한 박스 가득찼다. 아직 아무에게도 보여주진 않았다. “30대 초까지는 내 인생을 뒤돌아볼 때 거리를 두지 못했어요. 나이 드니까 자신을 바라볼 때 냉정해지는 것 같아요.”
‘화가의…’가 ‘우리 주위의 사물과 사람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는 희망했다. 덧붙여, 이 책은 그를 다시 바라보는 계기가 되어준다.
고미석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