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이튼 칼리지 '영국의 자존심, 귀족의 자부심'

  • 입력 2002년 5월 23일 14시 23분


“토니 블레어 때문에 나라꼴이 우습군. 왜 걸인이 나와서 영국정치를 건드리는지 모르겠어.”

이튼칼리지 10학년 김지운군(16)이 요즘 학교 복도에서 심심찮게 듣는 친구들의 얘기다. 이튼에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정치 이슈에 관심이 많은 ‘애늙은이’같은 학생들이 많다. 토니 블레어가 노동당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시하는 강경 보수파들이 있는가 하면, ‘토니 블레어가 왜 영국 총리이면 안되는지’에 대해 복도에서 찬반토론을 벌이는 아이들도 눈에 띈다.

“장마리 르펜은 왜 그렇게 떴을까? 프랑스에서 북아프리카 애들을 완전히 쫓아내려고 하나봐”라고 말하던 아이들은 프랑스어 수업시간에 정치상황에 대해 토론하라고 하면 “르펜의 보수주의가 극단적인 인종정책과 맞닿아 있지는 않을 것”이라며 프랑스인 교사의 체면을 지켜주는 ‘외교감각’을 발휘하기도 한다.

●누리는 것은 다양한 경험의 기회들

김군은 서울 이화여대부속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다가 런던의 사립초등학교 패플위크로 전학한 뒤 이튼 칼리지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전교생 1280명 중 외국 국적을 가진 학생은 80명 정도. 그나마도 유럽, 호주, 인도계가 대부분이고 아시아 학생들은 10여명에 불과하다. 김군은 현재 이튼 칼리지의 유일한 한국국적 학생이다. 아버지인 김석준 쌍용건설 회장이 영국 유학을 적극 권유했다.

김군은 6월 12일 방학이 시작되면 기숙사 룸메이트인 앤디 윌런(16)의 집인 룩셈부르크로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했다. 이후 잠시 한국에 들렀다가, 방학이 끝나면 동급생들과 아일랜드로 럭비 전지훈련을 다녀올 예정이다.

다음 학기에는 프랑스나 스페인 중 한 곳을 정해 교환학생으로 다녀올 작정이다. 교환학생은 학기말과 방학기간을 이용해 3주 정도 국외로 다녀오는 프로그램으로 비용은 전액 학교지원이다. 재학기간 중 대부분 학생들이 5, 6회 정도 경험한다.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우는 김군은 이미 지난 학기에 나고야의 가리야여고에 가서 일어를 배우고 홈스테이를 하며 현지 생활을 했다. 고학년이 되면 ‘문화체험’프로그램도 있는데 이를테면 ‘미국의 사막에 가서 낙타 타보기’처럼 흥미진진한 것들도 많다.

기숙사는 25반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반에 하우스마스터(담당사감)가 있다. 5년 동안 50명이 같은 기숙사에서 지내기 때문에 친구들과는 속 깊은 대화를 나누며 친해질 기회가 많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4명이 한 팀을 이뤄 담당 ‘튜터(개인지도교사)’를 만난다. 튜터가 하는 질문은 주로 “대학에 가서 무얼 공부할 거냐” “앞으로 어떤 직업을 택할 거냐” 등이다. 진로에 관해서는 계속 마음이 바뀌는 학생들이 적지 않지만, 튜터는 그때마다 학생이 원하는 진로의 장단점을 말해준다.

●석차가 적힌 성적표, 그리고 우열반

김군은 지난 학기에 263명 중 생물 11등, 영어 110등, 프랑스어 130등을 하며 선전했으나 물리에서 최하위권 성적을 받아 총 석차는 중간 정도에 머물렀다. 조금만 방심해도 성적이 최하위까지 밀린다는 것이 김군의 말. 특히 1∼20등은 이튼 학생들에게 ‘난공불락’으로 꼽힌다. 이들은 대부분 성적우수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는데, 운동 말고 공부에만 미쳐 있는 학생들이다. 일부는 대학도 가기 전에 미국항공우주국(NASA) 같은 곳에 스카우트 되기도 한다. 김군은 “내가 본 천재 중 한 명은 화장실에 갈 때마다 학생과 교사 1300여명의 출신지, 생년월일, 튜터의 이름, e메일주소 등 인적사항이 적힌 학생수첩을 들고 다니더니, 며칠 안 있어 통째로 다 외워버렸다”고 말했다.

이튼은 철저한 우열반 체제다. 과목별로 7반씩이 있다. 수학의 경우 최열반은 ‘42×36〓1512’를 풀 수 있으면 반 학생들과 교사에게 칭찬을 받을 정도다. 열반의 경우 교사가 진도에 연연하지 않고 한명 한명 천천히 개인지도식으로 가르쳐 준다.

영어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논술과 요약이다. ‘더 타임스’ 같은 신문의 기사를 주고 ‘원문의 뜻이 손상되지 않게 1000자짜리를 200자로 줄여라’는 지시를 곧잘 받는다. 어학은 현지어 교사와의 1대1 회화와 비디오 교재를 통한 듣기 능력 향상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역사나 문학은 철저히 토론수업이다. 토론을 잘 붙이는 선생님이 들어오면 아이들은 재빨리 손을 들어 먼저 예습한 내용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발표를 했다는 ‘면피’가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이 다 발표하고 난 뒤에 그보다 더 나은 내용을 읊어야 하는 부담을 덜기 위해서다.

운동을 잘 하거나 과목별 시험을 잘 보면 쇼업(Showup·일종의 상장)을 주고 이것이 모이면 장학금이 된다. 고질적으로 수업태도가 불량하거나 운동 시간에 열심히 참여하지 않으면 립(Rip·일종의 사유서)을 받는다. 이 경우 하우스마스터와 튜터의 사인을 받아 립을 요구한 교사에게 제출해야 한다.

성적표는 두껍다. 각 과목 교사가 A4용지 절반만한 크기에 쓴 평가서가 첨부되며 과목별 평점(ABCD 등으로 등급 구분)과 과목별 석차, 전체석차가 표시돼 있다. 평가는 숙제충실도, 수업시간 참여도, 학기말고사 성적 등으로 이루어진다. 성적표는 부모님과 하우스마스터에게 전달되고, 학생은 사인을 받아와야 한다.

●럭비선수, 작곡선수

운동경기에 대한 이튼 학생들의 집착은 대단하다. 김군은 “공부는 ‘아무나 당연히 어느 정도 해야 하는 것’이지만 운동은 한 종목만 잘해도 선배, 교사들에게까지 엄청나게 환영받는다”고 말한다.

이 중 럭비는 이튼의 최고 인기종목이다. 전통의 라이벌인 웰링턴 칼리지를 이기는 날은 기숙사마다 밤새 파티가 열릴 정도다. 김군은 최우수급들만 모은 이튼의 1진 럭비선수인데, 지난 번 방학 때 서울 동대문시장에 들러 구입한, 태극마크가 달린 국가대표 럭비복을 입고 뛰어 동급생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토요일에는 오전 수업 후 본격적인 특별활동이 시작된다. 김군은 템스강에 나가 노젓기를 하거나 운동장에서 창 던지기, 원반 던지기 등의 육상과 크리켓 축구 농구를 즐긴다. 실내체육관에서 스쿼시 배드민턴을 즐기는 학생들도 많다. 이튼 전통의 ‘월게임’(벽을 이용해 몸싸움을 하며 공을 던지는 게임)도 많이 한다. 노젓기를 할 때는 김군의 1년선배인 해리 왕자를 찍으려는 파파라치들이 강변에서 망원렌즈를 갖다 대기 때문에 가끔씩 학생들과 다툼이 벌어지기도 한다. 가을에는 운동장에 있는 9홀짜리 골프장에서 골프를 한다. 모든 체육활동은 사전에 신청을 하면 코치로부터 레슨을 받을 수 있다. 음악공부도 자유롭게 한다. 김군은 작곡 드럼 플루트에 관심이 많아 외부강사로부터 일주일에 한번씩은 작곡레슨을 받으며 별도로 마련된 작곡 스튜디오에서 매일 30분씩 혼자서 연습을 한다. 밴드나 록그룹을 결성해 활동하는 아이들도 있다.

●이튼 입시, 대학입시

김군은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이튼에 들어가기 위해 입학시험을 치렀다. 영어 수학 과학 역사와 영문에세이로 이루어진 필기시험을 치렀으며, 여기에 합격한 후 별도의 인터뷰와 ‘IQ테스트’ 스타일의 적성시험을 다시 한번 봤다. 면접관은 특히 “지금 보고 있는 책이 무엇이며, 깨달은 점에 대해 이야기해 보라”고 집요하게 물었다. 입학 후 합격생들을 보니 김군이 다닌 패플위크를 비롯해 콜디콧, 서머필즈 등 유명 사립 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반 수 이상을 차지했다. 이 초등학교 출신들은 대부분 이튼을 비롯해 웰링턴, 해로, 럭비 등 명문 중등 사립학교에 진학하기 때문에 학교 대항 운동경기 대회에 가면 초등학교 동창들을 통해 서로 안면을 트고 인사를 나누게 된다.

중등학교 졸업시험인 GCSE(General Certificate of Secondary Education)가 얼마 남지 않은 요즘 몇몇 친구들은 자기 방에 있는 데스크톱 컴퓨터를 선생님에게 맡겼다. ‘카운터 스트라이크’ ‘챔피온십 축구게임’ 등 인기 있는 인터넷 네트워크 게임의 유혹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 GCSE시험은 전국 단위의 대입예비고사 같은 것이며 11, 12학년 때 보는 대입 수능시험인 ‘A레벨 테스트’의 전초단계다.

GCSE시험기간에는 선생님들이 진도를 나가는 대신 과목별로 예상문제나 기출문제를 풀어주며 시험대비를 해 준다. ABCDEF와 U(낙제·Unmarkable)로 평가받는 이 시험에서 이튼 학생들은 대부분 A 혹은 ‘A스타’(A플러스에 해당)를 받으며 C이하를 받는 학생들은 드물다. 시험이 끝나면 학생들은 ‘세인트 메리스’나 ‘애스컷’ 등 근처의 명문 여학교 학생들과 댄스파티를 열기도 한다.

한 학년 250여명 중 영국의 명문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대를 뜻하는 이른바 ‘옥스브리지’ 진학자는 60여명. 20여명은 미국의 대학교로 간다. 나머지도 ‘소신지원’을 통해 브리스톨대, 에든버러대등에 진학한다.

▼역대총리 19명 배출…1년학비 3천만원 넘어

중학교 2학년 과정부터 고3 과정을 이수하는 이튼 칼리지는 런던 근교 버크셔주 윈저성 근처에 있다. 영국식 사립학교이며 귀족 자제들이 많이 모이는 기숙학교다. 1440년 헨리6세가 만든 이후 지금까지 줄곧 남자학교다. 학교 측에 왜 여자는 안 뽑느냐고 물으면 ‘전통이니까’‘굳이 여자를 뽑을 필요가 없어서’라고 간단히 대답한다.

19명의 영국 총리가 이곳을 졸업했으며 작가인 올더스 헉슬리, 조지 오웰,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스 등이 이튼 출신이다. 찰스 왕세자의 둘째아들 해리 왕자는 11학년(고 2)에 재학 중이고 형 윌리엄 왕자는 졸업했다.

대부분 학생이 귀족, 명문가의 자제들이지만 입학 자격에 명시적인 제한 조건은 없다. 다만 비싼 학비가 일종의 체 역할을 한다. 학교 측은 입시 경쟁률, 합격생 선정기준을 일절 밝히지 않는다.

학비는 한 학기에 5500파운드(약 1045만원)씩 1년에 3번을 내야 하며, 여기에는 기숙사비와 스쿨빌(매점에서 간식과 책, 간단한 옷을 살 수 있는 용돈)이 포함돼 있다. 학교 측에서는 수업료 외에 외부에서 충당되는 기부금 등을 통해 학생 1인당 한 학기에 3500파운드(약 665만원) 정도가 더 투자된다고 밝혔다.

이튼에서는 처음에 영어 수학 역사 과학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어 등을 필수로 배우다가 이후 개인별 선택과목을 추가하고 원하지 않는 과목들을 추려 나간다. 공통과목은 15명 안팎, 선택과목은 8명 정도가 한 반을 이뤄 수업을 듣는다. 수업은 40분씩이며 월수금은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화목은 오후 4시30분까지, 토요일은 1시15분까지다. 점심시간 40분, 숙제시간 40∼80분이 수업시간 안에 별도로 있다. 방과 후 체육활동은 필수다. 주말에 자유시간이 있지만 특별한 이유없이 외박은 허용되지 않는다.

윈저〓조인직 기자 cij19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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