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대학생들의 ‘어버이 날’ 캠퍼스 방담

  • 입력 2002년 5월 2일 14시 59분


왼쪽부터 조민영, 정남, 윤길선, 심재헌, 이태재
왼쪽부터 조민영, 정남, 윤길선, 심재헌, 이태재

‘과외’ ‘입시전쟁’ ‘조기유학’ 등으로 유아기부터 청소년기까지 보낸 오늘의 20대는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효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연세대생들이 8일 어버이날을 앞두고 이 학교 교정에서 아날로그적 주제로 난상토론을 벌였다.

참석자(왼쪽부터)

조민영 (22·신문방송학과 99학번)

정남 (29·법학과 00학번, 신문방송학 이중전공·탈북)

윤길선 (21·신문방송학과 99한번)

심재헌 (21·영문과 00학번, 신문방송학 이중전공)

이태재 (26·신문방송학과 97학번)

●나의 부모님

이태재〓고교 영어 선생님이신 엄마는 나를 학생 다루듯 엄하게 대하셨다. ‘미리 겪어본 일이니 시행착오를 겪지 않으려면 엄마 말을 따르라’는 식으로 일일이 갈 길을 일러 주셨다. 엄마의 훈계를 일방적으로 들어야 하니 대화가 될 수 없었다. 대학생이 된 뒤 과외를 해서 내 용돈을 벌어쓰게 된 뒤로는 달라졌다. 집에 손을 벌리지 않으니까 대접받게 된 것같다.

조민영〓상사 주재원이신 아버지를 따라 10년을 외국에서 살았다. 영어를 몰라 고생한 데다가 친구들도 없어 처음 6개월간은 울면서 지냈다. 당시 아버지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외국서 생활할 수 있었던 게 행운이었다. 무슨 일이 닥쳐도 잘 헤쳐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기고 또 영어를 잘 할 수 있게 됐으니까.

심재헌〓나는 외동이다. 부모님은 나를 화분에 심어놓은 꽃처럼 기르셨다. 하지만 난 잡초처럼 자유방임형으로 자랐더라면 하고 후회가 된다. 한가지 좋았던 추억은 사진기자였던 엄마를 따라 전국을 여행했던 일이다. 내 사고가 열려 있다면 그때 여행을 많이 한 덕택이다.

윤길선〓아빠는 외모나 생활 스타일이 딱 내 스타일이다. 아빠의 모습을 보면 마치 위인전 한 권을 천천히 읽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빠는 맏딸인 내가 사업가가 되기를 원하신다. 중국 출장길에 데려가거나 내가 끼어들 자리가 아닌 곳에 데리고 다니며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도록 해준다.

정남〓우리집은 아들만 넷인데 내가 막내다. 아버지는 내가 일곱 살 때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우리 4형제를 키웠다. 어머니는 나의 우상이다. 어머니는 북한의 주체사상탑을 설계한 유명한 토목기사였다. 97년 탈북해 한국에 온 뒤 그런대로 잘 적응하고 사는 것은 모두 어머니 덕분이다.

●일하는 엄마 vs. 전업주부 엄마

윤〓전업주부인 엄마를 보면 답답할 때가 많다. 꼭 직업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한 남자의 아내, 누구의 엄마로 그치지 않고 엄마 자신이 발전해가는 그런 삶을 사셨으면 한다.

이〓나는 일하는 엄마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단독주택에 살 때는 하교해도 집안에 무서워서 못 들어가고 형이 올 때까지 대문 앞에서 기다렸다. 아파트에서 살 때도 엄마가 출근하고 나면 안방문을 걸어 잠그고 TV를 틀어놓고는 일일학습지를 하거나 병정놀이를 하며 혼자 있어야 했다. 소풍갈 때 김밥 싸주고 운동회때 와서 박수 쳐 주는 부모가 너무 부러웠다.

조〓나도 일하는 엄마가 멋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엄마가 집에 계시지 않았으면 무척 싫었을 것이다. 내 세대가 부모가 될 때쯤이면 결혼한 여자가 일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내 일도 하면서 (전업주부인) 엄마가 내게 부족함 없이 해 줬듯 내 자식에게 엄마노릇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심〓엄마는 사진기자로 일하시다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그만두고 내게만 매달리셨다. 초등학교 때부터 원어민 영어 과외를 시키는 등 내 교육에 극성이던 엄마는 내가 고교에 진학한 후에는 절에 나가 자원봉사를 시작하셨다. 고3 때는 자원봉사 하느라 밥도 해주지 않았다. 내가 원망하면 엄마는 ‘나는 스트레스 풀 게 아무 것도 없다. 이게 탈출구다’라고 하셨다. 얼마전 엄마가 예전에 찍은 사진을 봤는데 정말 감탄사가 터져 나올 정도로 훌륭한 솜씨였다. 내가 아니었으면 작가로 대성하셨을 텐데 죄송하다.

정〓엄마는 평양에서 30년간 청춘거리 광복거리 평양∼개성간 고속도로 등 50여개 건축물을 설계하셨다. 밤 12시에 들어와 빨래하고 밥해놓고 새벽 3시에 다시 나가셨다. 엄마의 사랑을 좀 더 받았으면 했지만 사람들이 엄마를 ‘우리 설계사’ ‘우리 설계사’ 하며 추켜세울 때면 자랑스러웠다.

●세대차를 느낄 때

조〓아빠는 원리원칙을 많이 따진다. 내가 뭔가를 사고 싶다고 말하면 그게 꼭 필요한 거냐고 물으신다. 하지만 꼭 필요한 것만 사면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너무 절약, 절약, 하시는 것 같다. 그리고 부모님이 미국에 계시는데 통금이 오후 11시다. 통금시간을 어긴 이튿날은 전화를 받으면 “무릎꿇고 전화받아” 하신다.

이〓집이 인천인데 학교까지 2시간 걸린다. 오전 9시 강의를 들으려면 오전 6시에 일어나야 한다. 하숙 시켜달라고 하면 엄마는 ‘나는 대학 다닐 때 학비 벌어가면서 인천에서 기차와 버스 갈아타며 서울 안암동 고려대까지 다녔다. 너는 남자인데 뭐가 힘드냐’고 하시는데, 답답하다.

조〓휴학도 해보고 천천히 내 길을 찾고 싶다. 또 일하다 보면 결혼은 늦어질 수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엄마는 ‘몇 살에 취직하고 몇 살에 결혼해야 한다’며 정해놓은 스케줄을 고집하신다.

심〓아버지는 요즘도 종종 내 폴로 셔츠나 청바지를 가져다 입으신다. 내가 중학교 때는 아버지가 가수 김현철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먼저 듣고 ‘야 이거 괜찮더라’며 추천해주시기도 했다. 엄마도 ‘지하철에선 누나라고 부르고 반말하라’며 장난을 치시곤 했다.

●부모님이 약해 보일 때

조〓최근 아버지가 서울로 출장을 오셨는데 흰머리가 많이 나고 눈썹도 하얘지셨다. 그렇지 않아도 덩치 큰 외국인들 속에서 왜소해 보였는데 늙기까지 하셨구나 하고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윤〓요즘 들어 아빠가 술을 드시면 ‘나 니네 엄마한테도 섭섭하고 너한테도 섭섭한 것 많다’는 말씀을 하신다. 한번은 엄마랑 몰래 외식을 했는데 아버지가 그 식당에서 얘길 전해듣고는 많이 섭섭해 하셨다. 나이가 드니까 마음이 약해지시는 것 같다.

심〓최근 부모님이 이혼하셨다. 사실 어렸을 때도 부모님이 많이 싸우셨고 그 때문에 상처도 많이 입었다. 막상 헤어져 혼자 사시는 모습이 무척 쓸쓸해 보인다. 안정된 삶을 사셨으면 한다. 부모님은 헤어졌지만 나와의 관계가 끊어진 건 아니다.

이〓그렇게 무서웠던 엄마가 요즘엔 내게 많이 기대려 한다. 이사를 해야 하는데 어디로 가는 게 좋겠느냐고 내게 상의도 한다.

정〓한국에서 어머니가 혼자 나만 바라보며 사시는 게 안타까워 새 아버지를 얻어 드렸다(함께 탈북한 형제 중 두 사람은 러시아 체류). 다시 웃음을 찾으신 어머니가 좋아 보인다.

●효에 대해

심〓친구들이랑 얘기해 보면 효에 대해서 생각이 많이 달라진 것 같다. 부모가 중요한 존재인 것은 사실이지만 본받아야 할 위인 같은 존재는 아니란 얘기다. 결혼 전이라도 경제적으로 독립하면 부모로부터 떨어져 사는 것을 바라는 친구들이 많지만 부모님들이 반대한다. 음, 나는 효를 그림으로 그릴 수는 있어도 일반적인 단어로는 표현하지 못할 것 같다. 그냥 (부모에게) 믿음을 주는 것이랄까.

이〓군대 갔다온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보면 친구들은 ‘내가 잘 되어서 부모에게 잘 해 드려야 한다’며 눈물을 글썽거린다. 내 친구들은 부모에게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나는 막연히 잘 해드려야겠다는 생각뿐이다. 구체적인 방법은 생각 못했지만…. 솔직히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인지 잘 모르겠다.

윤〓부모나 효에 대한 생각이 20대와 40대는 다를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생각이 바뀌듯이 우리가 40대가 되면 지금 40대가 부모를 모시듯이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은 아빠가 내게 갖고 있는 기대를 깨지 않는 것, 부모님이 지금 누리고 계신 행복을 깨지 않는 것이 효가 아닐까 생각한다.

조〓우리 나이에 부모님께 해드릴 수 있는 효도란 그 정도가 아닐까. 부모님 스스로 효도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있다. ‘내가 이만큼 너희에게 해줬으니 그만큼 내게도 해달라’고 하지 않는다. 지금은 피차간에 기대하지 않으려 한다. 부모님도 스스로 노후를 준비하고 있다. 물질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에서 서로간 역할을 잘 하면서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 효가 아닐까.

이〓우리집도 부모님이 노후를 생각하면서 산다. 나이들어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대신 내가 잘 되는 것이 효도라고 말한다. 부모님은 남과 비교를 많이 하는데 내가 잘 돼서 부모님 자존심을 세워주는 것, 그게 효도라고 생각한다.

정〓가끔 10대 아이들에게 북한 실상에 관한 강의를 한다. 북한 아이들이 배고파하며 힘들게 살고 있다는 얘기를 하면서 너희는 부모 잘 만난 덕에 잘 살고 있다, 부모님께 잘해드려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내 말을 접수하는 것 같지 않다.

●부모님께 드리고 싶은 선물

이〓어버이날이나 화이트데이에 엄마에게 꽃을 사다드린다. 좋은 걸 해 드리고 싶지만 지금은 벌어서 내 용돈으로 쓰기에도 빠듯하다. 취직하면 여행 보내드릴 거다.

조〓같이 시간도 보내고 싶고 여행도 보내드리고 싶다.

윤〓맛있는 것 먹으러 가서 몰래 계산하면 매우 좋아하신다. 아버지는 늘 ‘40까지만 일하고 인생을 즐기겠다’고 하셨다. 요즘엔 월드컵 때까지만 일할 거라고 하신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앞으로도 한참 일하셔야 할 것 같다. 죄송하다.

심〓백남준 같이 내 속의 것을 맘껏 표현하는 유명인이 돼 멋지게 사는 모습을 선물로 드리고 싶다.

정〓고향에 보내드리고 싶다. 통일이 되도록 기다리려면 너무 멀다. 내가 힘 있는 사람이 돼 북한에 안심하고 다녀올 수 있도록 해드리겠다.

박현진 기자 witness@donga.com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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