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주는 이 없기에 곧잘 노인들의 말은 독백이 되거나 또래만을 향한 넋두리가 된다. 그래도 고독한 노인들의 세계는 도처에 질펀하게 존재하며, 누군가 귀기울이기를 기다린다.
등단 반세기를 3년 남긴 작가 최일남(68). 그의 새 창작집 ‘아주 느린 시간’은 남은 날을 세는 백발 세대의 모습으로 가득 채워진다. “도처에 이렇게 노인들이 몰려오는 장관을 아무튼 눈 크게 뜨고 보라.” 작가는 그 장관을 스스로 ‘노을 풍경’이라고 부른다.
화장장이며 납골당 이야기를 말끝마다 입에 올리며 무거운 죽음을 가볍게 띄워내려는 오기 (아주 느린 시간) 이 있고, 무력한 시간을 육체적 힘에 대한 연마로 견뎌내려는 허세 (힘)가 있다. 노년은 권세있는 자에게도 평등하게 온다. 은퇴후 넘쳐나는 시간을 버겁게 지탱하는 전직 고위 공직자 장총재 (풍경)역시 그렇다.
‘그들은 말했다’ ‘속삭임 외로움’ 에 이르면 풍경을 어르던 거울은 작가 자신의 얼굴을 향한다. 앞의 작품에서 노인은 수백권에 이르는 책을 처분할 길 없어 안달하다 정녕 버리지 못한 책 세권을 들고, 지나간 삶과 함께 해온 책의 풍경을 반추한다. 뒤의 작품에서는 독자의 딴죽거는 전화에 시달리는 노 칼럼니스트가 모델로 등장한다.
“작정하고 쓰려던 것은 아니다. 그저 보이는 풍경을 적어나가다 보니 한데 묶이게 됐다. 객관화엔 성공했을까. 걱정이다.”
작가는 “작품마다 한계상황까지 끌고가지 못해 힘이 떨어진 것은 아닌지…” 라며 자기 책에 짠 점수를 주었다. 그러나 문학평론가 정호웅은 “그의 노익장 문학으로 비로소 한국문학이 연륜에 걸맞은 폭과 깊이를 갖추게 되었다”고 말했다.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