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보 김기창화백 내달 5일~8월15일 米壽展

  • 입력 2000년 6월 20일 19시 00분


운보는 ‘아직’ 건재했다. 몸은 말을 듣지 않았으나 맑은 정신으로 7월5일∼8월15일 서울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자신의 미수전(米壽展) ‘운보 바보예술 88년’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7세 때 장티푸스로 청력을 잃었으나 불굴의 예술혼으로 평생 1만여점을 남긴 ‘한국의 피카소’, 운보. 96년 5월 스승인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화백의 후학모임인 후소회(後素會)창립 60주년 기념전 개막식에 참석했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그는 이후 충북 청원군 어머니의 고향에서 지난 몇 년새 세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가래를 뽑아내기 위해 목에 구멍을 뚫는 바람에 목소리를 잃었고, 복부에 호스를 연결해 하루 1400㏄씩 유동식을 공급받는 상태여서 100㎏이 넘던 당당한 풍채는 64㎏으로 줄었다. 하지만 의식만은 또렸했다. 서울에서 미수전을 취재하러 기자가 내려온다는 전갈에 평상복이나 다름없는 파자마를 단정한 한복으로 갈아 입었고 함께 내려온 애제자 심경자(沈敬子·56·세종대)교수를 보며 환한 웃음을 짓는 것이 그 증거다. 대청에서 큰 절로 인사를 올리고 휠체어에 모셔 마당을 거닐며 장남 완(完·51)의 수화통역으로 근황과 소감을 물었다.

“나 지금 너무 행복해. 전람회 개막식에도 가고 싶어. 테이프도 자르고 싶고…. 그런데 내가 벌써 여든여덟이나 됐나?”

미수전에는 장르를 망라한 걸작 88점이 출품된다. 넘치는 걸작 가운데 엄선한 것들이다. 17세에 어머니의 주선으로 이당 문하에 입문한 이래 쓰러지기 직전까지 쉼없이 화업(畵業)의 길을 걸었던 운보. 작품세계는 스승의 영향을 받아 북화계열의 극세필을 추구했던 20∼30대, 반추상계열의 40∼50대,‘ 바보산수’와 ‘청록산수’로 대표되는 60∼70대로 크게 구분된다. 특히 ‘바보산수’는 부인 우향 박래현(雨鄕 朴崍賢)이 76년 세상을 떠난 후 의욕을 상실했던 운보가 부산에서 우연한 기회에 잃었던 ‘남성’의 활력을 되찾으면서 자유롭고 활달한 기운으로 삶과 그림에 일대 변신을 하게된 작품들로 수장가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전시회 때 북에 있는 동생들과도 만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어. 70대 초반인 막내 기만이는 북한의 공훈화가가 되었고 그 위 여동생 기옥(74)은 의사가 되었다고 해. 평양의 조선미술관에 소장돼 있다는 내 초기작 미인도 4점도 꼭 한번 다시 보고 싶어.”

아들 완은 남북정상회담 기간에 운보가 TV를 지켜보며 여러차례 눈시울을 붉혔다고 전했다. 월북한 두 동생을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운보가 아직 생명의 끈을 붙들고 있는 또다른 이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해달라는 의사를 전달하자 운보는 널찍한 정원 이곳저곳을 가리킨다. 밝은 표정을 짓기 위해 애쓴다. 주위사람들이 “할아버지가 웃으신다. 너무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다”라며 기뻐한다. 카메라 셔터가 눌러질 때다마 얼굴 표정이 희로애락으로 바뀐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 듯 소리를 질러보지만 입밖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아들 완이 입가의 침을 닦아 드리자 대견한 표정을 짓는다. 아들이 미는 휠체어에 몸을 맡긴 채 연꽃이 핀 연못과 정자 주변을 둘러보는 운보의 모습이 무척 편안해 보인다. 아들 완은 “아버지께서 ‘우향이 빨리 오라고 한다’고 하실 때 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다. 동생분들도 만나보시고 운보문화재단 설립도 보셔야 할텐데…”라고 말한다.

운보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는 ‘빨간 양말’이 오늘따라 유난히 선명하다. ‘정렬적인 자신의 기질과 닮았다’며 그가 애용해온 색상이다. 양 옆에 ‘雲甫’라는 글자를 새긴 이 양말은 오래전 운보를 흠모하는 이가 평생 신을 만큼 보내줘 재고도 충분하다.

“다들 내게 너무 잘해줘. 어서 일어나서 그 신세를 갚아야 할텐데….”

운보의 일생에는 세 여인이 있었다. 청력을 잃은 그에게 그림을 통해 글을 가르쳐 주고 미술의 길로 인도해준 어머니 한윤면(韓潤明), 38세로 세상을 떠난 딸을 대신해 50년 가까이 운보를 ‘건사’해준 외할머니 이정진(李貞鎭), 예술적 동반자이기도 했던 부인 박래현.

여기에 몇사람이 보태진다. 40여년간 그를 모셔온 애제자 심경자와 지난 6년 동안 잠시도 병석을 떠나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그를 간호해온 ‘박실장’(46)이다. 운보의 장녀 현(玄·53)과 차녀 선(璇·48)은 미국에 살고 있고 막내 딸 영(瑛·44)은 수녀가 돼 경기 안산에서 말기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청원〓오명철기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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