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서영은/'그녀의 여자'

  • 입력 2000년 6월 16일 18시 50분


“어둠으로 들어가서 빛으로 나온 것 같아요.”

무려 5년이 걸렸다. 작가 서영은(57)이 새 소설책을 갖기까지. 장편 ‘그녀의 여자’. (문학사상사). 97년말부터 98년말까지 문예지에 연재했던 것을 크게 손질해서 내놨다. 늦사랑을 꽃피웠던 문단의 거목 김동리와의 사별의 아픔에 허덕일 때였다.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맑은 얼굴로 서씨는 담담하게 회상했다. “95년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 모든 의미가 사라졌어요. 칠흑같은 허망함의 수렁에 빠져 3년간 아무것도 하지 못했죠. 무리하게 연재를 시작한 것은 이제 살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가차없는 세상’을 직시하기 위해 택한 소재가 동성애다. 성공한 중년 여성화가가 느닷없이 광란의 사랑에 빠져든다. 상대인 젊은 여기자는 다름아닌 아들의 여자친구. 가망 없는 사랑에 매달리던 그녀는 질투에 영혼을 파 먹히고 자살을 택한다.

여기서 동성애는 성적이라기보다 심리적인 것이다. 사별한 남편이 남긴 욕망의 결핍을 매워줄 몰입의 대상이 여성일 뿐. 문학평론가 김정란의 해설을 빌자면 ‘공허함과 겨루는 사랑’이다. 극단을 치닫는 둘의 관계는 ‘게임’이나 ‘겨룸’에 가깝다.

서영은은 “누구에겐가 절대가 되고픈 욕망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동리의 ‘황토기’를 예로 들면서 자기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대상의 소중함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서로 힘을 겨루면서 존재감을 얻었던 억새와 득보처럼, 선생님과 저도 상대만이 사는 의미를 확인시켜주는 관계였어요.”

결핍에 몸서리치는 주인공은 혹시 작가 욕망의 대리인은 아니었을까. “전 생애 후회없는 사랑을 했어요. 하지만 남녀간 성의 차이에서 오는 거리감은 존재해요. 그런 뜻에서 선생님과 몸과 마음의 일치에는 이르지 못했지요.”

그는 ‘절대적인 존재’와의 결혼생활이 ‘기꺼운 구속’이었다고 했다. “선생님은 순결을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셨어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제 모든 행동을 당신의 통제아래 두시고자 했죠. 아마 제게 완전한 믿음을 주시는 것에 대한 조건이었던 같아요.” 지금도 함께 썼던 일기장을 꺼내보면서 그가 자신보다 더 자신을 알았음을 느끼게돼 빈자리가 더욱 커 보인다고 했다.

그는 얼마전부터 장편소설 ‘꽃들은 어디로 갔나’를 쓰기 시작했다. 10년전부터 맘에 두어왔으나 미뤄왔던 작품. 새벽 어스름, 원고지 앞에 앉으면 김동리의 말이 뒷꼭지를 당긴다고 했다. “살림을 합치고 얼마 안돼 밤을 새우고도 원고지 한 장을 못 채울 때가 있었어요. 새벽에 기침하신 선생님이 그걸 보시고 툭 한마디 던지셨죠. ‘이야기가 없어서 그래’. 그때 눈이 환해지는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았어요.” 이번 작품은 그 화두를 풀어내는 작업이 되리라고 말했다.

서씨는 17일 남편의 5주기에는 집에서 조촐한 추모예배를 가질 것이라고 했다. 성경공부를 같이하는 지인들, 한 지붕 밑 위아래 층에 살고있는 시인 이제하와 이문재, 그리고 유일한 식솔인 세마리 잡종개가 자리를 함께 할 것이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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