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만 藥' 유통 충격]당국 약효검증 허술

  • 입력 2000년 5월 30일 23시 48분


회사원 정모씨(37)는 최근 가벼운 감기 증상을 느끼자 동네 약국에서 약을 지어먹었는데 하루 만에 손과 허벅지 등 피부에 붉은 반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병원을 찾은 정씨는 의사로부터 감기약에 들어 있는 항생제 성분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다. 가벼운 감기에는 굳이 항생제를 쓸 필요가 없는데 약국에서 지어준 대로 복용했다가 부작용만 경험한 경우였다.

정씨가 먹은 항생제는 직원이 100명도 안되는 영세 제약업체에서 만든 것으로 식품의약품안전청에 약효 동등성 시험 자료를 내지 않아 7월부터 사용할 수 없게 된 약이다.

의약 분업이 시행되는 7월부터 약효를 인정받지 못해 사용이 중지되는 약품이 절반 이상에 이를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 국민이 그동안 효과도 없는 약을 그처럼 많이 먹었다는 점에서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약효도 없는 약이 버젓이 유통되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현상이다. 제약 관계자들에 따르면 약에는 크게 오리지널(물질특허와 제조방법상의 특허가 있는 신약), 제네릭(물질특허는 해제됐지만 제조방법상 노하우가 있는 약), 카피제품(특허가 해제돼 마음대로 제조할 수 있는 약) 등 3종류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특허가 해제된 복제 약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대한의사협회 조상덕 공보이사는 “같은 성분의 약이라도 오리지널이냐, 카피제품이냐에 따라 값이 크게는 10배, 약효는 100배 차이날 때도 있다”며 정부가 보험 재정 절감을 이유로 카피제품 사용을 권장함으로써 질 낮은 의약품이 판치는 여건을 조성했다고 말했다.

현직 의사인 조이사는 “약제비가 삭감되지 않도록 하다 보니 의사들도 약효가 없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면서도 100원 이하의 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며 “그러면서도 환자가 낫도록 하기 위해 한 알 써도 될 약을 두 알씩 처방하는 일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질 낮고 효과없는 약 때문에 환자들이 불필요한 약을 계속 먹었다는 얘기다.

신약 개발 능력이 거의 없는 우리나라에서 카피제품을 만들었던 것은 불가피했다고 치더라도 이처럼 ‘약효’가 없는 약이 대량 생산됐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는 무엇보다 국내에서는 의약품의 원료와 생산체계에 대한 사전 검증 제도가 없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은 물론 가까운 중국만 하더라도 의약품 원재료의 품질을 평가할 수 있는 제도가 있는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의약품의 품질 관리는 제약업체의 자율에 맡겨져 있고 정부는 매년 서류로만 약효 재평가를 해왔다. 식약청 최수영(崔修榮)의약품안전국장은 “75년부터 1년에 1000여 품목을 선정해 약효 재평가를 해왔다”며 “그러나 약효 재평가는 의약품의 유효성과 안전성을 평가하는 것이지 품질에 대한 평가는 아니다”고 말했다.

실례로 아스피린의 경우 약효 재평가를 통해 부작용으로 위장장애가 드러났고 효능 효과면에서 진통 효과 외에 혈전 용해 기능이 새로 추가됐지만 60여개 업체가 생산하는 아스피린의 품질에 대한 검증은 한차례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흡한 품질관리에 의한 피해자는 고스란히 이 약을 먹는 환자들이다. 식약청은 작년 5월 임산부 빈혈치료제로 쓰이는 페리친제제 68품목에 대해 품질이 불량하다며 품목허가 취소 및 제조업무 정지명령을 내렸다. 페리친제제는 말의 비장으로 만들어야 하는데도 대부분의 약품들이 값이 싸다는 이유로 소의 비장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당시 수입되던 소의 비장은 광우병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유럽에서 수입한 것이 많은데 대부분의 업체들이 이런 기본적인 사항도 점검하지 않았다.

국내 제약업계 2위인 종근당의 김영중 홍보부장은 “신약개발 능력이 달리고 원료에 대한 규제가 없기 때문에 국내의 많은 제약업체들이 ‘카피’가 쉬운 분야에 몰려 있다”며 “제약업체들이 가격으로 경쟁하기 때문에 좋은 원자재 수입이나 기술 개발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 질 낮은 의약품이 만연했다”고 말했다.

<정성희기자>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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