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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9월 17일 18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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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의 주제로 가장 많이 다뤄진 것은 무엇일까. 바로 성경이다. 그 다음으로 즐겨 다뤄진 것은? 그리스 로마의 신화다.
왜 화가들은 만인이 그 내용을 공유하고 있는 신화를 상상의 원천으로 삼은 것일까.
이 책은 바로 그 서양미술과 신화의 관계, 즉 회화 속에 담긴 그리스신화의 숨은 의미를 추적한다.
책의 출발점은 그 유명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슈프랑거의 ‘헤라클레스와 옴팔레’ 루벤스의 ‘파리스의 심판’ 쿠라디의 ‘샘가의 나르키소스’ 라파엘로의 ‘삼미신’에 이르기까지 르네상스기의 신화그림들을 24개 주제로 분석했다.
[절대종교시대의 돌파구]
르네상스기 화가들에게 그리스신화는 예술창조를 위한 돌파구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 당시 화가들의 자의식은 공방의 장인을 넘어서서 전인적인 예술가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둘러싼 환경은 자유스럽지 못했다.
기독교 유일신앙에 관한 어떠한 반문도 허용되지 않는 절대 종교의 시대. 게다가 화가들의 가장 큰 고객은 교황과 추기경 등 종교 권력자들이었다.
이단으로 몰리지 않고 힘있는 고객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자유로운 정신을 감추어 표현할 수 있는 통로는 그리스신화였다. 성경은 변주의 여지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르네상스기의 신화그림들은 당대 화가들의 정치사회의식, 예술가적 자의식이 시대상황과 타협한 결과물”이라고 설명한다.
첫 그림인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보자. 그리스 신화의 자유분방한 사랑의 여신이 정숙하고 순결한 성(聖)처녀의 이미지로 재탄생했다. 어떤 성직자도 이 그림을 두고 “음탕하다” “이교의 우상숭배다”라고 공격하지 못한다. 이 정숙한 비너스의 포즈는 후대 회화에서 성모 마리아의 모습으로 여러차례 변주된다.
[치열한 예술정신 엿보여]
이 시대 화가의 가장 치열한 반영은 아마도 반인반수(半人半獸)의 마르시아스일 것이다.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집어던진 피리를 주워 ‘마르시아스가 피리를 연주하는지 피리가 마르시아스를 연주하는지’ 알 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른 마르시아스.
그러나 예술에 사로잡힌 그의 최후는 비참했다. 음악의 신 아폴론에게 도전장을 냈던 그는 경쟁에서는 이겼지만 신의 노여움을 사서 산 채로 살을 벗기우는 참형에 처해진다.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감히 신성에 도전했다가 참형을 당하는 이 미친 예술가에게서 자신들의 모습을 보았다. 죽음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예술의 승리를 이루고 말겠다는 강인한 도전, 이것이 바로 근대예술을 탄생시킨 열정이었다.
저자는 독일 쾰른대 철학부에서 서양미술사 고전고고학 로마어문학을 전공한 소장 서양미술사학자다. 319쪽. 1만8000원
〈정은령기자〉ry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