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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6월 4일 18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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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쓴 글을 손자가 읽을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단절의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두 세대쯤 과거와의 상거(相距)는 다른 시대의 천 년 이상에 해당된다 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만큼 한문세대와 한글세대 간의 골은 깊다.
저 시골집 다락에 먼지를 덮어쓰고만 있는 할아버지의 저술을 펼쳐볼 엄두를 내지 못하는 비극적인 한국인이 어디 한 두 사람이겠는가?
갸륵한 후손들이 흩어져 있는 조상의 시문(詩文)을 모아 펴낸 문집은 더러 볼 수 있다. 그러나 대개가 한문 그대로 실렸거나 번역을 곁들여 놓은 정도다. 게다가 책의 체제도 엄숙해 만만히 펼쳐지지가 않는다. 그러니 문집은 내는 데 의의가 있을 뿐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데 뜻이 있는 것 같지 않다.
이런 통념을 통쾌하게 부숴놓은 게 바로 이 책이다. 바지저고리를 벗어버리고 산뜻한 양복으로 갈아입은 것에 비유하면 어떨까? 첫인상도 그렇지만 책을 펼쳐나갈수록 오늘날에도 충분히 읽힐 수 있는 ‘희한한’ 문집이란 걸 알게 된다. 조상의 문집을 이렇게도 만들 수가 있구나 하는 깨달음도 뒤따른다.
이 책이 흡인력을 갖는 것은 4백여편의 시문들에서 읽혀지는 지은이의 인품과 독특한 삶의 방식 때문만도 아닐 것이다. 조선조 말기와 일제치하의 암울했던 시대를 살다간 선비의 당시로서는 불온했던 글들이 감명을 준다. 지은이는 사라져 가는 옛것과 우리것에 연민을 보내는가 하면 이 땅의 산천, 더불어 산 조수(鳥獸)와 미물(微物), 그리고 일초일목(一草一木)에도 지극한 사랑을 쏟고 있다.
여느 문집과 달리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건 엮은이가 자상하게 곁들여 놓은 주해(註解) 덕분. 이 책을 엮어낸 지은이의 손자 최재욱씨가 환경부장관을 지낸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
김담구<전 동아일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