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진단/도서정가제]『아직도 제값주고 사십니까』

  • 입력 1999년 5월 31일 20시 04분


양천구 목동에 사는 주부 신모씨(32). 지난 일요일 생필품을 사기 위해 C대형할인매장에 들른 길에 베스트셀러 ‘기차는 7시에 떠나네’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를 사왔다. 판매가격은 정가에서 약30%가 할인된 5,000원과 5,400원이었다.

외국계기업 A사의 컨설턴트 박모씨(34). 인터넷서점 아마존으로 ‘빌 게이츠@생각의 속도’를 주문해 열흘만에 받아보았다. “업무시간에도 제가 보고 싶은 책의 내용을 확인하고 주문까지 할 수 있어서 편합니다.”

■흔들리는 정가제 ■

책시장이 급변하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77년 이래 유지돼온 ‘도서정가제’가 흔들리는 것. 한 종류의 책이 매장과 구입방법에 따라 3∼4종류의 가격으로 팔린다.

정가제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94년 대형할인매장에 책 판매대가 생긴 이후. 현재 삼성홈플러스 E마트 카르푸 등이 품목별로 정가의 35%까지 할인해 책을 팔고 있다. 이들과 경쟁을 벌여야하는 인근서점들이 출혈적으로 가격할인에 들어간 것은 당연한 일. 단행본 출판사들의 연합체인 한국출판인회의(회장 김언호)가 지난 3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전국7천여 서점 중 71.4%의 서점이 어떤 형태로든지 할인판매를 실시하고 있다’는 것.

■책을 사는 곳은 서점? ■

또하나의 변화는 인터넷서점이라는 신종서점의 등장. 국내인터넷 서점 중 가입자가 가장 많은 교보문고 인터넷서점의 경우 최근 1일 신규 가입자가 1천여명, 월매출액은 8억여원에 육박한다.

여기에 세계최대의 인터넷서점 아마존이 삼성물산과 손잡고 3월말부터 한국시장 공략을 시작했으며 ‘1인사장’이 가능하다는 인터넷비즈니스의 특성상 골리앗에 도전하는 작은 인터넷서점들이 속속 개업 중이다. 자사 홈페이지에 판매메뉴를 넣고 소비자 직거래를 시도하는 출판사들도 잠재적인 인터넷서점들.

회원제 북클럽을 통해 책을 싸게 판매하는 업체도 생겨나고 있다. 회원에게 책을 우편으로 통신판매하는 베텔스만코리아의 ‘북클럽’이 대표사례다.

인터넷서점이건 북클럽이건 고객유치의 최우선 전략은 할인서비스. 신종서점의 출현과 ‘도서정가제 파괴’가 맞물려 돌아가며 변화에 가속이 붙고 있다.

■변화,그 후? ■

출판사와 서점들은 정가제 파괴의 현실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면서도 ‘도서정가제’를 사수해야 한다는 당위론을 적극적으로 역설. 한국출판인회의는 정가제가 무너질 경우 △할인을 위해 출판사들이 책의 명목가격을 올리기 때문에 책값이 인상되며 △소형서점들이 무더기로 도산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소장은 “신종서점들이 할인해주는 책들이 모두 베스트셀러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며 “2천∼3천권의 소량으로 정가판매되는 인문사회과학분야 양서들은 서점에서 취급하지 않고 출판사들도 점점 출간을 기피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박리다매’의 시장원칙이 문화에도 예외없이 적용돼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이다.

소수 독자를 겨냥한 양서가 생존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신인작가나 신생출판사가 경쟁에서 더욱 열악한 처지에 놓이는 것도 쉽게 예견할 수 있는 일.

■대책 ■

현재의 변화가 영세 출판사나 서점의 폐업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21세기 지식기반사회를 앞두고 출판이라는 문화인프라를 근원에서부터 뒤흔드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시장경제의 논리에만 맡겨둘 것인가? 문화국가라면 국민에게 인기있는 책만 아니라 좋은 책을 읽을 ‘문화적 기본권’을 보장해줄 의무가 있다.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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