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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4월 2일 19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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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야, 자냐?
예 아버지….
저 문 좀 열어 봐라.
왜요, 답답하세요?
아니, 어서 열어 보라니까.
나는 잠결에 일어나서 방의 미닫이 문을 열었지요. 마루에서는 냉기가 들어올 뿐 텅 비었고 마루 아래로 우리 집의 작은 마당이 내다보였지요.
거기 누구 찾아온 사람 없니?
누가 이 밤중에 와요.
그래, 문 닫아라.
나는 영문도 모르고 다시 문을 닫았어요.
아버지 무슨… 꿈 꾸셨어요?
그게 꿈이었나보다.
누가 찾아 오셨나보죠?
응, 옛날 동지들이 왔더라. 모두들 다 떨어진 미제 군복을 입구 수염과 머리는 짐승 같이 해갖구선.
산에 계실적 친구분들 말예요?
학생두 있었구 여공두 있었구 나허구 제일 친하던 문화부 중대장두 있었는데 그 사람들 내가 잡히기 전에 환자트에서 열흘 동안 같이 누워 있던 사람들이다. 젊은 두 사람은 분명히 나보다 먼저 죽었는데 중대장은 먼저 나갔거든. 우릴 데리러 오겠다구 거적을 들치고 밖으로 나갔는데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보니 그도 죽은 모양이지.
아버지 과일즙 드세요. 목 마르시죠?
내가 아무래두 얼마 못 갈 모양이다. 그치들이 날 데리러 왔던가 봐.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진 지금 환자 같지두 않은데요.
입맛을 다시면 무슨 비린내 같은 게 나는구나. 나두 대강은 안다. 너희 엄만 아직두 안왔냐?
예, 설 대목이라 시장 일이 바쁘실 거예요. 내일까지 가게에 계신댔는데.
너희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부모님들께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데요. 우리 사남매는 모두 별 걱정없이 학교도 다니구요. 제가 벌써 대학 사 학년이잖아요. 내년엔 정희가 대학에 갈 거구요.
그건 느이 엄마 공이지. 윤희야 나는 그 때, 해방 된 우리나라를 자유와 평등이 넘치는 세상으로 만들려고 친구들과 같이 활동을 했다. 그런데 아직도 세상 꼴이 이게 뭐냐. 우리 몇몇이 눈보라를 헤치며 뛰어 다녔던 그 산자락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구나. 잡혀서 남원 수용소 가서 느이 큰 삼촌 시키는대로 전향서 쓰고 그리고 거기서 젊은 나는 시대하구 같이 죽어버렸어. 여기까지 이 껍데기를 끌고 잘도 버텨왔다.
아녜요, 아버진 최선을 다하셨어요.
너두 아버지 원망을 많이 했지않니.
네 어려서는 그랬어요. 아무 것두 몰랐으니까. 아버지 같은 사람들을 악마처럼 생각했거든요.
너희들이 책도 많이 읽고 세계사도 알게 되고 할 때까지 나두 아무 말 않고 기다려온 셈이로구나. 그래…세계는 끊임없이 변해 갈테지. 우리두 그런 변화의 먼지같은 일부분이었다.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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