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들,송년회 조역서 주역 부상…남편동반 보편화

  • 입력 1998년 12월 13일 19시 06분


“올 한해 힘들었지, 얘들아. 자 건배!”

우소영씨(26·㈜신원 경영지원실)의 초등학교 6학년 여자동창생 부부 세쌍이 서울 홍익대 앞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송년회를 가졌다. 친한 친구는 다섯쌍이지만 두쌍은 출산 때문에 불참.

우씨와 친구들이 들고 있는 맥주잔과 ‘드라이버’로 따라온 남편들 앞에 놓인 커피잔의 낯선 콘트라스트. 하지만 아이를 돌보며 아내의 ‘수다’에 귀기울이는 남편의 얼굴은 하나같이 느긋하다. 우씨의 남편 김용남씨(28·고덴시인터내셔널 주임). “남자친구들의 부부동반 모임이 거나한 술자리나 포커판으로 ‘변질’되기 쉬운 반면 아내를 따라온 모임은 부담이 없다.”

부부동반 모임에 ‘파워 쉬프트’(권력이동)가 일어나고 있다. ‘신세대 남편’은 아내를 부속물처럼 ‘달고’ 다니는 남편중심 모임보다 오히려 아내 친구들의 모임에 다소곳이 따라가는 쪽을 택한다. D광고기획사의 장현철대리(33)는 “아내친구 부부동반 모임의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올해는 ‘아내중심 모임’의 숫자가 처음으로 내 친구들의 모임보다 많아졌다”고 말한다.

가부장적 권위의 붕괴가 이유라는 설명. LG전자 LSR(라이프소프트리서치)연구소의 김은미박사(가족사회학)는 “가정내 여성의 발언권이 강해지고 남편은 아내를 위해 ‘서비스’하는 관계가 정착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풀이했다. 시댁보다 처가를 자주 찾고 형제부부끼리 모이기보다 자매부부끼리 모이는 경우가 많아지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는 것.‘권력’의 변화는 ‘질적’변화를 낳는다. 아내중심 모임에서 대화의 주도권은 당연히 아내들 몫. 남편중심 모임과는 ‘화두(話頭)’부터 다르다. 남편중심 모임에서 과거지향적인 추억더듬기나 여자들이 끼어들 틈이 없는 직장 얘기가 주된 화제가 되는데 비해 아내중심 모임의 주제는 육아나 집안꾸미기, 주택마련 등 보다 구체적이고 생산적인 경우가 많다.

서혜정주부(32·서울 서초구 잠원동)는 “남편을 따라가면 기껏해야 갈비집이나 단란주점에 가는 정도지만 우리 친구들이 남편들을 ‘데리고’ 모일 때는 호텔 뷔페식당이나 패밀리레스토랑을 찾게 된다”고 말한다.

남편중심 모임의 경우 ‘노동력 징발’ 차원에서 끌려나온 아내들이 집에 돌아가 불만을 털어놓는 ‘후유증’이 있는 경우가 상당수. 형식은 부부동반이지만 내용은 ‘남자따로 여자따로’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하나씨(31·방송작가·경기 고양시 행신동)는 “아내위주로 모인 모임의 경우 아내가 일방적으로 ‘희생’할 필요가 없다. 남편들이 더욱 ‘가정적인 남편’처럼 보이려 애쓰기 때문에 아내들이 즐길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된다”고 주장.

신세대 남편 가운데 상당수는 아내중심 모임의 ‘유효성’을 간파하고 눈치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한솔제지㈜의 강병민대리(34·인재개발팀)는 “친구모임에 아내를 데려가면 끊임없이 아내에게 신경써야 하지만 아내친구들 모임에 따라가면 반대로 아내가 나에게 신경써 준다. 남편이 떼어 먹은 수당이나 ‘술자리 비리’에 대한 정보를 아내들끼리 교환할 위험도 없다”고 예찬. 그는 “게다가 아내를 통한 ‘인맥 넓히기’의 효과까지 있어 IMF시대에 더욱 적합한 것 같다”고.

〈박중현기자〉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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