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銃風수사 계기 감청실태]『혹시 누가 내 전화를…』

  • 입력 1998년 10월 15일 20시 02분


문민정부 당시 사정당국의 고위직을 지냈던 P씨는 한달에 한번씩 휴대전화를 바꾼다. 그는 또 약속장소에 항상 20분 먼저 나가 탁자와 의자 밑 등을 구석구석 살펴본다. 이같은 그의 행동은 혹시 감청(監聽)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 사정당국에 있었던 터라 귀신같이 감청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치인 및 공직자 사정이 진행되면서 특히 고위직을 지낸 사람, 또 현직 고위 공무원 및 기업총수를 비롯한 자금관계 임원들이 감청 공포에 떨고 있다. 중요한 얘기는 절대로 전화를 이용하지 않고 직접 만나거나 공중전화를 이용하는 사람도 많다. 7월 한나라당에서는 도청여부를 알 수 있는 도청감지기 구입이 진지하게 검토됐을 정도.

실제 법원행정처가 국회법사위에 제출한 국감자료에 따르면 수사기관의 감청영장 청구건수는 96년 2천67건, 97년 3천3백6건에서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2천2백89건으로 나타나는 등 큰 폭의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사안이 중요한 수사를 할 때 수사단서와 물증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경우 감청을 활용한다”고 말했다.

최근 밝혀진 감청 사례는 안기부가 판문점 총격요청 사건으로 구속된 한성기(韓成基) 장석중(張錫重) 오정은(吳靜恩)씨 등의 전화 통화내용을 감청한 것. 안기부는 전화감청을 통해 한씨와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의 동생인 회성(會晟)씨간의 통화내용 등을 파악해 놓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통화 내용은 이총재측과 이들 3명간의 연계 여부를 밝혀줄 결정적인 물증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안기부측에서는 ‘판문점 총격요청’이라는 한씨 등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있어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라 법원영장을 발부받아 합법적으로 감청한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법률상 감청이란 전화 등 전기통신으로 전달되는 음성 영상 등을 청취 채록하는 행위. 수사기관의 감청은 반드시 법원으로부터 감청영장을 받아야 하며 전화번호 장소 등과 감청의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한다. 감청영장은 사생활 침해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중범죄에 한해 엄격하게 발부된다.

사건 해결의 열쇠가 될 수 있는 안기부의 감청 내용이 외부로 공개되지 않는 것은 통신비밀보호법상 감청내용을 외부로 누설할 경우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지기 때문. 또 영장없는 불법감청, 즉 도청은 죄가 될 뿐만 아니라 감청내용 자체가 재판에서 증거로 인정받지 못한다.

감청장비가 발달하면서 감청은 점차 수사기관의 전유물에서 벗어나고 있다. 첨단 장비와 시설을 갖춘 사설 도청이 횡행, 일반인의 전화기 단자에 도청기를 꽂아 녹음하다 검경에 의해 수시로 적발되고 있는 것.

서울 청계천 세운상가 등에는 10만∼2백만원대의 도청장비가 꾸준히 팔리고 있다. 또 전화번호부나 생활정보지에 나오는 흥신용역업체도 도청을 주요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로 배우자의 불륜을 의심하는 경우나 채무자의 소재 파악 등을 위해 도청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서정보기자〉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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