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니아의 일본문화 편력기]『일본은 웬지…』

  • 입력 1998년 10월 12일 19시 14분


“아, 이거 팝송에 동양적 정서가 녹아있는 듯한 맛을 주는데….”

연세대 행정학과 92학번인 회사원 이건일씨(26). 이른바 일본 대중문화 ‘마니아’인 그는 지금도 일본노래에 처음 빠져들던 당시의 감흥을 기억한다.

중학때부터 팝송 가요 등을 좋아했던 그가 일본 대중음악을 처음 접한 것은 88년 고1때. 같은 반 친구들이 빌려준 음반을 통해서였다.

“당시 팝과 격차가 큰 우리가요에 비해 편곡이나 녹음상태까지 모든 점에서 앞서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수 없었지요.”

그렇게 해서 빠져든 일본음악. ‘안전지대’를 비롯해 아이돌스타인 ‘윙크’ ‘소년대’의 노래를 자주 들었다. 음반은 판매점에 주문만 하면 바로 구할수 있었다. 같은 반 친구들중에도 일본음악 팬이 10%정도 됐다.

특히 어릴때부터 만화를 유달리 좋아했던 이씨에게 일본 애니메이션의 주제음악은 더욱 새롭게 다가왔다. ‘은하철도999’ ‘마징가Z’…. 무명가수가 주로 부르는 한국판과는 달리 일본 영상만화는 가장 잘나가는 가수들이 부른게 많았다.

70년대말의 ‘건담시리즈’, 80년대 중반의 ‘마크로스’ 등에 이어 미야자키 하야오의 ‘코난’이 나왔다. 만화를 좋아하던 그와 친구들에게는 일종의 ‘혁명’이었다. 암울한 미래상, 항상 맨발로 다니는 코난이 상징하는 환경파괴에 대한 메시지…. 만화속에 간접적으로 녹아있는 극적 장치를 깨달아가며 이씨와 친구들은 ‘저패니메이션’에 깊이 심취해갔다. 일본에서 누군가 사들여온 LD의 복사본을 1만원가량에 구입해 볼 수 있었다.

대학생이 되자 ‘안전지대’ ‘오다 카즈마사’ ‘CHAEGE&ASKA’ ‘카시오페이아’ 등 다양한 대중음악으로 폭이 넓어졌다. 서울의 용산 명동 등지에 나가면 일본음반을 구하는게 어렵지 않았다. PC통신에선 MP3방식을 이용해 수백곡을 CD롬에 담아 파는 사람들이 등장했고, 지난해부터는 대만에서 만든 일본음반이 싼값에 수입됐다.

이씨가 그토록 좋아하는 애니메이션도 또래들 사이에서 더 널리 번져갔다. 할리우드의 수작으로 뽑히는 ‘블레이드 러너’를 연상시키는 사이버펑크류의 ‘공각기동대’, 오토모감독의 ‘메모리스’3부작의 LD복사본을 구하는건 더이상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디즈니의 지나치게 동화적인 스토리전개에 비해 일본 애니메이션은 추리 괴기 사회성 등 다양한 성격을 지니고 있고 캐릭터도 어필이 강해요.”

대학 영화동아리를 찾아가면 일본 극영화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아마 처음 본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였을 거예요. 중세 시대상이 잘 녹아있고 인물 성격창조도 괜찮더군요.”

일본가요 애니메이션 영화… 대중문화 개방 논란에 아랑곳없이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문화를 생활 깊숙이 즐겨온 젊은이중의 한명인 이씨. 하지만 문화적 취향이 그렇다는 것일뿐 일본이란 나라나 민족에 대해선 ‘착잡한 반감’을 지닌 평범한 한국 젊은이중의 한명이기도 하다.

〈이기홍·이승헌기자〉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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