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안석환씨,「어느 무정부주의자의…」서 1인5역

  • 입력 1998년 1월 5일 20시 48분


지난해 1월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받을 때만 해도 그는 떨리는 목소리였다. “연극 시작하고 처음 받는 상입니다. 이제 인정을 받았다는 게 기쁩니다….” 그로부터 1년. 안석환(39)은 연극계에서 가장 돋보이는 배우로 우뚝 서버렸다. ‘남자 충동’으로 지난해 상반기 평론가들이 뽑은 남자연기자 1위에 올랐고 세계연극제에서 올해의 연극인상을 받았으며 연극배우로는 드물게 ‘오빠부대’까지 거느리게 됐다. 참, 사람팔자 시간문제인가. 이 대목에서 그는 인상을 팍 쓸 것이다. 팔자라니? 내가 내 운명 개척하느라 얼마나 애를 써왔는데… 해가면서. 그가 97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다리오 포의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사고사’로 새해를 연다. 세상 어디서나 비슷비슷한 권력의 더러운 속성을 사정없이 조롱하는, 미치광이 광대 역이다. 상급법원 판사인 척하고 고문치사를 은폐하려는 경찰을 엿먹이는가 하면, 신부(神父)로, 과학수사연구소장으로 1인5역을 한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이번엔 사람이라기 보다 ‘변신 로봇’이다. 안석환은 불가사리같은 배우다. 불가사리가 ‘Starfish’라는 영어명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어류(Fish)가 아니듯이, 그는 연기할 때만은 스스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자 충동’을 할 때 그가 모델삼은 것은 눈매 사나운 시라소니였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귀여운 에스트라공 역을 할 때는 토끼를 염두에 두었다. ‘거미여인의 키스’에서 여장한 게이를 연기하면서는 아주 사슴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가장 ‘싸나이다운’ 역부터 극도의 여성스러운 역까지 해내는 흔치않은 배우로 꼽힌다. 물론 처음부터 잘 나가는 인생은 아니었다. 어릴 때 키도 작고(지금도 키는 작다) 공부를 못해 상업고교에 들어갔고 독하게 마음먹고 교과서를 들이파서 단국대 경영학과까지 나왔다. 대학극회 시절에는 여학생 팬도 상당했지만 집안을 책임져야하는 형편 때문에 한동안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았다. “10년후 내 모습을 그려보니까 답답하더라고요. 남의 인생을 사는 것 같고…. 내가 잘할 수 있고, 내가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찾는다면 연극밖에 없다고 믿었습니다.” 87년 사표를 내고 연우무대에 입단했다. 한동안은 어려웠다. 간장에 밥 비벼 일주일을 먹어보거나, 딸아이 분유값이 떨어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말할 만큼 힘든 시절도 겪었다. 그러면서도 위(胃)를 밖으로 내놓고 온갖 먹이를 통째로 삼켜 체외소화시키는 불가사리처럼, 그는 배역을 온몸으로 소화하는 것을 배워 나갔다. 92년 ‘마술가게’공연때. 안석환은 대사 3분 분량의 경비원 역이었다. 당연히 성에 차지 않았다. 말더듬이처럼 버벅대면서 말끝마다 “개새끼야”를 붙여 15분짜리로 늘렸다. 눈을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뜨고 턱을 쭉 내밀어 완전히 다른 인상을 만들었다. 객석이 뒤집어졌다. “뭐 저런 놈이 다 있냐.” 대본만 백배 천배 소화하는 게 아니다. 객석의 기(氣)는 물론 상대배우의 에너지까지 흡혈 불가사리처럼 빨아들여 무대의 리듬을 차고 올라간다. 그래서 연출가 임영웅씨는 그를 재능을 타고난 배우라고 했다. 재능보다 무서운 게 있다. 안석환은 징그러울 만큼 연구하고 연습한다. 새해 첫날에도 혼자 극장에 나와 다섯시간을 연습했고 남이 버린 담배꽁초를 보면 담배 핀 사람의 성격 직업 상황까지를 상상한다. 너무 잘 하려는 욕심이 앞서는데다 자기가 연기 잘한다는 것까지 알아버린 게 흠이라면 흠이다. 그런 안석환이 이번에는 다리오 포에 도전한다.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사고사’에서 그가 맡은 인물이 다리오 포의 분신같은 광대 역이다. 맨정신 가진 사람들이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구조적 범죄를 미친 척하고 폭로한다. 익살 냉소 해학으로 정치 사회를 통렬하게 풍자한다. “90년 국내 초연될 때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는 박종철군 사건을 연상시켜 화제가 됐던 작품입니다. 이번엔 좀 거리를 두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IMF사태도 권력층의 은폐 조작 속임수로 빚어진 것이니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는지 모릅니다.” 극단 산울림제작 채윤일 연출로 15일부터 두달간 공연된다. 02―334―5915 〈김순덕기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