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치페이]부담안줘 좋고… 부담없어 좋고…

  • 입력 1998년 1월 4일 20시 29분


“아직 통장에 소식이 없네.”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대학동창의 뜬금없는 다그침에 잠시 의아해 했던 C건설 김모씨(30). 곧 스스로 이마를 때렸다. “아차, 그때 그 술값.” 지난 주말 동창생 5명이 모인 송년회. 돼지갈비집에서의 1차는 회비를 거둬 해결. 문제는 회비 없이 2차로 몰려간 카페의 술값. 예년 같으면 서로 내겠다고 다투는 시늉을 하다 2,3명이 나눠 내는 게 상례.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내는 시늉은커녕 다들 “오늘은 신용카드를 집에 놓고 왔는데…”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내 그럴 줄 알았지.여기 종이 넉장하고 볼펜 좀 줘요.” 광고회사에 다니는 친구가 종이에 자기 은행계좌 번호를 적어 한장씩 나눠줬다. “내가 오늘 카드로 긁을테니 내일 오전까지 ‘n분의 1’ 만큼씩 입금해라.” 수년전부터 20대초반 젊은이 사이에 당연한 생활양식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더치페이’. ‘어쩐지 좀 야박하고 치사한 것 같은’ 그 더치페이가 국제통화기금(IMF)한파의 여파로 30대 직장인들 사이에도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식당에서 직접 나눠내는 ‘전통족 더치페이’방식 외에 최근 가장 빨리 번지는 통장 입금 방식. SK텔레콤의 이모씨(31)는 “지난 12월부터는 팀끼리 식사하러 가서 일단 한 사람이 내면 다음날 통장에 입금시켜주는 게 당연한 관행처럼 자리잡았다”며 “이젠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 수로 돈을 똑같이 나눠낸다는 뜻인 ‘엔분의 일(n분의 1)’이라는 표현이 보통명사처럼 쓰이고 있다”고 전한다. 통장 입금 약속은 거의 정확히 지켜진다. 자주 몰려다니는 팀원 과원끼리 통장번호를 나열한 쪽지를 만들어 배포한 직장도 여럿. 참석자들이 각자 회사 법인카드 판공비 등을 쓰는 술자리에서조차 더치페이가 이뤄지는 경우가 있다. 이 때는 술집에서도 영수증을 따로따로 끊어준다. 과장 부장 등 간부진 사이에선 아직은 “아무리 어려워도 이러지 말자”며 후배들을 챙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쑥스러워하며 더치페이에 동참하는 간부들을 보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다. 쌍용그룹 계열사의 정모과장(38)은 “어쩌다 함께 점심을 먹고 내가 다 계산하려 해도 부하직원들이 식사를 끝내기도 전에 미리 ‘과장님 오늘은 함께 냅시다’며 선제공격을한다”고 씁쓸히 말했다. 〈이기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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