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필(肉筆)원고에는 「혼」이 있다. 그때 글쓴 이를 휘감았을 의욕 고뇌 희열 탈진의 흔적. 삐뚤삐뚤한 거장의 악필에 웃음이 나오다가도 네모칸을 그득 채운 잉크의 번짐에 이르러서는 땀냄새가 물씬 배어있는 듯해 숙연해진다.
우리문학의 곳간을 풍성하게 채워온 선배 문인들의 분신(分身). 하지만 퀴퀴한 다락 한구석에 처박혀 잊혀지고 있다. 컴퓨터 시대 글쓰기의 편리함에 길들여져서일까. 땀의 결정을 가볍게 여기는 세태 때문일까.
인천 도화동 목조주택 2층 방에는 용달차 한대 분량의 원고뭉치가 쌓여 있다. 문인사진작가 김일주씨의 「보물」. 이광수 최남선 김동리 박목월 김광섭 박경리….
김씨는 70년대에 독서신문 문학사상 세대 등의 잡지사에 근무하면서 오갈 데 없는 육필원고와 인연을 맺었다. 옹색한 공간에 갇혀 사는 잡지사 사람들은 책이 나온 지 서너달 지나면 어김없이 원고를 내다 버렸다. 한두묶음씩 거둬들인 것은 이유모를 서운함 때문이었다.
집주인은 요즘 원고더미를 볼 때마다 가슴이 콱 막힌다. 『얼마나 더 원래 모습대로 버텨낼는지 걱정입니다. 온도 습도 조절은 엄두도 못내는데 옛날 종이는 지질이 안 좋아서 삭는 속도가 빠르거든요』
오래 묵은 원고지의 가장자리는 벌써 바스러지고 있는 중. 김씨는 「죄를 짓는 기분」이라고 털어놓았다. 일상에 치이며 살다보니 원고목록이 온전히 남아있는지 돌보기도 쉽지 않다. 그는 『번듯한 문학박물관 하나 지니지 못한 게 우리 문단의 현주소』라며 『누구 집에 어떤 원고가 있는지 실태 파악이라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대 김윤식교수(국문학)도 비슷한 심정. 다섯평 남짓한 그의 서재에서도 육필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최인훈의 글은 또박또박 정자체의 미남형이고 박목월은 무뚝뚝하게 툭툭 끊어 썼지요. 김동리선생은 이곳저곳 많이 고치지만 띄어쓰기는 교과서 그 자체고…. 김남조의 원고를 보면 씩씩한 사춘기 여학생이 떠오르는데 박완서의 글씨는 알아보기가 참 힘들어』
김교수는 『육필 원고를 정리하노라면 젊은 시절 작가의 앨범을 보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보관중인 2백여점의 육필원고도 엄밀히 말하면 문단 공동의 재산이라는 게 김교수의 지론. 쾌적한 공간에서 과학적으로 관리해 줄 독지가만 나타난다면 기쁜 마음으로 넘길 작정이지만 실망의 경험이 많은 탓에 큰 기대는 접어두고 있다.
이 소중한 문학유물을 햇빛앞에 끄집어 내는 작업이야말로 「문화유산의 해」에 정부 기업 문단이 힘을 합쳐 시도해봄직한 문화프로젝트가 아닐까. 한물간 휴지조각으로 밀쳐버리기엔 그속에 담긴 치열한 작가정신이 너무도 엄숙하다.
〈박원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