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다시 찾은 빠리수첩」/포항공대 박이문 교수

  • 입력 1997년 4월 3일 08시 27분


백발이 성성한 67세의 철학교수 박이문(포항공대). 50년대 초 전란으로 인문학계마저 쑥밭이 돼버렸던 시절, 서울대 동숭동 캠퍼스 언저리의 선술집과 텅빈 강의실에서 보들레르와 사르트르의 세례를 받았던 청년 불문학도. 프랑스 낭만주의 시와 실존철학의 강렬한 빛에 쐬었던 그는 몸 속에 동거하고 있던 편두통과 신경성 위궤양을 데리고 두차례 파리 유학을 단행한다. 61년 두번째 유학에서 「우편료가 아까워 편지도 적게 써야 했던」 생활고를 해결하고자 당시의 인문잡지 「사상계」 특파원이 돼 프랑스 지성계를 소개하는 글들을 기고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빈한한 인문학도 만큼 밑천이 없었던 「사상계」는 그에게 원고료를 지급할 수 없었다. 아무런 원망 없이 기고를 계속했던 그 청년은 30여년의 세월이 지난 다음 그 대가를 한권의 책으로 받는다. 그의 제자 박홍기씨가 당시 빛바랜 원고들을 엮어 펴낸 「다시 찾은 빠리 수첩」(당대 간). 「나는 나를 알고, 남을 알고, 문화의 뜻을, 그리고 세계를 이해하고 그것을 표현하는데 내 자유를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한국에 가난이 있고, 한국사람들이 불행하다면, 세계에 부정과 악이 있다면, 그것들을 없애는데 조금이라도 이바지하기로 맹세했다」(5장 「파리여 안녕」). 그 맹세의 힘은 지적 정열만이 유일한 자산이었던 이 동양인 소르본 유학생으로 하여금 당시 프랑스 지성계의 우람한 영주(領主)들을 직접 인터뷰하게 한다. 이 책 3장 「프랑스 작가들과의 만남」에 등장하는 안티로망의 대표작가 로브그리예, 전기작가 앙드레 모루아, 시인 알렝 보스케, 여류 나탈리 샤로트와 크리시안 로슈포르가 그들이다. 이 인터뷰와 함께 진행된 지식인의 사회적 인문적 사명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은 발레리, 사르트르, 카뮈의 사유체계와 프랑스 지성지 「렉스프레스」로 걸어 들어가게 한다(1장 「지식인과 사회」). 그러나 그 글들은 당시 낭만적 시인 지망생이었던 그의 손끝을 거쳐나온 탓에 섬세하면서도 지적인 기동성을 갖추고 있다. 스페인과 모로코 이탈리아 기행기(4장) 또한 이같은 필력의 동심원 내에 자리잡고 있다. 청년 박이문이 이 치열했던 한 시기를 정리하고 미국으로 또다시 고된 유학의 길에 나서기 직전 읊조렸던 다음과 같은 고백은 30여년에 걸친 그의 지적 편력의 원동력이 어디 있었는지를 알게 해준다. 「파산에 가까웠던 내 젊음, 누차 자살로 모든 것을 기권, 청산하려 했던 위기를 겨우 극복하는데만 낭비했던 내 청춘. (…)나는 슬픔에 잠겨 있는가. 이곳 젊은이들이 이젠 별로 부럽지도 않다. 이들의 애인 자동차 아파트 월급을 선망하지도 않는다. 아니 그럴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그들이나 나나 인간으로서 살 자유가 있다. (…)아니 그러한 곳에서만 참다운 나의 자유를 성심껏, 힘껏 끝까지 살아보자」. 〈권기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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