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251)

  • 입력 1996년 12월 23일 21시 00분


추락하는 것은 평화롭다〈25〉 눈은 계속해서 내리고만 있다. 우리 사이에는 한동안 침묵만 흐른다. 거실의 유리문 밖에서 날리는 눈송이가 내 마음속에 스민 듯 나는 문득 한기를 느낀다. 내 목소리는 약간 스산하게 나온다. 『차 키 갖고 나올게』 『바래다준다는 거야?』 현석은 입가를 실룩거리더니 다음 순간 허탈하게 고개를 젓는다. 그러고는 말없이 소파 등에 걸쳐 있던 코트를 집어든다. 내가 방에 들어가 모직 랩스커트와 스웨터로 갈아 입고 나오자 구두를 다 신고 서 있던 그는 애써 웃으며 말한다. 『택시 타고 갈게. 길이 다 얼어붙었을텐데, 술도 마셨고, 그냥 집에 있어』 『몇 시간 전에 조금 마신 것뿐이야. 상관없어』 『왜?』 나를 빤히 보는 현석의 눈속에 복잡한 빛이 어린다. 『왜 꼭 바래다주겠다는 거야?』 나는 기운없이 웃는다. 『그냥. 당신하고 같이 있고 싶어서』 현석은 현관에 선 채로 나는 벽에 기댄 채로, 우리는 잠시 쳐다본다. 이윽고 현석이 돌아서서 잠금쇠를 풀고 현관문을 연다. 바람이 한 줄기 휘하고 들이치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문간에 쌓였던 눈이 급하게 쓸려들어온다. 내가 부츠를 신는 동안을 기다리지 못하고 벌써 찬 기운이 발목을 타고 스커트 속까지 기어들어온다. 우리는 따뜻한 집을 떠나 일부러 추운 나라로 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옹송그리며 복도로 나온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경비실 앞을 지나며 우리는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검은 어둠과 흰 눈. 밖은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흰색과 검은색뿐이다. 검게 웅크린 내 차도 하얀 눈에 완전히 덮여 있다. 얼어붙은 창을 녹여야 운전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시동을 걸기 위해 차안으로 들어간다. 현석이 조수석에 들어와 앉는다. 눈이 덮인 차 안에서는 밖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갑자기 세상으로부터 차단된 추운 얼음성에 들어와 있는 듯하다. 시동을 걸고 히터의 스위치를 넣는데 현석이 앞에 시선을 둔 채로 불쑥 말한다. 『당신, 이제 나 안 만날 생각이지?』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그는 하얀 입김만 내뿜으며 계속 앞만 노려보더니 한참만에 다시 입을 연다. 『물어보기가 두려웠어. 물어보면 당신이 그렇다고 할 것 같았고, 그러면…』 그 다음 말은 힘겹게 이어진다. 『…돌이킬 수 없게 되니까』 <글:은 희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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