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물경기 찬바람]대기업-IT “견딜만” 中企-상인 “죽을맛

  • 입력 2002년 11월 4일 19시 54분


《11월 들어 경기가 급속히 나빠지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경제를 이끌어 왔던 내수가 위축되면서 10월까지 비교적 호조를 보였던 대기업과 중소기업들의 11월 경기 전망지수도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경기 안산시 시화공단 반월공단, 서울 구로공단, 재래시장 등의 현장 경기를 긴급 점검해 본다.》

거시 경제지표는 괜찮은데 일반인들이 느끼는 체감 경기는 나쁘다.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6%를 넘을 전망. 수출도 상반기에는 나빴지만 하반기 들어 회복되고 있다. 그런데도 중소기업과 상인들은 “외환위기가 다시 온 것 같다”고 아우성이다.

동아일보 경제부가 산업공단과 시장 등을 현장 취재한 결과 실제로 중소기업과 상인들은 “경기가 작년이나 상반기보다 나쁘다”고 하소연했다. 이들은 저임금을 바탕으로 상품을 생산하거나 수출하는 업체가 대부분. 이 같은 체감경기 급락은 세계 경기 침체에서 비롯되고 있으나 가계대출 축소와 신용카드 한도 축소로 내수시장이 한계에 부닥친 것도 주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정문건 전무는 “한국경제가 글로벌화될수록 경제지표와 체감경기의 간극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몇 개 대기업의 실적 덕분에 나라 전체의 ‘평균 점수’는 올라가지만 경쟁력이 떨어지는 나머지 기업과 업종은 점점 경기가 나빠지기 때문이다. 이 나머지 업체에 관련된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느끼는 체감경기는 후퇴한다는 설명.

▽한국 경제 이원화〓삼성전자 현대자동차 포스코 등 몇몇 한국의 대표 기업들은 올해 사상 최대의 매출과 순익을 낼 전망이다. 임직원들은 연말에 대규모 승진과 포상을 기대하고 있다.

업종별로 보면 반도체와 정보기술(IT)은 세계 IT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수출이 늘고 있다. 그러나 노동집약적인 경공업 분야나 일반 중견기업들은 지난해보다 수출이 줄거나 어려움을 면치 못하고 있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1∼9월 IT산업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수출이 15.9% 늘어났으나 경공업 중공업 1차 산품 등 다른 산업들은 모두 지난해에 비해 0.6∼6.4% 감소했다.

이 같은 현상은 상장사 대기업들에서도 나타난다. 12월 결산법인인 상장사 539개사는 상반기에 사상 최대의 순익을 올렸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이 가운데 업종별 1∼2위 기업 2%가 전체 매출의 25%, 순익의 53%를 차지했다. 나머지 98%의 기업들은 매출이 대표기업의 평균 20분의 1, 순익은 50분의 1을 올렸을 뿐이다.

▽기존 상품으로는 이제 끝났다〓최근 국내외 경제 여건이 나빠지고 내수가 급속히 위축되면서 전반적으로 경기 후퇴가 감지되고 있다. 이럴 때 가장 어려움을 겪는 것은 몇십년 동안 큰 변화 없이 기존 제품들을 생산 수출하는 업체들이다. 국내 근로자에 이어 외국인 근로자의 임금이 급상승하고 중국 업체들의 저가 공세로 더 이상은 버티기 어렵다는 회사들이 많다.

서울 구로공단의 직물원단 수출업체인 S무역상사 대표는 “중국은 저가 공세뿐만 아니라 최근 들어 기술 수준까지 거의 한국을 따라잡았기 때문에 기존 제품을 수출하는 것은 이제 끝났다”고 한숨지었다.

경기 시화공단에서 자동차 부품과 건축자재 등을 생산하는 D금속. 이 회사 L사장은 “외국인 근로자의 임금이 1∼2년 사이 월 50만원에서 110만원으로 2배 이상 뛰었다. 게다가 대기업들은 납품 가격을 계속 후려치는 바람에 죽을 맛이다”고 말했다.

인조피혁과 플라스틱 제품류를 수출하는 N무역의 대표는 “회사 설립 이래 최악의 상황”이라며 “중국뿐만 아니라 태국과 인도의 저가 공세를 견디다 못해 일부 제품은 생산을 중단했다”고 말했다.

환율 변동에 무방비 상태인 중소기업들은 계약 체결부터 선적 시기 사이에 환율이 달라져 적자를 보면서 수출하는 일도 많았다.

▽내수 분야도 부익부 빈익빈〓서울 동대문과 남대문시장 상인들은 한결같이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손님이 줄어들고 있다. 올봄보다 손님도 매출도 약 20% 정도 줄었다”고 말했다.

서울 중구 신당동 의류도매상가 광희시장 내 ‘프로조이’ 조봉래 사장은 “올봄에만 해도 반짝 경기가 괜찮았다. 지금은 매우 어렵다. 경기가 나빠진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돈을 안 쓰려고 한다”고 말했다. 손님이 줄어도 공장은 놀릴 수 없기 때문에 생산을 계속해 재고만 쌓이고 있다는 것.

서울 중구 회현동1가 복합 쇼핑몰 ‘메사’의 주차장에는 상반기에는 하루 800∼1000대가 주차했지만 지금은 10% 이상 줄었다. 그만큼 고객이 줄었다는 것.

반면 새로운 유통 형태인 홈쇼핑업계는 초고속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홈쇼핑 시장은 지난해 2조원에서 올해 4조원 이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1, 2위 업체인 LG홈쇼핑과 CJ홈쇼핑은 3·4분기(7∼9월)에 매출액이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61∼80% 늘어났다. 롯데 신세계 현대 등 대형 백화점의 10월 매출 신장률의 경우 작년 같은 달과 비교할 때 10%가량 늘었다.

신연수기자 ysshin@donga.com

구자룡기자 bonhong@donga.com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체감경기 왜 떨어지나▼

서울 강남에 사는 주부 김영진씨(37)는 지난달부터 1주일에 한 번 하던 가족 외식 횟수를 2주일에 한 번으로 줄였다. 수입이 줄어든 것도 아닌데 김씨가 외식 횟수를 줄인 것은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다.

인터넷 홈페이지 제작업체 A사는 최근 직원 17명 가운데 4명을 내보냈다. 일감도 줄어들지 않았고 회사 경영 사정이 어려운 것이 아닌데도 그랬다. 회사측은 “하반기 들어 경기가 어려워진다는 소문이 나돌아 미리 준비하는 차원”이라고 말한다.

경기가 악화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요즘 경제 주체들의 체감 경기는 실제 경기상황보다 훨씬 더 위축돼 있다. 올해나 내년 경제성장률은 잠재성장률 이상의 견조한 성장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되는 등 이른바 경제의 펀더멘털은 아직 괜찮은 편이다. 그러나 일반인이나 기업이 느끼는 체감도는 급격히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 미래의 경제 상황에 대한 불확실성이 큰 탓이라는 분석이다. 내일에 대한 불투명성이 불안감으로 이어지고 그 불안감이 경기 위축을 더 부채질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 삼성경제연구소는 경제 주체들의 심리적 불안으로 국내총생산 성장률이 2%가량의 편차(마이너스)를 보일 것으로 분석했다.

LG경제연구원 김기승 연구위원은 “현재의 경기 상황은 정확히 말하자면 경기 악화라기보다는 불투명성의 확대”라면서 “내일에 대해 확신을 못한다는 점이 사람들을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홍보대행업체인 B사도 그런 경우다. 이 회사는 일손이 달려 직원을 더 뽑아야 할 상황이지만 이를 보류하고 있다. “주변에서 하도 어려워질 것이라는 말들이 많아서”라는 게 이유다.

‘경제는 심리’라는 말처럼 일본의 장기불황의 주범 중 하나도 이 같은 심리적 위축이었듯이 경제 주체들의 과도한 불안감은 경기 악화를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명재기자 mjlee@donga.com

박형준기자 lovesong@donga.com

▼경쟁력이 관건이다▼

구조조정을 착실히 한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의 성과는 경기전망이 불투명할 때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구조조정에 성공한 기업은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로 역량을 집중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당장 이익이 나더라도 장기적으로 볼 때 경쟁력이 없는 부분은 과감하게 팔아 치운다는 발상을 한다.

현대모비스(옛 현대정공)는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통해 자동차부품 전문기업으로 성공적으로 변신한 케이스. 이 회사의 구조조정은 ‘선택과 집중’을 통해 백화점식 사업 구조에서 벗어나 자동차 부품 한 곳에 전문화하는 데 주력했다.

99년부터 완성차사업부문은 현대자동차에, 철도차량사업과 플랜트사업 전차(戰車)사업은 ㈜로템으로 각각 양도했다. 대신 현대 및 기아자동차의 애프터서비스(AS)부품판매사업을 인수했다.

신일규 현대모비스 경영지원본부장(전무)은 “옛 현대정공 사업의 97%를 구조조정하면서8800명이던 인력도 3500명으로 대폭 줄였다”고 말했다.

현대모비스는 현재 AS 부품 판매, 모듈부품 제조, 부품 수출 등 자동차 부품 사업만으로 올 예상 매출과 순이익이 99년에 비해 각각 2.3배, 18.6배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기는 32가지의 전자부품 2만여종을 한 달에 30억개 이상 생산 판매해 왔다. 그러나 삼성전기는 올 들어 강력한 구조조정을 실시하면서 광픽업, 첨단 콘덴서인 MLCC, 차세대인쇄회로기판 MLB 등 세계 1위가 될 수 있는 전략 품목 9개를 선정했다. 비주류로 분류되는 부품의 자체 생산은 앞으로 대폭 줄이겠다는 것.

삼성전기측은 “이를 통해 작년 9800여명이던 인원을 연말까지 8000여명으로 줄일 계획”이라며 “내년엔 전략 품목 위주로 집중 투자해 이익률을 10%대로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금융연구원 정한영 거시금융팀장은 “구조조정을 제대로 한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의 차이는 경쟁력으로 나타나고 이것이 수익으로 연결된다”고 강조했다.

이강운기자 kwoon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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