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왕’ 박왕열이 외국 교도소 안에서도 마약 밀반입을 지휘할 수 있었던 건 비트코인과 텔레그램 때문이었다. 그는 살인죄로 필리핀 교도소에 수감된 채로 가상자산 지갑 47개에 분산한 96억 원대 비트코인을 미끼로 동업자를 불러들였고, 휴대전화로 국내외 조직에 지령을 내렸다. 2019년부터 2024년까지 그가 국내로 밀반입한 필로폰 등 마약류는 63억 원어치였다.
동남아 교도소만의 문제일까. 경기 의정부교도소에 수감된 ‘탈북 마약왕’ 최정옥(39·여)의 옥중 경영을 보면 그렇지 않다. 탈북자 출신인 그는 2024년 11월부터 단 두 달 만에 6억 원대 필로폰 등을 유통시켰다. 중국과 동남아 일대에서 마약을 들여와 국내에서 수많은 중독자를 양산한 혐의로, 그가 교도소에 갇혀 있을 때의 일이다.
비결은 비대면 기술이었다. 조직원에게 편지를 보내 중고 거래 애플리케이션(앱) 당근마켓에서 운반책을 모집하게 했다. 서울 도심의 셀프 스토리지(개인 물품 보관소)를 ‘물류 허브’로 삼았다. 대금은 비트코인으로 주고받았다. 담장 2개를 한 번에 넘는 것도 예사였다. 다른 교도소에 갇힌 공범을 지목하며 “가서 ‘정옥이 오빠’라고 하면 (마약 유통) 방법을 알려줄 거다”라고 지시했다. 최정옥에게 교도소는 참회의 공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경찰의 급습이나 경쟁 조직의 보복을 신경 쓰지 않고 영업에 전념할 수 있는 ‘안전 가옥’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방식은 이미 수년 전부터 경고등이 켜져 있었다. 2021년 12월 강원 춘천교도소에 수감된 한 총책은 면회 온 ‘구직자’에게 해외 공급책을 연결해 줬다. “액상 마약을 고추 건조기로 말려서 일산 오피스텔에 가져다 두라”는 구체적인 지시가 그대로 이행됐다. 편지 검열을 비웃듯 대마는 이더리움, ‘클럽 마약’ 케타민은 도지코인이라는 암호로 불렀다. 그렇게 유통한 케타민이 7.2kg이 넘었다. 동남아 마약 사범이 거꾸로 국내 교도소에서 마약 유통을 컨설팅한 사례도 있다. 2022년 2월 경기 여주교도소에 수감된 한 베트남 마약 밀수범은 같은 국적 운반책에게 편지로 “마약 관련 연락은 ZALO(베트남의 채팅 앱)로만 할 것” 등을 조언했다.
이쯤 되면 우리가 지금 범죄자를 가두고 있는 건지, 아니면 마약을 더 안전하게 유통할 환경을 혈세로 제공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든다. 마약 조직은 이미 플랫폼으로 인력과 물류, 자금을 분산 운영하는 정보기술(IT) 기업에 가깝다. 이들을 콘크리트 담장에만 가두는 방식은 유효기간이 지났다. 이제는 고도의 기업 범죄로 보고 대응해야 한다. 담장 밖 사회에 숨겨둔 인적 네트워크와 은닉 자산을 ‘디지털’로 단절하는 것이다.
수용자의 위험도에 따라 접견과 서신을 어디까지 풀어줄지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마약 밀매 조직의 총책처럼 옥중 경영의 가능성이 크다면 더 철저히 감시하는 방법도 있다. 교도소에서 버젓이 ‘구직자 면접’을 하고 범죄 매뉴얼을 하달하는데 그 통로를 그대로 열어두는 건 권리 보장이 아닌 방치다. 동시에 가상자산 추적과 몰수 체계를 기업 범죄 대응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네덜란드 정부는 2024년 9월 마약 자금 세탁에 악용된 가상자산 거래소 2곳을 폐쇄하는 강수를 뒀다. 자금줄과 네트워크를 끊지 못하면, 수감쯤은 우습게 여기는 또 다른 마약왕이 언제 어디서든 탄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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