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리포트] AI세상에서 ‘느림’ 찾는 청년들
원데이 클래스-사내 동호회 인기… 진득하게 음악 듣는 감상실 늘어
‘큐레이션’으로 차별화 둔 공간도… “AI 시대의 반작용, 더 유행할 듯”
《‘느린 취미’ 부활
속도와 효율이 일상이 된 시대, 청년들은 일부러 ‘느린 시간’을 경험하려 한다. 한때 어르신들 취미로 여겨졌던 뜨개질이 트렌드가 되고, 사라지던 음악감상실이 부활하고 있다. 속도를 늦추는 사람들을 들여다봤다.
28일 오후 서울 광진구에 있는 뜨개 공방 ‘단비스튜디오’.
이날 ‘뜨개질 원데이 클래스’ 도전 과제는 카드지갑 만들기였다. “혹시 바로 완성을 못 하는 경우도 있나요.”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학창 시절 미술 수행평가 평균 점수가 늘 B를 넘지 못했던 ‘똥손’으로 살아온 기억 때문이다. 하지만 공방을 운영하는 김명주 씨(32)는 “어떻게든 다 완성하게 만들어 드리니 걱정 말라”며 웃었다.
뜨개질은 최근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크게 각광받고 있는 ‘느린 취미’ 중 하나다. 한때 어르신들의 취향으로 여겨졌던 뜨개질은 요즘 인스타그램에 ‘뜨개질’ 해시태그를 달고 올라온 게시물만 약 130만 건에 이를 정도다. ‘뜨개스타그램’ ‘뜨개질’ ‘니팅힙(Knitting hip)’ 등의 태그도 쏟아진다.》
‘느린 취미’가 국내외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뜨개질 같은 느린 취미는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해 마음을 진정시키는 활동을 일컫는다. 청년층에겐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여유를 준다고 여겨지며 빠른 속도로 확산되는 분위기. 해외에서도 ‘Mindfulness(마음챙김)’나 ‘Digital detox(디지털 디톡스)’의 수단으로 여겨지며 관심이 높아지는 추세다.
● “유럽의 푸근한 할머니 된 느낌”
뜨개질 수업은 이런 느린 취미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날 수업은 7호 코바늘로 가장 기초적인 ‘사슬뜨기’와 ‘짧은뜨기’를 익히며 시작됐다. 먼저 시범을 보여주는 김 씨의 능숙한 손길 끝에 카드지갑의 몸체가 차곡차곡 쌓여 올라갔다.
처음엔 정확한 위치도 헷갈리고, 팽팽하게 실을 고정하려면 펴야 하는 손가락은 자꾸만 구부러졌다. 하지만 느릿느릿 다음 코를 뜨기 위해 바늘을 옮기다 보면 복잡한 생각이 줄어들고 손의 감각만이 남았다. 김 씨는 “예전엔 뜨개질이 ‘엄마들의 취미’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팬데믹 이후 젊은 세대들도 많이 찾는다”며 “요즘엔 ‘디지털 디톡스’를 이유로 입문하는 이들이 늘어났다”고 전했다.
28일 서울 광진구의 한 뜨개 공방에서 기자가 카드지갑을 만드는 모습. 한 코 한 코 반복적으로 작업해 나가자 머릿속 잡념이 사라졌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뜨개질이 힙한 취미로 뜨는 건 쇼츠나 릴스 등에 찌들어 산만해진 머릿속을 비울 수 있는 데다 실용적이기 때문이다. 서울 서대문구의 ‘바늘이야기’는 뜨개인(뜨개질하는 사람)의 성지로 불린다. 뜨개질 관련 용품을 팔고, 2층에 뜨개질 공간도 따로 마련해뒀다. 목도리와 장갑은 물론이고, 비니와 티코스터 등 만들 수 있는 물품 종류도 많다.
뜨개질을 취미로 삼은 지 3년쯤 됐다는 직장인 정수인 씨(29)는 “출퇴근 버스에서도 뜨개질을 하고, 만든 물건은 주변에도 나눠준다”며 “뜨개질을 하다 보면 불안감이 줄어든다. 마치 코코아를 마시는 유럽의 푸근한 할머니가 된 느낌”이라고 했다. 30대 직장인 박모 씨도 “요새는 도안과 실이 함께 든 키트를 구매할 수 있어 더 편리하다”며 “뜨개질이 ‘방구석 골프’라 불릴 만큼 의외로 재료 값이 많이 들긴 하지만, 어디서든 할 수 있는 게 장점”이라고 했다.
뜨개질 사내 모임도 생기고 있다. 출판사 민음사엔 ‘짓기방’이란 모임이 있다. 글이든, 점토든 무엇이든 만드는데, 주력 아이템은 뜨개질. 이정화 민음사 해외문학팀 차장은 “점심 시간에 탕비실 등에서 삼삼오오 모여 뜨개질을 하곤 한다”며 “‘이 집 실이 싸다’는 등 정보나 구하기 어려운 도안을 공유한다”고 했다.
영화를 보며 뜨개질을 하는 이색 이벤트도 등장했다. CGV는 지난해 CGV강변 씨네&포레 상영관에서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며 뜨개질하는 ‘뜨개상영회’를 열었다. 관객들의 호응이 이어지자 전국 10여 개 극장으로 확장해 진행하기도 했다. CGV 관계자는 “뜨개질과 결이 맞는 잔잔한 영화를 상영했을 때 특히 관객 반응이 좋았다”고 전했다.
● 음악도 ‘집중해서’ 듣는다
서울 마포구의 음악 감상 공간 ‘쿼터’에선 떠오르는 키워드를 말하면 그에 어울리는 노래를 선곡해준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느린 취미의 유행은 뜨개질로 그치지 않는다. 음악을 차분하게 감상하는 공간인 ‘음악감상실’도 최근 다시 늘고 있다. 어디서나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소비 방식은 갈수록 파편화되고 있지만, 오히려 음악에 온전히 집중하는 공간을 원하는 이들이 늘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문을 연 서울 마포구 음악감상실 ‘틸트’는 이런 흐름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단순히 음악을 틀어주는 카페가 아니다. 소리를 ‘듣는 과정’ 자체에 집중하도록 설계됐다. 특히 중심 공간에 360도 전 방향 스피커를 설치해 방문자들이 어디서나 동일한 소리를 체험할 수 있다.
직장인 문모 씨(29)는 이달에만 두 번이나 틸트를 찾았다. 윤상의 앨범 ‘클리셰’를 처음부터 끝까지 90분간 듣는 리스닝 세션과 데이비드 보위의 주요 곡을 100분간 감상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문 씨는 “진득하게 음악을 듣다 보면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소리가 들리고, 아티스트가 곡에 담은 의미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며 “앨범 수록곡 중 분명 취향에 맞지 않는 트랙도 있지만, 그마저도 애정을 갖고 끝까지 들어보는 연습이 된다”고 했다.
사람만이 해줄 수 있는 특별한 ‘큐레이션’을 내세운 공간도 있다. 1000여 장의 음반이 빼곡히 들어찬 서울 마포구 재즈 및 클래식 음악감상 공간 ‘쿼터’는 원하는 느낌의 곡을 단어나 문장으로 골라 내밀면 그에 어울리는 음악을 선곡해준다. 28일 이곳을 찾아 “따뜻한 불빛이 떠오르는 음악”을 요청하자 차이콥스키의 ‘안단테 칸타빌레’가 흘러나왔다. 온기가 스며든 듯한 음악이 풍성하게 귀를 채웠다.
음악감상실은 다양한 이벤트의 장이 되기도 한다.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는 2024년 경기 파주시의 LP 음악감상실 ‘콩치노 콩크리트’에서 연주 및 토크쇼를 열었다.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2022년부터 쿼터를 운영하고 있는 재즈드러머 정마루 씨는 “내겐 익숙한 뮤지션이라도 누군가에겐 여전히 어렵게 느껴질 수 있어 ‘키워드’ 형식의 큐레이션을 유지하고 있다”며 “염화칼슘 같은 뜬금없는 단어든, 개인의 사연이든 적어주는 대로 선곡해준다”고 했다. 이어 “이곳은 단순히 음악을 틀어주는 공간이 아니라, 음악을 매개로 이야기가 오가는 ‘살롱’에 가깝다”고 덧붙였다.
음악감상실이 다양한 문화 실험의 장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는 2024년 경기 파주시의 LP 음악감상실 ‘콩치노 콩크리트’에서 유튜브 콘텐츠 ‘어라운드 클래식’ 오프라인 버전인 ‘오프 어라운드 클래식’을 선보였다. 국립심포니 소속 20, 30대 단원들이 스메타나와 드보르자크의 현악 4중주 작품을 연주하고, 관객과 대화도 나눴다. 국립심포니 관계자는 “젊은 세대와의 접점을 넓히기 위해 기존 공연장과 다른 공간을 택했다”며 “젊은 연인 관객의 방문이 특히 많았다”고 했다.
● “두웅” 긴장감 날리는 ‘싱잉볼’
“현대인의 몸은 거의 매 순간 각성돼 있죠. 그 긴장감을 잠깐이라도 내려놓으시길 바랍니다.”
27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한 요가원. 원장의 설명과 함께 ‘두웅’ 싱잉볼(Singing Bowl) 소리가 울렸다. 이날 수련에 참석한 회원들은 진동과 함께 눈을 감고 명상에 빠져들었다. 약 15분간 이어진 은은한 소리와 진동에, 몇몇은 잠시 졸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도 나무라지 않는다. 원장은 오히려 “잠이 오든, 오지 않든 스스로 원하는 대로 따라가라”며 “이 시간은 몸을 이완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고 했다.
‘싱잉볼(Singing Bowl)’은 금속으로 만든 명상 도구다. 문지를 때 나는 소리가 마음이 안정되도록 돕는다. 게티이미지뱅크소음으로 가득 찬 세상. 잠시라도 이를 벗어나기 위한 명상도 ‘느린 취미’로 인기다. 특히나 ‘노래하는 악기’로 불리는 싱잉볼을 찾는 이들도 늘고 있다. 7가지 금속을 녹여 만든 주발을 막대로 두드리면 발생하는 진동이 우리 몸을 이완시킨다고 한다. ‘자율 감각 쾌락 반응(ASMR)’에 자주 쓰이는데, 최근 젊은층에서 인기를 끈 ‘불교 박람회’ 체험 클래스로도 자주 소개됐다.
이날 전체 참석자 5명 중 3명은 30대. 퇴근 뒤 요가원에 들렀다는 김정효 씨(34)는 “하루하루 수많은 생각과 관계에 치여 사는데, 싱잉볼 소리에 집중하다 보면 잡생각이 사라진다”며 “나 자신에게 몰입하는 게 서툴다 보니 요가원 도움을 받기 위해 찾게 됐다”고 했다. 또 다른 회원은 “너무 맘에 들어 싱잉볼을 직접 구매할 생각”이라고도 했다.
전문가들은 인공지능(AI)과 소셜미디어 등으로 인해 세상이 흘러가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이런 느린 취미를 찾는 이들은 더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빠른 변화가 있다 보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디톡스 활동이 주목받기 마련”이라며 “복잡한 세계에서 발을 빼고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가는 취미는 앞으로 더 큰 각광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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