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앞둔 시간의 아까움을 느끼고, 그 아까운 시간에 어떻게 독창적으로 살아 있음을 누리고 사랑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건 인간만의 비장한 업이 아닐까, 그가 선택한 인간다운 최선은 가장 아까운 시간을 보통처럼 구는 거였다.”
―박완서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 중
이미란 롯데문화재단 마케팅팀 수석‘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은 폐암으로 남편을 떠나보낸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여덟 개의 모자’는 작가의 남편이 항암 치료를 받으며 죽음을 앞둔 마지막 1년 동안 사 모으고, 선물 받은 것들이다. 작가는 매일 다양한 무늬와 재질의 모자를 번갈아 쓰며 멋을 부리는 남편을 타박한다. 하지만 곧 깨닫는다. 그가 가장 열심히 하고 있는 일은 병들기 전의 ‘보통 때처럼’ 살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이 책의 장면들이, 지난해 유방암 판정을 받고 항암 치료를 시작하며 또렷이 떠올랐다. 저자남편의 투병 시기는 1988년 무렵이다. 그간 의료 기술은 발전했지만, 독성 항암제의 부작용만큼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책 속에 묘사된 항암 치료 장면과 부작용 반응은 지금의 내 모습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정확했다.
예상보다 빠르게 빠지는 머리카락을 보며 남은 업무와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가발과 모자를 급히 주문했다. 고급 가발 가게에 데려가 비싼 인모 가발을 사주겠다는 다정한 지인도 많았다. 하지만 어색한 민머리가 된 내가 그들 앞에서 웃어도, 울어도, 그들이 함께 울어버릴 것 같아 스스로 마련했다.
T.P.O(시간, 장소, 상황)에 맞춰 가발을 고른다. 운동할 때, 모임에 갈 때, 쇼핑을 할 때 각각 다르다. 온라인으로 주문한 저렴한 가발의 가르마는 어색하고 인조 티가 제법 난다. 그래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진짜처럼 보이는 삶’이 아니라, ‘보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진짜의 삶’이라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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