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동네마다 치매 후견지원센터… 가족도 목돈 못 건드린다[히어로콘텐츠/헌트④-下]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2월 17일 21시 00분


〈4-하·끝〉 국가-지자체가 ‘방어선’ 돼야
과거 ‘치매머니 사냥’ 골치였지만, 돈-돌봄 분리시켜 피해 줄여
전문 후견인-신탁에 재산 맡기고… 저소득층 후견 관리 국가가 지원
은행선 치매 고객 고액거래 신고

지난달 6일 일본 사이타마현 한노시의 솜포요양원에서 미와 요시오 씨가 자신의 임의후견계약 내용이 담긴 서류를 들고 미소 짓고 있다. 4년 전 임의후견 계약을 체결한 미와 씨는 최근 인지능력이 떨어짐에 따라 이날 본인 동의를 거쳐 본격적인 후견 개시 절차에 들어갔다.
지난달 6일 일본 사이타마현 한노시의 솜포요양원에서 미와 요시오 씨가 자신의 임의후견계약 내용이 담긴 서류를 들고 미소 짓고 있다. 4년 전 임의후견 계약을 체결한 미와 씨는 최근 인지능력이 떨어짐에 따라 이날 본인 동의를 거쳐 본격적인 후견 개시 절차에 들어갔다.
지난달 6일, 일본 도쿄에서 차로 1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사이타마현 한노(飯能)시의 솜포요양원. 로비에 들어서자 따스한 노란 조명 아래 백발의 미와 요시오 씨(78)가 나무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그의 오른쪽에는 27년 지기이자 법무사인 다카하시 히로시 씨가 자리했다. 긴장한 표정의 미와 씨가 입을 열었다.

“저한테…. 재산이 있나요?”

● ‘나다운 삶’ 위해… 12만 명이 임의 후견
미와 씨(오른쪽)가 요양원 접견실 책상 앞에 앉아 자신의 후견인인 다카하시 히로시 법무사로부터 임의후견 계약 내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미와 씨(오른쪽)가 요양원 접견실 책상 앞에 앉아 자신의 후견인인 다카하시 히로시 법무사로부터 임의후견 계약 내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아내와 사별하고 아들과 떨어져 홀로 사는 그는 2년 전 치매로 진단된 후 증상이 계속 나빠져 최근에는 재산이 있다는 기억조차 희미해진 상태였다. 한국이었다면 ‘치매 머니 사냥꾼’이 군침을 흘릴 표적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날의 풍경은 약탈이 아닌 보호의 현장이었다. 과거 부동산업자로 일했던 미와 씨는 건강했던 4년 전 다카하시 씨를 후견인으로 정해 뒀다. 이날은 후견 활동을 공식적으로 개시하기 위해 본인 의사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다카하시 씨는 미와 씨가 직접 서명했던 계약서를 꺼내 차분히 읽어 내려갔다. “혹시 내가 치매에 걸려도 살던 곳을 떠나지 않겠다. 내 재산은 요양비로 우선 쓰고, 남은 돈은 지역 발전을 위해 쓰고 싶다.” 서류에서 눈을 뗀 다카하시 씨가 미와 씨와 눈을 맞췄다. “이 약속대로 저희가 재산을 안전하게 지키겠습니다.” 미와 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안심 되네요.”

2년 전 치매 진단을 받고 인지능력이 떨어지고 있는 미와 씨는 이날 4년 전의 임의후견 계약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임의후견인이 당시 계약 내용을 차분히 읊어주자 “안심이 된다”며 눈물을 훔쳤다.
2년 전 치매 진단을 받고 인지능력이 떨어지고 있는 미와 씨는 이날 4년 전의 임의후견 계약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임의후견인이 당시 계약 내용을 차분히 읊어주자 “안심이 된다”며 눈물을 훔쳤다.
일본에는 미와 씨처럼 건강할 때 미리 후견인을 정해 둔 노인이 12만 명이 넘고, 실제로 후견이 개시된 사례가 1만4229명에 이른다. 후견 신청자가 229명, 개시 사례가 32명에 그친 한국과는 다르다. 수혜 대상엔 기초생활수급자도 있다. 소외 계층도 미리 준비된 시스템을 통해 ‘나다운 삶’과 재산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 동네마다 ‘후견지원센터’, 문턱 낮춘 해결사
지난달 6일 일본 사이타마현 한노시의 성년후견지원센터. 한노시에서 양성한 시민후견인인 사노 시게루 씨(오른쪽)가 센터 직원과 후견 업무를 상담하고 있다. 은퇴 간호사인 그는 3년째 80대 치매 환자의 시민후견인으로 일하고 있다.
지난달 6일 일본 사이타마현 한노시의 성년후견지원센터. 한노시에서 양성한 시민후견인인 사노 시게루 씨(오른쪽)가 센터 직원과 후견 업무를 상담하고 있다. 은퇴 간호사인 그는 3년째 80대 치매 환자의 시민후견인으로 일하고 있다.
일본이 이처럼 탄탄한 방어막을 갖추게 된 비결은 무엇일까. 그 답을 찾기 위해 같은 날 오전 한노시의 ‘사회복지협의회’를 찾았다. 한국의 행정복지센터와 비슷한데, 이곳에선 각 지방자치단체의 후견 업무를 한다. 한노시는 인구 8만 명의 소도시지만, 이곳 1층에는 ‘중핵기관’(후견지원센터)이라는 나무 팻말이 걸린 사무실이 큼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사무실에선 사노 시게루 씨(68)가 센터 직원과 상담 중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양성한 ‘시민후견인’이다. 은퇴 후 간호사 경험을 살려 이웃 치매 노인의 후견인으로 활동하는 그는, 이날도 자신이 맡은 80대 치매 노인의 병원비 납부 문제를 상의하러 들렀다.

나미키 카즈히로 한노시 사회복지협의회 사무국장은 “한국에서는 친족이 아닌 후견인을 구하려면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 수백만 원을 내야 한다고 들었지만, 일본은 다르다”고 했다. 일본은 2016년 ‘성년후견제도 이용촉진법’을 제정하고, 전국 지자체의 약 70%에 후견지원센터를 설치했다.

지난달 6일 일본 사이타마현 한노시 사회복지협의회 1층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간판에는 “‘한노시 사회복지협의회 창구’, 부담없이 들어오십시오”라고 적혀있다. 이곳 성년후견지원센터에서는 시민후견인 양성 및 교육, 후견 업무 상담 등이 이뤄진다.
지난달 6일 일본 사이타마현 한노시 사회복지협의회 1층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간판에는 “‘한노시 사회복지협의회 창구’, 부담없이 들어오십시오”라고 적혀있다. 이곳 성년후견지원센터에서는 시민후견인 양성 및 교육, 후견 업무 상담 등이 이뤄진다.
이곳에서는 상담부터 서류 작성, 후견인 매칭까지 ‘원스톱’으로 이뤄진다. 기댈 곳 없는 치매 노인에게는 사노 씨 같은 시민 후견인을 연결해 준다. 사노 씨는 “한 달에 한 번 치매 노인의 병원비를 정산하고, 정기적으로 면회를 가 말벗이 되어 드린다”며 “이웃을 지킨다는 책임감으로 일한다”고 말했다. 시민 후견인의 시급은 1600엔(약 1만5000원)으로, 도쿄의 최저시급 1226엔(1만1600원)보다 높다. 후견인 지정 절차도 효율적이다. 한국에선 신청부터 선임까지 최소 6개월 이상 걸리지만 일본은 대체로 2개월이면 된다.

후견인이 지정되기 전에도 보호망은 작동한다. 한노시는 판단력이 떨어지기 시작했으나 아직 법정 후견이 필요할 정도는 아닌 노인을 위해 ‘안심 서포트’ 제도를 운용 중이다. 누가 빼돌리지 못하게 연금이나 수당을 직접 노인에게 전달한다. 저소득층의 경우 후견인의 활동을 관리하는 감독인 비용도 국가가 대신 내준다. 일본도 아직은 사후 조치인 법정후견을 이용하는 노인이 많지만, 임의후견 활성화를 위해 법 개정도 추진 중이다.

● ‘가족 약탈’의 교훈… 전문가와 신탁이 만든 ‘철벽’
지난달 7일 도쿄 신주쿠구의 일본사법서사회연합회 ‘리걸서포트’ 관계자들이 일본의 성년후견제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일본은 2016년경 친족 후견인에 의한 부정행위가 사회 문제가 되며 전문가 후견인 양성에 공을 들였다.
지난달 7일 도쿄 신주쿠구의 일본사법서사회연합회 ‘리걸서포트’ 관계자들이 일본의 성년후견제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일본은 2016년경 친족 후견인에 의한 부정행위가 사회 문제가 되며 전문가 후견인 양성에 공을 들였다.
일본이라고 처음부터 완벽했던 건 아니다. 도쿄 신주쿠구에 있는 ‘성년후견센터 리걸서포트’에서 만난 관계자들은 “일본도 2000년대 초 뼈아픈 성장통을 겪었다”고 입을 모았다. 2016년엔 친족 후견인에 의한 횡령 피해액이 연간 56억 엔(약 520억 원)에 달했다. 자녀가 후견인이 된 뒤 부모 돈을 유흥비로 탕진하거나, 빚을 갚는 데 써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에 일본 법원은 칼을 빼 들었다. ‘돈’과 ‘돌봄’을 분리하는 대수술을 감행한 것이다. 이에 따라 변호사·법무사 등 전문가가 후견인을 맡는 비율은 과거 10%에서 현재 80% 수준으로 상승했다.

또 일본은 치매 노인이 큰돈을 신탁은행에 맡겨 두도록 ‘후견제도지원신탁’ 제도를 운영한다. 법원이 친족 후견인에게 신상 보호 권한과 그에 필요한 2000만~3000만 원 정도의 유동성 자금만 맡기고, 상대적으로 큰 자산은 금융기관이 관리하도록 사실상 강제하는 방식이다. 후견인이 부동산 판 돈 같은 목돈을 찾으려면 반드시 가정법원이 허가해야 한다.

지난달 4일 변호사 사무실에서 만난 아카누마 야스히로 성년후견전문변호사가 일본의 ‘후견제도지원신탁’ 제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제도 도입으로 일본에서는 후견인에 의한 부정행위 피해가 크게 줄었다.
지난달 4일 변호사 사무실에서 만난 아카누마 야스히로 성년후견전문변호사가 일본의 ‘후견제도지원신탁’ 제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제도 도입으로 일본에서는 후견인에 의한 부정행위 피해가 크게 줄었다.
도쿄변호사회 소속 아카누마 야스히로 성년후견전문 변호사는 “이 시스템을 도입한 후 횡령 피해가 급감했다”고 설명했다. 일본 최고재판소에 따르면 지난해 새로 맡긴 후견제도지원신탁 금액만 3845억 엔(약 3조6600억 원)에 달했다.

최근에는 재산 관리는 전문 후견인이나 신탁은행이, 병원 동행이나 요양원 선택은 가족이 맡는 ‘역할 분담’이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신탁금을 운용하다가 생긴 손실은 전액 금융사가 책임지도록 했다. 치매에 걸리기 전 믿을 수 있는 가족에게 자산 관리를 위탁하는 ‘가족신탁’도 활성화돼 있다. 다만, 일본은 연금 운용기관 등이 재산을 맡아주는 공공신탁은 운영하고 있지 않다.

● 고액 인출하면 은행 직원이 신고
일본에선 경제적 학대 조짐이 보이면 지자체가 강력한 권한을 갖고 개입한다. 학대 징후가 보여도 조사관이 문전박대당하기 일쑤인 한국과는 달랐다. 가족이 없는 경우는 물론이고, 가족이 있어도 학대가 의심되면 지자체장이 직권으로 법원에 후견인을 신청한다. 이 비율이 전체의 30%에 달한다.

금융 시스템 역시 촘촘하다. 일본 금융기관은 지자체와 협력해 치매 의심 고객의 거래 패턴을 모니터링한다. 평소와 달리 고액을 찾거나 낯선 인물이 동행해 돈을 찾으려 하면 즉시 지자체에 신고한다. 공무원은 즉각 개입해 사실관계를 확인한다.

지난달 4일 도쿄 주오대에서 만난 아라이 마코토 교수는 “사회 전체가 후견을 책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라이 교수 본인도 5년 전 자기 딸을 후견인으로 하는 임의후견 계약을 맺었다.
지난달 4일 도쿄 주오대에서 만난 아라이 마코토 교수는 “사회 전체가 후견을 책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라이 교수 본인도 5년 전 자기 딸을 후견인으로 하는 임의후견 계약을 맺었다.
일본 성년후견법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아라이 마코토 주오대 교수는 “치매 노인의 자산이 범죄의 표적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후견 제도와 신탁을 결합해 자산은 안전하게 묶어두고, 돌봄에는 유연하게 쓰이도록 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아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헌트: 치매 머니 사냥’은 저널리즘의 가치와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히어로콘텐츠’(original.donga.com)에서 디지털 플랫폼에 특화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히어로콘텐츠팀>
▽팀장: 이상환 기자 payback@donga.com
▽취재: 전혜진 박경민 최효정 기자
▽프로젝트 기획: 김재희 기자
▽사진: 박형기 기자
▽편집: 하승희 봉주연 기자
▽그래픽: 박초희 기자
▽인터랙티브 개발: 임희래 ND
▽인터랙티브 디자인: 정시은 CD 임선영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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