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아래 초등학교를 다니며 학창시절 내내 산을 올랐다는 함윤이 작가. 그는 “1, 2학년 때는 바래봉, 3, 4학년 때는 노고단, 5학년 때는 반야봉, 6학년 때는 천왕봉 식으로 매년 코스를 업그레이드해서 올랐다”며 “덕분에 하루종일 걷는 것 자체가 제겐 익숙한 행위가 됐다”고 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016년 경기 이천시의 한 지역축제 현장. 라틴 음악단이 가설무대에 올라 연주하는 동안, 옆에서 인형 탈을 쓰고 열심히 춤을 추는 알바생이 있었다. 그날 공연엔 이름 없는 밴드부터 마술사까지 다양한 팀이 참여했다. 비록 세간의 ‘성공’ 기준에선 멀어 보이는 이들이었지만, 그 알바생은 최선을 다해 무대를 채우는 모습에서 그들의 “눈부신 순간”을 목격했다.
시간이 흘러 당시 인형 탈을 썼던 알바생은, 소설이란 또 다른 무대에 올라 이야기를 펼치는 작가가 됐다. 2022년 등단해 ‘젊은작가상’ ‘문지문학상’ ‘문학동네소설상’ ‘이효석문학상’을 연달아 휩쓴 소설가 함윤이(33). 지난 달 11일 첫 소설집 ‘자개장의 용도’(문학과지성사)를 펴낸 작가를 3일 서울 마포구에서 만났다.
수록작 ‘구유로’의 주인공은 개기일식 기념 축제에 참가한 무명 걸그룹. 이들은 오래된 승합차를 손수 몰고 전국의 축제를 전전하며, 얼렁뚱땅 지어진 무대를 오르내린다. 데뷔와 앨범 발매는 계속 미뤄지고, 스물일곱 살이 된 멤버들은 “너무 늙었어”라며 한탄한다. 세계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K팝의 이면을 들춘 듯한 세계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함 작가는 “세간의 시선에선 실패처럼 보일지라도 계속 열심인 사람들, 어떤 과정에 있는 이들이 있다”며 “그들에게 드라마틱한 순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고 했다. 이 작품에서 ‘드라마틱한 순간’은 118년 만에 찾아온 개기일식이다. 그는 “일식은 찰나지만 낮과 밤이 뒤바뀌고 어둠과 빛이 교차한다”며 “그 순간을 다 같이 보는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그의 소설들은 고단함 속에서도 묘한 생기가 감돈다. 지지고 볶다가도 “밥이나 먹자”는 말로 허기를 달래는 인물, 악취와 빛이 공존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이는 작가가 경험한 다양한 ‘현실 세계의 노동’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스무 살 이후 그는 제약공장과 외국인 게스트하우스, 토마토 농장, 동물원, 화장품숍, 웨딩홀 등 정말 많은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함 작가는 “학창시절 거의 매년 지리산을 종주하는 등 산을 타며 얻은 체력이 이를 뒷받침한 것 같다”고 했다.
그의 소설들은 실존하는 작품과 미디어가 적지 않게 등장하는 점도 눈길을 끈다. ‘구유로’엔 독일 감독 베르너 헤어초크의 산문집 ‘얼음 속을 걷다’가, ‘규칙의 세계’에는 미국 시트콤 ‘사인필드’가 나온다. ‘나쁜 물’에는 작곡가 조율이 이 소설을 읽고 만든 곡으로 연결되는 QR코드가 삽입돼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함 작가는 “이야기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이어져 있다. 예컨대 ‘해리포터’는 ‘반지의 제왕’의 영향을 받았고, ‘반지의 제왕’은 북유럽 신화의 영향을 받았다”며 “어떤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를 불러오고, 서로 만나 부딪히는 과정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때문에 작가에게 하나의 이야기란 언제나 또 다른 이야기로 이어지는 ‘문’과도 같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순간이동 마법 기물 ‘포트키’처럼. 함 작가는 “모든 책이 저에게는 포트키였다. 제 책도 독자에게 다음 이야기를 향해 이동할 수 있는 포트키가 됐으면 한다”며 “저한테 자극을 준 작품들을 소설에 직접 드러내는 건, 독자가 그 문을 더 쉽게 발견하도록 돕는 일”이라고 했다. 그가 다음에 건넬 ‘포트키’는 무엇일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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