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율리 일산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심리적 이유로 먹는 것 통제 못하는 섭식장애↑… 마른 몸 추앙도 일조
신체-정서 변화 큰 10대 특히 취약… 혼밥-외모비하 등 이상신호 살펴야
스스로 병 인정하기가 치료 첫걸음… 증상 숨긴 채 2차 질환 생기면 위험
김율리 교수는 “전 연령대에서 섭식장애 환자가 늘어나고 있다. 특히 10∼20대 환자가 많은 만큼 조기 개입 시스템을 신속히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산백병원 제공
20대 직장인 김수현 씨(가명)는 회식 전 화장실 위치부터 살핀다. 먹고 나서 신속히 토하기 위해서다. 김 씨는 5년 전부터 거식증을 앓고 있다. 20대 초 몸무게 강박이 생긴 뒤론 조금만 먹어도 토하거나 종일 운동하며 자책한다. 영양실조와 우울증 등이 생긴 뒤에야 병원을 찾았지만, 병의 그림자에서 온전히 벗어나진 못했다.
섭식장애는 심리적 이유로 먹는 걸 통제하지 못하는 병이다. 거식증과 폭식증이 대표적이다. ‘마른 몸매 욕심’ ‘극단적 다이어트’ 정도로 일축되지만, 섭식장애는 꽤 복잡하고 위험하다. 대부분 합병증을 앓아 치료가 간단치 않다. 병을 숨기는 환자가 많아 사망률도 높다.
환자는 최근 4년 사이(2019년∼2023년) 58.7%가 늘었다. 외모를 비교하고 마른 몸을 이상화하는 현상이 맞물려 낳은 결과다. 사회적 시선에 더 예민한 10대 환자가 특히 많아졌다. 김율리 일산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섭식장애는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으면 불안을 느끼는 강박이 음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며 “전 연령대에서 환자가 증가하고 있는 만큼 해법 모색이 시급하다”고 했다.
● 거식-폭식-보상행동의 악순환
몸무게와의 투쟁은 흔한 일이다. 많은 이가 습관처럼 칼로리를 계산하고 예사로 끼니를 건너뛴다. 섭식장애 범주를 어떻게 구분할까. 김 교수는 “때론 건강 추구 행동과 섭식장애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 보이기도 한다”며 “거식이나 폭식 행태가 일주일에 한 번, 3개월 이상 지속되면 전형적 섭식장애, 그 빈도와 정도가 약하면 비전형 섭식장애로 본다”고 했다.
거식증과 폭식증은 전형적 섭식장애다. 거식증 환자에겐 칼로리가 종교이자 신념이다. 살찌는 것에 대한 공포로 음식을 거부하며 점점 말라간다. 정신질환 중에서 사망율이 가장 높다. 폭식증 환자는 충동적으로 폭식하고 그에 대한 보상행동을 반복한다. ‘정신 줄 놓고’ 먹은 뒤 토하고, 굶고, 식욕억제제나 설사약을 남용하는 식이다.
거식증으로 시작해 폭식증까지 겪으며 상태가 나빠지는 경우가 많다. 극단적 절식은 음식에 대한 욕구를 높인다. 과하게 음식에 탐닉하고, 식탐이 치솟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거식- 폭식-보상행동이라는 악순환 속에 각종 2차 질환을 얻게 된다.
세계적으로 비전형 섭식장애 환자(6%)가 전형적 섭식장애 환자(3%)보다 훨씬 많다. 비전형 섭식장애는 정상 체중 거식증, 폭식하지만 구토는 하지 않는 폭식증, 다이어트와 별개로 음식에 공포를 느끼는 거식증 등 다양하다.
최근엔 건강식에 집착하는 오소렉시아(Orthorexia)가 늘어나는 추세다. 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든 본인 기준의 건강식을 고집한다. 췌장암 투병을 하면서도 채식을 했던 스티브 잡스 애플 공동창업자가 이에 해당한다.
● 심리·환경·유전 요인 함께 작용
흔히 ‘섭식장애는 다이어트로 인한 질환’이라고 여긴다. 잘못된 고정관념이다. 김 교수는 “심리, 환경, 유전 요인이 함께 작용해 발병한다”며 “다이어트를 원인으로 볼 순 없지만 방아쇠 역할을 하는 경우는 많다”고 했다.
완벽주의 성향은 섭식장애의 주요 위험 인자다. 완벽주의 기질이 외로움, 우울함 같은 정서와 만나면 병이 싹트기 쉽다. 친구 관계가 삐거덕대는 10대가 외모 관리에 꽂히거나, 관계나 성취에서 좌절감을 느낀 20대가 식단을 제한하면서 자기 통제감을 회복하는 식이다. 김 교수는 “섭식장애는 (본인이 생각하는) 완벽한 체형을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거식증은 특히 타고나는 측면이 크다. 비만이나 당뇨 같은 대사 질환이 잘 생기는 체질과 반대되는 유전적 특성이 강하다. 거식증 가족력이 있는 이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평생 유병율이 약 11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폭식증은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와 관련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마른 몸을 정답처럼 여기는 사회 분위기도 병을 부추긴다. 외모에 관심이 많고 또래 문화에 강하게 영향을 받는 청소년들은 이런 분위기에 더 잘 휘둘린다. 실제 거식증은 대부분 10, 20대에 발병한다. 김 교수는 “K팝과 아이돌 산업이 커지면서 아이들 사이에 ‘왜곡된 미의 기준’이 퍼지고 있다”며 “최근 유치원생조차 매우 마른 몸을 이상적이라고 믿는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초등학생 환자도 늘어나는 추세”라고 했다.
● 치료 첫 발은 ‘설득’
섭식장애는 ‘숨은 환자’가 많다. 마른 몸을 추구하는 거식증 환자는 치료를 원하지 않는다. 자발적 구토를 동반하는 폭식증 환자는 수치심에 병을 드러내지 않는다. 김 교수는 “치료의 첫 발은 의사의 설득이다. 환자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해야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다”고 했다.
치료는 약물치료와 행동치료(영양치료, 인지행동치료) 등으로 나뉜다.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경우엔 체력 회복에 초점을 둔다. 몸에 영양을 공급하면서 정상적 식습관 회복을 시도한다. 주스, 죽, 과일 등 평소 좋아하는 음식을 삼키는 연습부터 시작한다. 입으로 먹는 걸 거부하는 심각한 환자에게는 정맥주사나 튜브를 활용한다.
음식에 대한 불안도가 높으면 약물치료를 병행한다. 치료 기간은 병의 지속 기간과 심각도에 따라 달라진다. 김 교수는 “규칙적으로 음식을 섭취해야 폭식을 예방할 수 있지만 환자를 설득하는 과정이 쉽진 않다”며 “한 숟가락부터 시작해 1인분까지 양을 늘리는 데 3∼6개월이 걸린다”고 했다.
치료의 가장 큰 걸림돌은 2차 질환이다. 거식증 환자는 체중이 줄면서 후유증으로 소화장애, 생리 장애, 부정맥, 전해질 장애 등을 겪는다. 극심한 영양실조로 성격이 예민해지고 우울증, 집중력 저하 등이 나타나기도 한다. 10년 이내 사망률이 5∼10%에 이를 정도로 위험하다.
폭식증은 극단적인 절식과 폭식을 반복하면서 혈당 변동 폭이 커진다. 식욕 조절 중추가 둔해지면서 점점 더 폭식을 통제하기 어려워진다. 이 과정에서 급성 췌장염, 위 무력증, 장 마비 등이 생길 수 있다. 전해질 손실이 계속되면 기력이 떨어지고 심장마비 위험을 높인다.
문제는 이런 2차 질환 증세가 개별 질환으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상당수 환자가 섭식장애를 인정하지 않거나 숨긴 채 소아과, 내과, 산부인과 등을 전전한다. 근본 원인을 모르니 치료를 해도 진전이 없다. 김 교수는 “엉뚱한 해법으로 시간을 낭비하다가 치료 시기를 놓치는 환자가 적지 않다. 의사에게 상태를 솔직히 털어놓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거식증은 정상 체중 유지, 폭식증은 정상 식사 유지 기간이 6개월 이상 지속되면 완치로 본다.
● 10대 자녀 ‘그러려니’는 금물
섭식장애는 증세가 나타난지 5년 안에 치료하면 회복 가능성이 80%지만 15년 이상 방치하면 20%로 떨어진다. 이상 신호를 알아 두고 바로 대응하는 게 중요하다. △음식에 대한 통제 약화 △가족 식사 불참 △체중 변화 △음식에 대한 지나친 불안감 △체형 및 외모 비하 △다이어트에 과몰입 △사회 활동 회피 △건강 식이에 대한 강박 등이다.
정서와 신체적 변화가 두드러지는 10대는 특히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그러려니’는 금물이다. ‘요즘 아이들이 다 식사를 거르지’ ‘마른 몸이 대세지’ ‘사춘기라 혼자 밥을 먹고 싶겠지’라는 생각에 가려 신호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체형에 대한 평가와 과도한 음식 통제는 조심해야 한다. ‘저녁에 먹으면 살찐다’ ‘당류는 절대 먹어선 안 된다’ 같은 발언을 반복적으로 들으면, 우울과 불안 같은 부정적인 정서가 생겼을 때 거식 증세가 나타나기 쉽다.
이미 섭식장애 증세를 보일 땐 노력과 절제를 주문해서는 안 된다. 음식을 삼키지 못하거나 끊임없이 먹는 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뇌 신경 변화로 스스로 조절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구토하는 경우 몰아세우거나 못 본 척해서도 안 된다. ‘화장실에 오래 있던데 걱정이 되더라. 괜찮냐’는 반응 정도가 적당하다. 김 교수는 “청소년들은 점심은 급식, 저녁은 학원가에서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며 “자녀가 무엇을 얼마나 먹고 다니는지 알아두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한국은 섭식장애 전문 인력이 부족한 편이다. 진단과 치료 체계도 허술하다. 김 교수는 “유럽과 일본에서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밥을 잘 먹는지 살피고, 이상 행동을 보이면 지역 섭식장애 전문 병원과 연계해 치료를 지원한다”며 “10∼20대 환자가 많은 만큼 조기 개입 시스템을 신속히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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