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기 그지없는 날에도 “행복하다” 자신하는 고영배의 비법은? [차트 밖 K문화]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9월 19일 14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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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원 TOP 100 차트인, TV 화제성 순위…. 매일 같이 쏟아지는 기사 제목입니다. 시선에서 자유로울 것 같은 예술계도 성공의 기준은 꽤 명확한 편입니다. 그럼 당장 순위권에 없는 이들은 어떨까요? ‘차트 밖 K문화’는 알려졌지만 알려지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연재물입니다. 유치할지라도 대놓고 진지하게, 이 시대 예술가들의 철학을 소개합니다.
2011년 4월 8일. 13년 차 밴드 소란의 보컬이자 리더 고영배(40)는 이날을 기억한다.

데뷔 앨범 ‘그때는 왜 몰랐을까’을 내고 반 년가량 흐른 날. 당시 처지로선 큰 규모였던 서울 마포구 KT&G 상상마당에서 단독 공연을 열었다. 지인과 팬들이 300석을 채워주었다. 공연 후반부, 데뷔 앨범 수록곡 ‘이렇게 행복해’를 부를 때였다. 첫 소절을 읊는데 관객들이 큰 소리로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가사를 다 알지?”하는 의문과 “어딘가에 우리 음악이 닿고 있었구나”하는 안도감 사이로 한 가지 확신이 생겼다. “계속 밴드를 해도 되겠다”는 확신.

고영배가 15일 발간된 자신의 에세이 ‘행복이 어떤 건지 가끔 생각해’(북폴리오)를 들고 있다. 김동주기자 zoo@donga.com
12일 서울 마포구의 소속사에서 만난 고영배는 이 찰나를 “인생의 전환점이 된 순간”이라고 했다. 그는 “아들이 교수가 되길 바라셨던 어머니께 ‘1년만 밴드 해보겠다’고 설득해 놓았던 때였다. 수익이 부족해 멤버들에게도 빚진 마음이 컸었다. 그 상황에서 생각지도 못한 떼창을 마주한 거다. 그 순간이 여전히 기억난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 소란은 ‘페스티벌 강자’로 우뚝 섰다. 고영배는 최근 첫 에세이 ‘행복이 어떤 건지 가끔 생각해’(북폴리오)를 발간하며 “순간순간을 느끼는 것이 행복에 가까워지는 것 아닐까”라고 말했다. 책에는 그가 인디밴드를 만들고 손수 앨범을 제작하고 콘서트를 열어왔던 시절, 유년의 기억,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 등 인생 전반에 대한 짧은 글 34편이 담겼다.

가장 두드러지는 그의 능력은 ‘소소한 행복을 잘 발견하는 것’이다. 고영배는 딸아이에게 부부의 연애 스토리를 들려주며, 군 생활 때 먹었던 밤빵을 떠올리며 행복해한다. 자칫 평범해 보이는 일상을 각별한 하루로 탈바꿈하는, 그야말로 ‘능력’이다.

페스티벌에서 공연하는 밴드 소란. 이들 공연은 후배 가수인 영케이가 “소란 선배님들의 돗자리 존 일으키기 작전을 보고 따라 배웠다”고 말할 정도로 흥겨운 것으로 유명하다. 엠피엠지 제공.
이를 위해 그가 하는 노력은 “호들갑 떨기”다. 날 좋은 날에 나들이를 나왔다고 치자. 그는 단순히 “날씨가 좋네”하고 넘어가지 않는다. “이렇게 날씨 좋은 날에 우리가 같이 있네! 이게 진짜 행복 아닌가?”하며 조금은 소란스럽게 말해본다.

남들이 좋다는 것은 다 해보자는 주의다. 근사한 레스토랑에 갔다고 하면, 좋은 와인을 주문해보는 식이다. “돈이 아깝거나 괜히 모르는 분야라 겁이 나서, 물어보기 창피해서 행복해질 기회를 피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는 이걸 ‘허세’가 아닌 ‘조금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행복이란 게 수동적이에요. 알아서 다가와주는 경우는 드문 것 같아요. 대신 한 발만 더 가면 닿을 수 있는 행복이 많은데, 가만히 있거나 그것이 행복인 줄 몰라버렸을 때 불행해질 수 있죠.
4개월 간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썼다는 고영배는 “책은 음악과 달리 꾸준함과 성실함의 벽이 있더라”하고 말했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평범함의 미학을 좇는 태도는 밴드 소란의 음악과도 닮아있다. 소란은 누구나 공감 가능한 일상을 노래한다. 멜로디는 편안하고, 가사는 쉽다. 밴드 결성 초반에는 “무릇 밴드란 파격적인 것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통속적’이라는 평가가 거슬리지 않는다. “그것이 소란에게는 자연스럽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연애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곡 ‘연애 같은 걸 하니까’, 설렘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곡 ‘너를 공부해’ 등 소란의 음악은 ‘척’하지 않는다. 고영배는 “멋진 척, 뭐라도 있는 척하지 않고 싶다. 그냥 들었을 때 곧장 화자의 상황이 그려질 수 있는 음악이고 싶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세상에 어떤 의미가 있냐는 질문에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하루에 몇백 곡의 신곡이 쏟아져요. 이제 적극적으로 음악을 감상하는 시대는 지났죠. 음악은 천장에 매달려있는 조명처럼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그 와중에도 때때로 귀가 제 음악에 머물러있을 때는 당장의 현실과는 다른 느낌을 받아가셨으면 해요. 저 또한 음악이 가구가 되어버린 상황 속에서 제 음악의 가치를 알아봐주는 사람들을 더 자주 생각하고요.
밴드 소란의 고영배. 엠피엠지 제공.
이따금 초조함이 찾아올 때도 있다. 온 국민이 다 아는 히트곡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금세 고개를 젓는다. “초조하다고 해서 써지는 게 히트곡이 아니지 않냐”며 호방하게 한번 웃어버리고 말 뿐이다. “대신 우리는 쉬면 바로 도태된다”며 장난스레 말했지만 “묵묵히, 물 아래서 발을 멈추지 않는다”는 태도로 매 순간 불안과 싸운다.

그렇게 쌓인 시간은 ‘유쾌한 밴드’라는 그림의 밑바탕이 됐다. “우리에게도 특별해지는 법을 찾아 헤매는 시간이 있었다”는 그는 이제 “헤매던 시간들 모두 가치 있고 특별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소란이 엄청 대단한 건 아니다’라는 말이 너스레는 아니에요. 절대적인 인지도나 규모 면에서 더 뛰어난 친구들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희 공연에 오면 어디에도 느낄 수 없던 재미와 행복을 줄 수 있단 자신감은 별개랍니다. 저희 공연에 놀러 오세요!”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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