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 가장 바쁜 남자의 아내로 사는 것[광복이 외신클럽]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6월 24일 11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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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읽기가 어렵다구요? 국제부 기자 어깨너머에서 외신을 본 경력만 3년. 광복이가 놓치기 아쉬운 훌륭한 외신만 엄선해 전해드릴게요. 바쁜 일상 속 짬을 내 [광복이 외신클럽]을 완독해내신 당신을 위해 매 회 귀염뽀짝한 동아일보 인턴기자 광복이의 일상도 함께 공개합니다!

※‘광복이’는 생생한 글로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매주 한 번씩 등장하는 국제부 임보미 기자의 반려견(부캐)입니다
블라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 부부가 지난달 우크라이나 독립을 이끈 초대 대통령 레오니드 크라브추크의 장례식에 참석한 모습. 키이우=AP 뉴시스
블라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 부부가 지난달 우크라이나 독립을 이끈 초대 대통령 레오니드 크라브추크의 장례식에 참석한 모습. 키이우=AP 뉴시스


요즘 아마 지구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일 것입니다. 젤렌스키는 22일(현지시간) 하루에만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11명의 유럽 정상들과 ‘마라톤 통화’를 했습니다. EU 정상회의를 앞두고 우크라이나의 공식 EU 회원국 후보 지위 지지를 당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젤렌스키는 다음 주 주요 7개국 정상회의(G7),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 7월에는 아프리카연합(AU) 총회에서도 연설에 나섭니다. 말 그대로 전 지구를 상대로 우크라이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총력전을 펼치고 있는 겁니다.

올레나 젤란스카 우크라이나 대통령 영부인의 삶도 하루아침에 달라졌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된 뒤 젤렌스키 대통령과 가족은 러시아 용병단의 암살리스트 1,2 순위에 올랐습니다. 살면서 온 가족이 살해위협을 받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경우는 흔치 않은 일이죠.

이코노미스트 “우리 아들이 군인이 되고 싶대요”: 우크라이나 영부인 인터뷰(왼쪽)-가디언 ‘전시 영부인’ 올레나 젤란스카의 이야기(오른쪽) 기사 화면 캡처
이코노미스트 “우리 아들이 군인이 되고 싶대요”: 우크라이나 영부인 인터뷰(왼쪽)-가디언 ‘전시 영부인’ 올레나 젤란스카의 이야기(오른쪽) 기사 화면 캡처


젤란스카 여사는 최근 이코노미스트 자매지 1843 매거진, 가디언 등 영국 주요 언론과 심층 인터뷰에 나서 러시아 침공으로 완전히 달라진 일상에 대한 소회를 밝혔습니다.
○9살 난 아들에게도 익숙해진 대피
전쟁이 시작되던 날 새벽, 젤란스카 영부인은 멀리서 뭔가가 폭발하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습니다. 단순한 폭죽소리는 아니라는 게 느껴졌습니다. 침대에는 혼자였고요. 옆방으로 뛰어가 보니 남편은 이미 넥타이까지 맨 정장차림이었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젤란스카 여사가 묻자 젤렌스키 대통령은 “시작됐어요”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꿈인지 생시인지, 현실을 믿기 어려운 순간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남편은 다시 전화할 테니 기다리라는 말만 남기고 긴급 안보 회의를 주재하기 위해 키이우 중심부 대통령 기지로 떠났습니다.

9살 난 아들, 17살 된 딸에게 현실을 말해줘야 하는 것은 젤란스카 여사의 몫이었습니다. 젤란스카 여사는 ‘절대 울면 안 된다’고 스스로 되뇌며 자녀들의 방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미 깨있었고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젤란스카 여사는 공습소리가 가까이 들릴 때마다 아이들과 관저 지하실로 피신했습니다.

“비현실적인 느낌이었죠. 무슨 퀘스트를 깨야 집에 돌아갈 수 있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데 아이들한테 패닉에 빠진 모습을 보여줄 수 없으니 온종일 이상한 미소를 짓고 다녔어요. 경호원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요.”


젤란스카 여사는 그날 밤에야, 아주 잠시, 남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이들을 데리고 안전가옥으로 피신하라고 했습니다. 서로 포옹을 하거나 눈물을 흘릴 사치(?)를 부릴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남편을 보내고 나서야 다시는 남편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많은 우크라이나 가정처럼, 대통령 가족 역시 갑자기 이산가족이 됐습니다. 공습경보가 울릴 때면 젤란스카는 아이들을 데리고 지하 방공호로 내려갔다 올라오길 반복했습니다. 젤란스카는 좀처럼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어린 아들이 낮잠을 자거나 휴대전화로 게임을 하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하루는 깜빡 잠에 들었다가 아들이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깼습니다.

“엄마, 대피해야해요.”

2019년 6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오른쪽)과 영부인 올레나 젤란스카 부부와 아이들의 즐거운 한때. 올레나 젤란스카 우크라이나 영부인 인스타그램
2019년 6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오른쪽)과 영부인 올레나 젤란스카 부부와 아이들의 즐거운 한때. 올레나 젤란스카 우크라이나 영부인 인스타그램


○영부인이라는 희한한 자리
이전까지 국제사회에 ‘코미디언 출신 대통령’으로만 알려졌던 남편은 전쟁이 벌어진 뒤 자유세계를 대표하는 얼굴이 됐습니다. 매일 전 세계로 퍼져나간 그의 연설은 그를 국제사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젤란스카 여사는 하루아침에 달라진 남편의 모습에 별로 놀랄 구석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볼로디미르는 늘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를 좀 더 느끼게 된 것일 뿐이다. 남편은 늘 누군가 ‘불가능하다’고 할 때마다 해내던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능력이 있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배우였으니 연기를 잘할 것이라는 인식이 있는 있는데 젤란스카만큼 솔직한 사람도 없다. 난 그 사람 얼굴만 봐도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여러분도 그러실 수 있을 것이라 자부한다.”

젤란스카 영부인은 ‘영부인’이라는 역할이 따지고 보면 굉장히 이상한 자리라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남편의 직업에 따라 결정되는 이 자리는 공식적인 권력을 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얼평’(외모평가)은 물론 무엇을 입는 지까지, 모든 게 끊임없이 대중의 평가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젤란스카 영부인은 영부인의 자리가 주는 ‘소프트 파워’는 누릴만한 힘이라고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지난해 젤란스카 여사는 키이우에서 ‘퍼스트 레이디, 젠틀맨 정상회의’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행사 때는 터키, 브라질 등 전 세계 10명의 영부인이 참가했고 젤란스카 영부인은 올해는 온라인 형식으로 개최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국제사회의 단결을 호소할 예정입니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전쟁 속 여성들’ 회의에 화상으로 참석한 젤란스카 영부인.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전쟁 속 여성들’ 회의에 화상으로 참석한 젤란스카 영부인.

○남편 칭찬에는 인색한 부인 “연설 길이 좀 줄였으면 더 좋았을 것”
대통령 부부는 전쟁이 벌어진 뒤 두 달 넘게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젤란스카 여사 역시 다른 국민들처럼 남편의 얼굴을 매일 저녁 SNS에 올라오는 연설 영상으로만 볼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젤란스카는 남편의 연설이 좋았지만 길이를 절반 정도로 줄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소신도 밝혔습니다. 그는 “볼로디미르는 내가 자기한테 너무 뭐라고 한다고, 제대로 칭찬하는 법이 없다고 말하곤 한다”는 일화도 전하며 남편에게 다소 엄격한 조언가임을 드러냈습니다.

급박한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매일 연설에 나서면서 남편이 수염을 정돈하지 못한 채 카메라 앞에 서는 일도 잦아졌습니다. TV 속 수염이 덥수룩한 남편의 모습은 예전(배우시절)에는 영화촬영을 마치고 휴가지에서 편하게 있을 때나 볼 수 있었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시상황에서 수염은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어린 아들은 평화로운 나라에서 성인이 되길
젤란스카 여사는 우크라이나 난민이 주변국으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국가의 잠재력이 약화되는 것을 우려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미래를 논하기조차 너무 버겁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는 “현재로서는 모든 우크라인들은 일단 살아남는 게 최우선”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장 동부전선에서는 치열한 교전이 계속되고 있고 잔혹행위 역시 계속 발견되고 있습니다. 여전히 평범한 일상은 먼 얘기입니다. 젤렌스키 대통령 부부는 지금도 일주일에 한 두 번 밖에 만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른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젤란스카 여사 역시 다음 세대에 대한 걱정이 큽니다. 가장 마음이 쓰이는 건 주검이 된 자녀를 맞이해야 하는 부모들입니다. 젤란스카는 아이들과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자신의 상황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곧 18살이 되는 딸은 9월 키이우 대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습니다. 딸은 전쟁 속 성인이 됐지만 젤란스카는 아들이 어른이 될 즈음에는 우크라이나가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누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먼 꿈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젤란스카 여사는 “아들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한테 ‘군인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게 가장 무서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이 어른이 될 쯤에는 세상이 전쟁에 이처럼 익숙하지 않기를. 광복이는 오늘도 힘찬 발걸음으로 희망합니다.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이 어른이 될 쯤에는 세상이 전쟁에 이처럼 익숙하지 않기를. 광복이는 오늘도 힘찬 발걸음으로 희망합니다.



임보미 기자 b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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