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엔 소설가…공직생활의 비애가 무기 되었죠”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4월 26일 13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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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지머리에 새로운 도전을 즐기는 사기업 출신 상사는 ‘함께 일하고 싶지 않은 직원’으로 뽑힌 뒤 머리를 깔끔하게 자르고 점점 ‘공무원화’된다. “내가 저 직원보다 2분의1만큼 일을 더 한다.”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을 하지만 밉상이었던 직원은 결국 모두 기피하던 지사로 발령받는다. 퇴근 직전 업무지시가 일상인 상사 때문에 건강에 이상이 온 주인공은 ‘너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걸 상사에게 보여주고 싶어 조금 심각한 병이길 바라면서도 ‘이런 내가 제정신인가?’ 싶은 회의감에 빠진다.

이태승 작가
행정고시에 합격해 국가보훈처 사무관으로 일하는 이태승 작가(36)가 첫 소설집 ‘근로하는 자세’(은행나무)를 12일 펴냈다. 8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책은 중학교 선생님, 국립묘지 직원, 시청 공무원 등 각기 다른 공직자들이 매일 회사에서 벌이는 소소한 고군분투를 드라마틱하게 그린다.

이 작가는 공직에서의 경험이 자신의 색을 드러내는 무기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2015년부터 습작을 써온 그는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단편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 무렵 다닌 소설쓰기 학원에서는 ‘상투성과 전형성을 벗어나라’는 말을 많이 했다. 25일 전화로 만난 이 작가는 “상상력이 멀리 있을 것 같지만 가까이 있더라. 나만 아는 내밀함이 결국은 새로운 것”이라며 “일을 하면서 느꼈던 비애, 뭉클함 등 여러 감정들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제가 가진 ‘새로움’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 작가의 말처럼 그의 소설은 일상 속 비애를 정확히 포착해낸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단편 ‘근로하는 자세’는 독일 출장을 간 환경부 차관, 과장, 막내 사무관이 무장단체에 납치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그들이 쏜 총에 맞아 사무관이 사망하지만 살아남은 이들의 삶 역시 비극이다. 평생을 일에 바친 차관은 대장암에 걸려 시한부 3개월 선고를 받고, 기러기 아빠인 과장은 독단적인 성격 탓에 후배직원들과 멀어져 가정과 직장, 어디에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

“결국 일을 하면서 찾아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인데, 사람들은 시스템에 종속돼 그 사실을 마지막에 깨달아요. ‘내가 일한 보람인 뭐였지?’를 가장 마지막에 돌아보게 되는 거죠. ‘내가 시스템 속에서 잃어버린 건 무엇인가’를 되돌아볼 수 있는 여운을 남기고 싶었어요.”

지난한 일상의 분투로 무뎌진 감정 속에서 인간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심리도 세밀하게 그린다. 가까워지려 하는 상사를 철저히 피하는 주인공은 맞선녀에게도 선을 긋는다. 호감인지 뭔지 모를 미묘한 감정 속에 혼란스러워 하다가 결국 ‘한 번 더 보자’는 말을 끝내 하지 못한다. 사내커플이지만 이를 철저히 비밀로 하는 주인공은 여행지에서 만난 동성커플이 연인임을 떳떳하게 밝히고 스스럼없이 애정표현을 하는 모습을 보며 이미 경로가 정해져버린 듯한 자신의 삶에 갑갑함을 느낀다.

“인물을 통해 독자들이 자신을 한 번 더 돌아보게 만들고 싶었어요. 직장 상사와 맞선녀와의 관계에서 주인공은 타인과의 소통이 단절된 자신을 직시해요. 제목 ‘문 앞에서 이만’처럼 늘 문 앞에까지밖에 못 가는 인물이죠. 사내커플을 소재로 한 ‘오종, 료, 유주’에서는 여자친구를 사회적으로 공개하지 않는 주인공을 통해 비밀에 비밀의 겹을 쌓고 자신이 누구인지 고민하는 직장인의 단상을 그렸죠.”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는 행정사무관, 퇴근 후와 주말은 소설가로 사는 그는 조급함이 생길 때마다 ‘천천히, 재밌게 쓰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대학생 때부터 갖고 있던 창작욕구가 소설이란 매개체를 통해 뒤늦게 피어난 만큼 의무감으로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전 퇴직할 때까지 공무원으로 일할 거에요. 전업 소설가가 되면 돈을 벌기 위해 계속 글을 써야 하고, 그럼 오히려 글 쓰는 것을 즐길 수 없어질 것 같아서요. ‘빨리 뭔가를 내야겠다’는 조급함보다는 천천히, 멀리 보려고 해요. 다작보다는 좋은 것 하나를 쓰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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