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황규인]‘힘센’ 여자 김아랑, 슬기로운 계주 생활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2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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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다들 그렇게 하니까 원래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있다. 쇼트트랙 계주에서는 ‘엉덩이 밀기’가 그렇다. 국제빙상경기연맹(ISU) 규칙에는 그저 ‘교대는 터치로 이루어진다’라고만 나와 있을 뿐 터치 방식을 따로 규정한 내용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다들 엉덩이를 미는 건 그게 가장 효과적인 터치 방식이기 때문이다. 쇼트트랙 선수로 대성하려면 동료 선수를 잘 밀어주는 능력도 필요한 이유다.

여기서 퀴즈 하나. 2022 베이징 겨울올림픽 여자 계주 결선에서 한국의 마지막 주자는 누구였을까. 대회 1500m에서도 금메달을 딴 최민정(24·성남시청)이라고 답하신 독자가 적지 않을 거다. 그러면 최민정을 밀어준 한국 선수는 누구였을까. 이 글 제목이 힌트다. 김아랑(27·고양시청)이 정답이다.

끝에서 두 번째 주자로 나선 김아랑은 마지막 세 바퀴를 남겨놓고 4위에서 3위로 순위를 끌어올렸다. 추월에 성공하기 무섭게 김아랑은 앞서 가던 선수 사이 빈틈을 찾아내 최민정의 엉덩이를 있는 힘껏 밀었다. 그 덕에 최민정은 2위 자리에서 마지막 레이스를 시작할 수 있었고, 안정적으로 레이스를 펼친 끝에 한국에 은메달을 안겼다.

김아랑은 이번 시즌 국가대표 선발전 5위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원래 대표 선발전 5위는 계주 ‘후보’ 선수로 올림픽 엔트리에 이름을 올린다. 문제는 선발전 1위 심석희(25·서울시청)는 ‘어른들의 사정’으로, 3위 김지유(23·의정부시청)는 부상으로 올림픽 대표 명단에서 빠졌다는 것. 그러면서 선발전 6위 서휘민(20·고려대), 7위 박지윤(23·한국체대)이 대표팀에 합류했다. 김아랑도 계주 선발 멤버로 올라섰다. 한국 여자 쇼트트랙 대표팀은 2군도 아니고 3군으로 이번 올림픽을 치렀던 거다.

그러나 곽한영 부산대 교수가 저서 ‘배구, 사랑에 빠지는 순간’에서 지적한 것처럼 “좋은 팀은 완벽한 선수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실체’가 아니라 오히려 부족한 것이 많은 선수들이 서로를 연민하고 빈자리를 메우려 도우며 도달하는 어떤 ‘상태’”다. 역대 최약체라고 평가받던 한국 여자 계주 대표팀은, 이번 대회 개인전에서 한 번도 결선에 오르지 못한 김아랑이, ‘에이스’ 최민정을 힘차게 밀어준 그 순간,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좋은 팀이 됐다.

2014 소치, 2018 평창 올림픽 계주 금메달 멤버 출신인 김아랑은 이번 은메달로 한국 쇼트트랙 역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3개 대회에서 메달을 딴 선수가 됐다. 전 세계적으로도 올림픽 여자 계주에서 금 2개, 은 1개를 따낸 건 김아랑이 처음이다. 공자님 말씀처럼 김아랑은 팀에서 나를 밀어주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대신에 내가 동료를 밀어주지 못할까 걱정한 덕에 ‘계주의 여왕’이 됐던 거다.

다들 ‘왜 나를 안 밀어주냐’고 하니까 원래 그게 맞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건 남이 나를 밀어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누군가를 충분히 밀어주지 못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새봄이 오면 먼저 힘껏 밀어 보자. 올림픽 개인전 메달 하나 없이도 한국 쇼트트랙의 전설이 된 김아랑처럼 말이다.

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kini@donga.com
#힘센 여자#김아랑#슬기로운 계주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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