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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이 원고는 입으로 썼다”[2030세상/박찬용]

박찬용 칼럼니스트
입력 2021-12-07 03:00업데이트 2021-12-0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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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용 칼럼니스트
직업으로의 원고 작성에서 가장 귀찮은 일 중 하나는 인터뷰 녹취록 작성이다. 목소리를 듣고 문장으로 옮기는 일은 생각보다 품이 많이 든다. 집중력이 많이 필요한 건지 아니면 내가 녹취에 잘 안 맞는 건지 녹취록을 만들 때는 사무실에서도 늘 졸았다.

원고 작업을 할수록 손가락 인대의 수명도 걱정이었다. 나는 한 달에 최대 10만 자 정도의 원고를 만든다. 이쯤 되면 원고 품질은 둘째 치고 원고를 만드는 관절이 남아날까 싶다. 이 일을 계속하려면 몸이 건강해야 할 텐데 과연 내 손가락이 오래가려나 싶었다.

그래서 전부터 음성인식 기술에 관심이 있었다. 음성인식이 녹취록을 만들어줄 수 있다면 밤샘 녹취록 작성 노역도 안녕이다. 몇 십만 자의 원고를 만들든 손가락 건강 걱정도 끝이다. 시간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 예를 들어 운전처럼 양손을 전부 쓰는 일을 할 때, 차 안에서 떠들기만 해도 원고가 완성된다면 내 입장에선 이야말로 자율주행 부럽지 않은 생산성 혁명이다.

음성 원고 작성이 놀랍거나 진보적인 생각이 아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사 집필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처칠 회고록을 보면 욕실에 앉아서 말하고 비서들이 그 말을 받아 적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미국의 보석 디자이너 에이자 레이든은 훌륭한 재치를 가졌고 보석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사람이 책 출간을 권했는데 그녀는 글을 써본 적이 없었다. 에이자는 스마트폰 메모장을 켜고 자신의 지식과 통찰을 무작정 말하기 시작했다. 그 책이 한국에서도 출판된 ‘세상이 탐한 보석의 역사’다. 이 책은 내용도 훌륭한데 읽을 때 문장과 논리의 연결이 굉장히 부드럽다. 읽으면서 ‘수다 떠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정말로 말로 만든 책이었다.

글쓰기는 그림이나 필름 사진 같은 낭만의 대명사로 여겨진다. 하지만 직업으로 원고를 만들어 생계를 꾸리는 입장에서 낭만만 따지며 생산성이 떨어지면 뒤처질 뿐이다. 내 일에 남들이 낭만을 느낀다고 내가 먹고살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나도 시험 삼아 이 원고는 입으로 만들어보기로 했다. 공책에 대략적인 줄거리만 적고, 메모장을 켜고, 줄거리를 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에서 만들어진 음성인식 결과물을 워드프로세서로 옮겨 오타 등을 수정해 출고 가능 상태의 원고를 만들었다. 해보니 생각보다 훨씬 인식률이 높다. 문장을 끝내야 할 때는 그냥 ‘마침표’라고 읽으면 자동으로 ‘.’가 붙는다. 음성인식 변환 단계에서의 오타는 내가 고쳐주면 그만이다. 나는 인간이니까.

나이가 들수록 세상을 바꾸는 건 다른 게 아닌 기술인가 싶다. 새로운 기술이 생산성을 바꾸고 생산성을 따라 산업이 달라지며 산업이 바뀌면 개개인의 인생이 변한다. 이미 포털 사이트에서 만든 음성-문자 변환 애플리케이션은 서비스 1년 만에 다운로드 100만 회를 돌파했다. 새로운 기술이 글쓰기와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지도 궁금하다. 입으로 만들고 손으로 마무리하는 원고 제작방식이 마음에 들어서 앞으로 입으로 원고를 더 많이 만들려 한다. 내 손가락은 소중하다.

박찬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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