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 맞아?”… 지도로 그려본 나의 삶[직장인을 위한 김호의 ‘생존의 방식’]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6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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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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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 더랩에이치 대표·조직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조직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은 1856년 설립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화 전문 박물관으로 런던 명소 중 하나이다. 이곳의 작품들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시대의 얼굴: 셰익스피어에서 에드 시런까지’란 제목으로 특별 전시 중이다. 명성, 권력, 사랑과 상실, 혁신 등을 주제로 76명의 삶을 초상화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이 전시장에서 마지막으로 마주하는 작품은 “이게 초상화 맞아?”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초상화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날려버리는 이 작품은 영국 아티스트로서 세계적 명성을 가진 그레이슨 페리의 ‘시간의 지도’이다.

초상화란 사람의 얼굴을 그린 그림으로서 정체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 초상화에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안과 밖이 지도 형태로 그려져 있다. 페리는 정체성이란 하나로 고정된 것이 아니며 삶 전체를 통해 주변 환경과 다양한 만남, 그리고 그 안에서 하게 되는 경험에 따라 움직여가는 것으로 보았다. 그에게 자아는 항상 진행 중인 작업과도 같으며, 따라서 고정된 얼굴이 아닌 지도라는 비유를 택한 것이다. 그는 이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자기 삶에 영향을 미친 사건과 사람 등을 떠올렸다. 지도에 나타나는 길거리 이름에는 “망설이다 마비된” “헛소리 탐지기” 등 작가의 삶과 연관되었을 단어들이 등장한다.

페리가 이처럼 독특한 초상화를 떠올리고 그려낸 과정은 관객들에게 자기 삶을 돌아보는 질문을 던진다. “내 삶을 지도로 그린다면 나는 무엇을 그려 넣을 것인가?” 전시장에서 구매할 수 있는 전시감상 가이드나 인터넷에는 이 그림과 관련해 던져볼 수 있는 질문들이 나와 있다. 초상화를 직접 그리지 않더라도 내 삶을 지도로 놓고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첫째, 성벽 밖, 즉 내가 살면서 마주하고 경험했던 주변 상황들 중에서 현재의 내 모습을 만드는 데 영향을 끼쳤던 사건이나 사람들 열 가지를 지도에 그린다면 과연 나는 무엇을 그리게 될까? 그것은 가정이나 학교, 직장이나 사회에서 내가 경험했던 사건, 만났던 사람들 중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가 성장하도록 도와준 사건과 사람은 누구일까? 내가 이겨낸 위기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 밖에 나에게 영향을 준 의미 있는 장소나 문구, 책, 영화, 음악 등이 있다면 무엇일까? 돌아보면 내 의도가 아닌 우연에 의한 사건들이 내 삶에 끼친 영향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둘째, 성벽 안은 내가 가진 특성을 나타낸다. 각종 성향 진단을 해본 적이 있다면 그 속에 드러난 나는 어떤 모습인가? 나는 어떤 상황에서 내향적이며, 또 외향적인가? 내가 배워서 갖춘 기술은 무엇인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념이나 가치는 무엇인가? 건강에서 자신 있는 부분과 자신 없는 부분은 무엇인가? 내가 오랜 기간 궁금해하는 질문이 있다면 무엇인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를 나타내는 키워드를 10개 그려 넣는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페리는 정체성은 결국 상호작용 속에서 함께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성벽 안에 나를 나타내는 다양한 특징들은 성벽 밖 다양한 사건이나 사람들과 어떻게 서로 만나고, 영향을 주고받는가? 작년과 올해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은 내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나는 코로나19로 인한 상황을 어떤 자세로 마주하고 있는가?

퇴직 이후를 걱정하는 40대 직장인에게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거나 잘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그 핵심 해결책이 자기 개인 역사를 세밀히 들여다보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MBTI(심리유형검사)와 같은 진단을 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무조건 상담을 받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보조 수단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살아온 역사를 돌아보면서 자신이 어떤 어려움을 이겨냈고, 무엇을 배우고 성취해 왔는지 찾아내는 것이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사람은 없다. 모두 자기만의 어려움 속에서 분투하며 살아왔다. 내 삶이라는 역사로부터 자기가 갖고 있는 고유한 힘을 발견해 보길 바란다.

8월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를 벌써 두 번 다녀왔다. 그레이슨 페리 때문이었다. 아마 한 번 정도 더 보러 갈 것 같다.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조직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초상화#정체성#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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