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사건 도화선 된 3·1절 발포’ 당시 증언 나왔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4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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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건드린 기마경찰 말에 어린이 다쳐 경찰 쫓는 과정서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해 발포”
3·1절 기념행사서 시위대에 발포, 민간인 12명 사상으로 갈등 심화

1947년 3월 1일 기념행사를 마치고 시위 군중이 빠져나가다 제주시 관덕정과 광장 등지에서 경찰의 발포로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사진은 1960년대 관덕정에서 집회를 개최하던 모습으로 추정된다. 아래쪽 사진은 제주시 삼성혈 인근에서 기마경찰이 순찰하는 모습. 미국 공군 정훈팀이 1948년 5월 21일 촬영했다. 제주시·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7년 3월 1일 기념행사를 마치고 시위 군중이 빠져나가다 제주시 관덕정과 광장 등지에서 경찰의 발포로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사진은 1960년대 관덕정에서 집회를 개최하던 모습으로 추정된다. 아래쪽 사진은 제주시 삼성혈 인근에서 기마경찰이 순찰하는 모습. 미국 공군 정훈팀이 1948년 5월 21일 촬영했다. 제주시·국사편찬위원회 제공
한국 현대사의 비극 중 하나인 ‘제주4·3사건’. 해마다 4월이면 제주도는 추모와 상념에 젖는다.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돼 마을마다 가정마다 4·3사건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곳이 없다.

사건의 기폭제는 당시 주민 2만5000명에서 최대 3만 명이 운집했던 1947년 3·1절 기념행사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대부분 의견을 같이한다. 이날 기념행사에서 벌어진 경찰의 발포는 4·3사건의 도화선이었다.

정부가 2003년 발간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등 그동안 나온 기록에 따르면 당시 3·1절 행사를 마치고 시위대가 해산하는 과정에서 사건이 벌어졌다. 제주시 관덕정에서 기마경찰이 탄 말에 어린이가 차여 소란이 일어났고, 이를 항의하는 시위대에게 경찰이 발포하며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관공서가 참여한 총파업이 발생하고 좌우익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제주 섬을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이처럼 당시 기마경찰이 탄 말에 어린이가 다치는 사건이 대규모 유혈 사태의 서막이었으나, 지금까지 정확한 내막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동아일보가 최근 이에 대한 새로운 증언을 확보했다. 제주시 노형동의 현임종 씨(87)는 “엉뚱한 행동으로 경찰이 발포하는 사건으로 비화됐다”며 “그 일이 없었으면 4·3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고 말했다.

현 씨의 증언에 따르면 동네 사람을 따라 3·1절 행사가 열린 관덕정으로 갔는데 당시 제주북국민학교에서 기념행사가 끝난 뒤 시위대가 “미 제국주의자 물러가라” “양과자 먹지 말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관덕정에서 서쪽으로 진행했다. 시위대 본진이 빠져나가고 군중이 삼삼오오 흩어지는 과정에서 ‘우연한 행동’이 발생했다. 한 청년이 시위대 현수막을 펼치는 데 썼던 나무 꼬챙이로 옆을 지나던 기마경찰의 말 엉덩이를 찔렀다고 한다. 이에 놀란 말이 앞발을 들어올리면서 여관집 아들(당시 5세 추정)이 넘어졌다는 얘기다.

이후 상황에 대해서는 진상조사보고서 등에 내용이 실렸다. 보고서에 따르면 기마경찰이 어린이가 차인 사실을 몰랐는지 그대로 가려고 하자 시위대가 “저놈 잡아라”라고 외치면서 항의했다. 일부는 돌멩이를 던지면서 경찰서로 달아나는 기마경찰을 쫓아갔는데, 군중이 몰려들자 경찰서를 습격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망루에서 경찰이 발포한 것이다.

경찰 발포에 항의하는 총파업이 3월 10일부터 벌어졌는데 제주도 등 관공서뿐만 아니라 통신기관, 운송업체, 교사, 학생 등 각계각층에서 참여했다.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 육지에서 경찰이 증파되고 우익단체가 제주에 대거 들어오면서 좌익과 우익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결국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제주도인민유격대(무장대)의 봉기로 4·3사건이 본격화했다.

현 씨는 “4·3사건으로 보금자리가 불태워지고, 한라산 광야로 내몰려 추위와 굶주림을 견뎌야 했다. 빗발치는 총탄 세례에도 목숨을 부지했으나 당시 업고 다니던 어린 조카를 잃었다”며 “꼬챙이로 말을 찌르는 일이 없었다면 그 난리를 겪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가끔 한다”고 말했다. 현 씨는 기업은행과 신용보증기금 등에서 근무했고, 천주교 제주교구 평신도회장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등을 지냈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은 4·3사건을 ‘1947년 3월 1일을 시작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 사태와 그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했다. 이 특별법에 따라 정부 심의가 이뤄진 4·3사건 관련 희생자는 사망 1만422명, 행방불명 3631명, 후유장애 196명, 수형인 284명 등이고 유족은 8만452명이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제주4·3사건#도화선#3·1절 발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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