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에서[내가 만난 名문장]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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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원 작가
한정원 작가


내가 보는 것과 내가 말하는 것
내가 말하는 것과 내가 침묵하는 것
내가 침묵하는 것과 내가 꿈꾸는 것
내가 꿈꾸는 것과 내가 잊는 것, 그 사이

- 옥타비오 파스, ‘시’ 전문

세상은 병중이다. 찬란한 계절들을 차례대로 내어주며 기다렸지만, 병은 여전히 물러서지 않으려 한다.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분노하고 더러 우울해 하며 살고 있다. 분명 매일 새로운 날이 주어지고 있는데도, 누리지 못한 채 잃는 것 같아 헛헛하다.

하지만 한편, 돌아갈 수도 마음껏 나아갈 수도 없는 이 시기는 우리에게 ‘사이’에 대해 숙고할 기회를 주고 있다. 늘 이곳에서 저곳으로 서둘러 건너갔던 우리가 도리 없이 정지한 자리가 바로 ‘사이’이기 때문이다. 옥타비오 파스는 시가 머무는 곳이 ‘사이’라고 적었다. 나는 시뿐 아니라 사람과 삶을 이루는 진심과 진실은 대개 그 ‘사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곰곰이 떠올려보자. 당신이 보는 것과 당신이 말하는 것. 본 것을 모두 말하지도, 본 대로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말과 침묵 사이에는 또 얼마나 여러 층위의 마음을 숨겨두는가.

‘사이’는 골짜기 같은 곳이라, 일부러 들여다보거나 애써 마음먹지 않으면 바깥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없다고 믿어버리면 존재하지 않을 비가시적 세계이다. 그 세계는 한쪽만을 편들지 않고, 왼쪽도 오른쪽도 두루 살핀다. 말에 침묵이 스며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침묵에서 말을 읽어낼 줄도 안다. 나의 마음도 당신의 마음도, 우리의 삶도 저들의 삶도, 단호하고 간단하게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우친다. 빛이 어둠을, 어둠이 빛을 간직하듯 말이다. 나의 빛이 당신의 어둠과 혹은 나의 어둠이 당신의 빛과 연결되어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사이’는 깊이와 너그러움을 배우기에 마땅한 장소이자 시간이다.

우리는 ‘사이’에 처해졌다. 그렇다면 ‘사이’에서만 가능할 꿈을 꾸고 실천을 하면 어떨까?

한정원 작가
#세상#계절#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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