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企 주52시간 시행됐지만… 탄력근로 협의할 근로자대표 못 뽑아 혼란[인사이드&인사이트]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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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장 90%가 선출 규정 불분명

박성민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박성민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지난해 12월 국회는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상한을 3개월에서 6개월로 확대하는 내용의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탄력근로제는 일정 기간 내 주당 평균 근로시간이 법정 근로시간(주 52시간)을 넘기지 않으면 주당 근로시간을 늘리거나 줄일 수 있는 제도다. 올해부터 50∼299인 사업장까지 확대되는 주 52시간 근로제의 보완책이다. 에어컨 생산처럼 특정 시기에 일감이 몰리는 사업장이 근로시간을 유연하게 운영할 수 있도록 숨통을 터준 것이다.

탄력근로제를 포함한 유연근무제를 도입하는 사업장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면서 ‘근로자 대표’의 중요성도 커졌다. 근로자 대표는 사측이 탄력근로제를 도입할 때 서면합의 대상으로 근로기준법에 명시돼 있다. 근로시간뿐 아니라 경영상 해고, 유급휴가 대체, 파견근로자 사용, 임금피크제 실시 등 주요 근로조건 변경 시 전체 근로자를 대표해 사측과 협의나 합의할 권한을 지닌다. 근로자 대표가 명시된 노동관계법은 7개, 해당 조항은 36개에 이른다.

문제는 근로자 대표의 선출 방법과 권한 등이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근로기준법상에는 ‘근로자 과반으로 조직된 노조’ ‘노조가 없을 경우 근로자의 과반수를 대표하는 자’로 명시할 뿐 세부 규정이 없다. 이 때문에 사업주가 임의로 근로자 대표를 지정해 사측에 유리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사례도 끊이지 않는다.

지난해 10월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산하 노사관계제도·관행개선위원회는 근로자대표의 선출과 임기, 지위 등을 담은 노사정 합의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현장에 적용되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 노사 간 이견이 큰 쟁점들은 합의문에 담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후 급변하는 근로 형태 및 고용관계에 대처하려면 정부와 국회가 입법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 사업장 90%는 근로자 대표 불명확


지난해 7월 이마트 노동자 1100여 명은 회사를 상대로 600억 원대 체불임금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공휴일에 근무한 직원에게 대체휴일을 부여하고 휴일가산수당을 지급하지 않으려면 근로자 대표와 서면 합의를 해야 하는데 근로자 대표 선출 과정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근로자 과반의 의사로 선출되지 않은 근로자 대표는 권한이 없으니 서면 합의는 무효라는 주장이다.

근로자대표제의 허점을 이용하는 사례는 빈번하게 발생한다. 유통회사에 다니는 권모 씨(31)는 최근 자신의 연차가 거의 소진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회사는 권 씨가 국경일을 포함한 ‘빨간 날’에 쉰 것을 연차를 쓴 것이라고 주장했다. 취업규칙이나 근로계약에도 그런 내용이 없었지만 회사는 근로자 대표와 맺은 공휴일 연차 대체 서면 합의를 근거로 댔다. 알고 보니 사측이 추천한 노사협의회 근로자위원이 이 같은 합의를 한 것이다.

탄력근로제 도입 과정에서도 당사자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2018년 한국노동연구원이 2436개 사업체를 대상으로 진행한 ‘근로제도 실태조사’에서 탄력근로제 도입 사업체의 57.7%는 노사 합의가 생략된 것으로 조사됐다. 12.8%는 근로자 개별 합의, 10.6%는 노사협의회 근로자 위원 합의를 거쳤다. 과반수 노조나 근로자 대표와 합의한 경우는 약 16%에 불과했다.

노조가 없는 영세 사업장일수록 이런 관행은 흔히 발생한다. 지난해 기준 국내 노조 조직률은 12.5%로 전년 대비 0.7%포인트 올랐다. 이는 공공부문 비정규직이 일부 정규직으로 전환됐기 때문이다. 민간부문 노조 조직률은 10%에 불과하다. 사업장 규모별로는 30∼99명 1.7%, 30명 미만은 0.1%에 그쳤다. 소규모 사업장일수록 근로자의 목소리를 대변할 창구가 마땅치 않다는 의미다.

○ 처벌 조항, 상설화… 노사 이견 커

지난해 10월 발표된 경사노위 합의안은 유명무실해진 근로자대표제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노사정이 머리를 맞댄 결과다. 합의안은 과반수 노조가 있는 경우 해당 노조의 근로자 대표 지위를 인정했다. 노사협의회만 있을 땐 근로자가 직접·비밀·무기명 투표로 선출한 근로자위원이 ‘근로자위원 회의’를 구성해 근로자 대표 역할을 하도록 했다. 과반수 노조나 노사협의회가 없으면 직접·비밀·무기명 투표로 대표를 선출한다. 근로자 대표로 활동하는 시간은 근로시간으로 인정하고 사측이 근로자 대표 활동에 불이익을 주지 못하도록 했다.

합의안은 노사정이 근로자 대표의 역할과 권한에 큰 틀의 합의를 이뤘다는 데 큰 의미가 있지만 향후 입법 과정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2019년 12월부터 약 10개월 동안 진행된 위원회 회의록에는 노사의 의견차가 뚜렷이 드러나 있다.

“사용자 개입을 금지하려면 처벌 조항이 있어야 한다” “상설 조직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노동계 위원)

“사용자 처벌, 근로자 대표의 경영 참가 등은 반대한다” “현장에선 또 다른 조직화로 이어질 가능성을 우려한다.”(경영계 위원)

이는 근로자 대표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노사의 해석이 다르기 때문이다. 노동계는 근로자대표제를 직원의 이익을 대변할 사측과의 협상 창구로 여긴다. 자유로운 근로자 대표 활동을 보장할 보완장치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유정엽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정책2본부장은 “사측의 개입이나 방해를 정부가 근로감독하고 과태료 및 행정처분 등 제재 조항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경영계는 근로자 대표를 근로조건 등 변경 시 근로자 의견 청취를 위한 통로 정도로 생각한다. 이준희 한국경영자총협회 노사관계법제팀장은 “근로자대표제는 근로자의 뜻을 관철하는 조직이 아니라 근로자 동의가 필요한 부문에서 작동하는 수동적 제도”라고 강조했다. 당초 상반기로 전망된 법제화 시기도 더 늦춰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합의문에서 명시하지 않은 구체적인 근로자대표 선출 단위, 대상 등도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 직군이나 사업장별로 개별 이슈가 있을 때 전체 근로자 대표가 사측과 합의나 협의를 하는 게 적절하냐는 것이다. 특히 유연근무제는 일을 몰아서 해야 하는 특정 직군에만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가령 탄력근로제를 도입할 때 전체 근로자 대표와 합의하느냐, 해당 직군 근로자 대표를 따로 뽑아 합의하느냐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박소민 노무법인 와이즈 대표노무사는 “경사노위 합의안만으로는 과반수 노조가 아닌 소수 노조나 비노조원의 목소리가 소외될 우려도 있다”며 “근로자 대표의 자격이나 선거권이 부여되는 범주도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를 개별 사업장 자율로 할 경우 또 다른 노노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 고용환경 변화, 노사 합의로 탄력적 대응해야

1997년 도입된 근로자대표제는 명과 암이 있다. 경영상 해고 등 근로자들의 불이익을 막기 위한 견제장치의 성격도 있었지만 근무시간 유연화 등 사용자의 편의를 위해 이용된 측면도 있다.

근로자대표제를 정착시키는 것은 이런 폐해를 막고 근로자의 진짜 대표가 누구인지 명확히 한다는 의미다. 직원 과반수가 가입한 노조가 있다면 비교적 간단한 문제이지만 복수 노조가 있거나 노조가 없는 경우엔 근로자 대표가 누구인지 애매하다. 노조가 없는, 약 90%에 이르는 중소·영세 사업장은 사측이 요구하는 근로조건 변경에 끌려 다니기 일쑤였다.

특히 한국은 근로자 대표가 각 법 조항마다 난립해 있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 대표가 있고, 근로자 참여 및 협력 증진에 관한 법률(근참법)에는 노사협의회와 그에 소속된 근로자위원이 있다.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때 동의 주체가 되는 과반수 노동조합 등도 근로자 대표 역할을 한다. 강성태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근로자 대표의 종류는 많지만 실질적인 대표는 없는 셈”이라며 “법적 지위와 권한이 명확하지 않아 오히려 근로자 이익이 충실히 대변되지 않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궁극적으로는 근로자대표 시스템을 노조와 노사협의회(근로자대표)로 간소화해야 한다는 것이 노동법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독일과 프랑스 등에서 운영하는 종업원대표제가 그 예다.

전문가들은 근로자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기업의 리스크로 생각하는 사용자 측의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고용 및 근로환경이 급변하면서 사업장 노사의 발 빠른 대처가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이승욱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외교 분쟁이나 팬데믹처럼 기업의 외부 리스크가 커질수록 노사의 협력은 더 중요해진다”며 “근로자대표제는 더 이상 근로자의 이익만을 위한 시스템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박성민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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