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유니콘 만들기? 조급증은 버려야할 이유[광화문에서/김유영]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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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영 산업2부 차장
김유영 산업2부 차장
“아, ‘밸류’가 너무 높아, 높아.”

20년 넘게 벤처투자업계에 몸담아온 A 씨는 최근 벤처기업 설명회(IR)에 참석할 때마다 이렇게 중얼거린다. ‘될성부른 기업’ 같아 투자할까 싶다가도 ‘밸류’(valuation), 즉 기업가치가 생각보다 높게 평가돼 투자가 망설여진다는 것. 시중에 돈이 많이 풀리면서 벤처기업에 뭉칫돈이 몰렸고 그만큼 기업 몸값도 높아졌다. 투자자금 회수(exit)를 염두에 두고 투자해야 하지만 기업가치가 높아 지분을 비싸게 사야하고 이 경우 지분을 되팔아 회수할 때 수익이 줄어들 게 뻔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확산에도 불구하고 벤처업계에서는 유례없이 돈이 많이 풀렸다. K유니콘을 육성하겠다며 의욕적으로 정부 예산이 집행된 영향이 크다. 이렇게 풀린 돈이 벤처기업의 성장 버팀목이 되고 있지만, 정작 벤처투자자들은 투자할 곳을 발굴 못해 애를 먹고 있다.

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1000억 원이 넘는 대형 벤처 펀드가 지난해 12월 22일로 50개를 넘어섰다. 2010년까지 단 1개였던 1000억 원 규모의 펀드는 2015년 15개였다가 2020년 들어 급증했다. 2017년 2조3800억 원에 그쳤던 벤처투자액은 2020년 5조 원 돌파가 확실시되고 있다.

이처럼 벤처기업 투자가 늘어난 건 고무적인 일이다. 기업이 투자액을 종잣돈 삼아 혁신을 시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투자액에 비례해서 기업이 실제 성장하지는 않는다.

4000억 원 가까이 투자금액을 유치한 한 기업은 6년째 적자다. 물류망 투자비용이 막대해 손익분기점(BEP)을 넘기려면 갈 길이 멀다. 마찬가지로 2000억 원 넘게 투자받은 또 다른 스타트업은 경력직을 뽑을 때 전 직장의 1.5배로 연봉을 높여주겠다는 파격 대우를 제시하지만 여전히 적자다. 두 기업 모두 투자받은 금액으로 버티고 있다. 한 벤처투자자는 “투자한 기업 현황을 들여다봤더니 기업 대표부터 임원들이 모조리 법인 명의로 된 신형 외제차를 굴리고 있었다”고 토로하기까지 했다.

중소벤처기업부는 ‘K유니콘 프로젝트’를 벌인다며 2021년까지 유니콘 기업을 20개 육성하겠다고 선언했다. 유니콘 기업은 기업가치 10억 달러(약 1조1000억 원)가 넘는 비(非)상장기업을 가리킨다. 글로벌 기업정보업체인 CB인사이트에 유니콘으로 인정받은 국내 기업은 이제 10개 안팎이다. 정량 지표에 매달리다보니 기업 가치 산정이 자의적으로 이뤄질 때도 있다. 스타트업 육성이란 숙제를 떠안은 한 국책은행은 기업 지분 투자에 들어가며 일부러 기업 가치를 높게 산정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A 씨는 2년 차 투자 심사역이었던 2000년대 초반 닷컴 버블이 꺼지면서 벤처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졌던 걸 기억한다. 당시 투자한 기업 중에서 여전히 기업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기업은 극히 일부다. 사실 ‘관제 유니콘’은 탄생하지 않아도 좋다. 오히려 규제 완화 등에 힘써서 실질적으로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줘야 할 때다. 20년 뒤 A 씨가 자신이 투자했던 기업들을 살펴봤을 때에도 내실 있게 기업 경영을 이어가는 기업들이 남아 있었으면 한다.

김유영 산업2부 차장 abc@donga.com
#코로나#벤처투자#벤처기업#스타트업#k유니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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