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 끊어지자 알아서 복원… “이런 똑똑한 실리콘을 봤나”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5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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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치유 기술 어디까지 왔을까

실리콘 절연체에 전기트리가 만들어진 모습(왼쪽 사진). 마이크로캡슐에서 나온 용액이 균열을 메우며 전기트리가 사라지고 있다. KIST 제공
실리콘 절연체에 전기트리가 만들어진 모습(왼쪽 사진). 마이크로캡슐에서 나온 용액이 균열을 메우며 전기트리가 사라지고 있다. KIST 제공
지하 설비 중 긴 송전 케이블 사이사이를 이어주는 중간접속함은 업계에서 다루기 까다로운 장비로 통한다. 고전압을 계속 받다 보니 균열이 일어나면서 누전을 유발할 수 있어서다. 금속으로 외부를 감싸기 때문에 초음파나 엑스레이 투과가 어려워 속을 들여다보기도 쉽지 않다. 급격한 도시화로 전력 케이블이 지하에 매장되면서 접속함의 수도 급증세다. 한국전력이 지난해 안전 점검을 하며 밝힌 국내 지중 접속함은 13만8760개다.

중간접속함 고장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2001년부터 2010년까지 10년간 중간접속함 고장은 총 15차례였는데 2011년에서 2014년 사이 고장 횟수는 총 28회다. 절반도 안 되는 기간 동안 고장 횟수는 약 두 배 늘어난 셈이다.

접속함의 보수가 어렵다 보니 한국전력은 접속함 소재에 ‘자가치유기술’을 도입해 사고 위험 자체를 없애는 아이디어를 냈다. 정용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전북분원 구조용 복합소재연구센터장 연구팀은 최근 대한전선과 KCC, 숭실대, 경기대와 공동으로 수 분 내로 균열을 스스로 치유하는 154kV급 중간접속함 소재를 개발했다.

중간접속함은 고전압의 외부 방전을 막기 위해 전선이 연결되는 곳을 실리콘 절연체로 감싼다. 절연체는 고전압이 계속 가해지는 충격에 전선 주변부터 나무가 가지를 뻗어가는 모양의 ‘전기트리’라는 균열이 일어난다. 균열이 절연체 가장 바깥까지 도달하면 전기가 방전되며 정전 사고를 일으키기도 한다.

연구팀은 실리콘 내부에 자가치유 물질을 넣은 마이크로캡슐을 섞었다. 캡슐 속에는 실리콘을 메울 에폭시 수지 물질과 이를 굳힐 가교제가 들어 있다. 전기트리가 자라나다 캡슐에 닿게 되면 캡슐이 터지고 캡슐 속 물질이 균열을 메운 뒤 수 분 내로 굳어지며 전기트리를 없앤다. 정 센터장은 “전기트리가 실리콘 속 이물질을 향해 자라나는 특성이 있어 캡슐에 유도된다”고 말했다.

네덜란드 델프트공대 연구팀이 개발한 자가치유 콘크리트의 모습이다. 물을 만나면 증식하며 탄산칼슘을 내뿜는 세균을 캡슐에 넣어 균열을 메운다. 바실리스크 제공
네덜란드 델프트공대 연구팀이 개발한 자가치유 콘크리트의 모습이다. 물을 만나면 증식하며 탄산칼슘을 내뿜는 세균을 캡슐에 넣어 균열을 메운다. 바실리스크 제공
이처럼 자가치유 기술은 물체 속에 자가치유가 가능한 소재를 섞어 넣는 방식이 주로 활용된다. 스콧 화이트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항공우주공학과 교수팀이 2001년 플라스틱 속에 균열을 메워주는 액체 화합물이 담긴 마이크로캡슐을 넣는 방식을 처음 개발했다. 이 방식은 캡슐이 일회용이라 같은 부위에 균열이 생기면 치유력이 약해지는 단점이 있다. 이 때문에 물체에 혈관처럼 자가치유 소재를 공급하는 통로를 만들어 치유력을 계속 유지하는 기술도 개발됐다.

자가치유 기술 중 일부는 상용화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네덜란드 델프트공대 연구팀은 2011년 수분을 만나면 번식하는 세균 캡슐을 콘크리트 속에 섞어 넣은 자가치유 기술을 개발하고 ‘바실리스크’란 회사를 세웠다. 바실리스크는 유럽 신화 속 상상의 동물로 쳐다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돌로 만든다. 세균 콘크리트도 콘크리트에 금이 가면 수분에 노출된 세균이 탄산칼슘을 내뿜어 금이 들어간 부분을 메운다. 올해 2월 일본의 한 콘크리트 제조사와 계약을 맺고 일본에서도 제조에 들어갔다. 한국에서도 2016년부터 유통을 시작했다.

자가치유 기술은 수리가 어렵거나 빠른 수리가 필요한 곳에 효과가 크다. 바실리스크의 세균 콘크리트는 1686년 지어진 네덜란드 헷로 궁전을 개축하는 공사에 지난해 11월부터 쓰이고 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2030년까지 우주선과 우주복에 자가치유 기술을 도입하는 목표를 세웠다. NASA 랭글리연구소는 지난해 우주선 외벽 사이에 산소에 반응하는 자가치유 물질을 넣는 기술을 개발했다. 우주 사고로 우주선에 구멍이 나면 우주선 속 산소가 빠져나가는 걸 감지하고 즉시 구멍을 메운다.

최근에는 물질 자체에 자가치유 능력을 부여하는 연구도 활발하다. 분자가 서로 끌어당기는 힘을 활용해 끊어져도 수 분 내로 다시 달라붙도록 하는 방식이다. 한국화학연구원은 감귤에서 추출한 구연산과 숙신산을 합쳐 강력한 수소 결합으로 끊어져도 다시 붙는 고분자를 개발해 지난해 12월 국제학술지 ‘미국화학회 응용 재료 및 계면’에 발표했다. 3㎜ 두께의 고분자 밴드를 칼로 자른 후 단면을 붙여 놓자 1분 만에 추 1㎏을 들 정도로 회복됐다.

시장조사회사 ‘마켓앤드마켓’은 자가치유 소재 시장이 2015년 4980만 달러(약 611억 원)에서 2021년 24억4770만 달러(약 3조 원)로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다만 소재 자체 자가치유 능력은 부드러운 물질에서만 개발되고 있어 현재는 자동차 클리어 코팅처럼 코팅제 등으로만 활용되는 상황이다. 정 센터장은 “부러졌을 때 회복이 어려운 단단한 물질에도 적용하는 게 향후 과제”라고 말했다.

조승한 동아사이언스 기자 shinjsh@donga.com
#실리콘#자가치유 기술#송전 케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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