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1990년대 일본에도 ‘가격파괴’ 열풍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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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엔숍-유니클로 등 ‘저가 실력파 상품’ 아직도 호황

1990년대 초 버블경제가 붕괴한 뒤 일본 열도에는 ‘디스카운트’ 열풍이 불었다.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고 자산과 임금소득이 줄면서 소비자들은 보다 싼 물건을 찾았다. ‘가격 파괴’가 시대의 유행어로 떠올랐다. 당시 신문 지면은 오사카의 담배소매상이 담배 한 보루에 맥주 한 캔을 덤으로 줬더니 평소의 10배 이상 매출을 올렸다거나 신사복 체인점에서 1인당 한 벌 한도로 80∼90% 할인한 2500엔 양복을 판매하자 날개 돋친 듯 팔렸다는 기사들로 넘쳐났다. 슈퍼마켓도 음식점도 술집도 이사업체도, 가능한 한 비용과 수익을 줄여 가격 파괴 붐에 동참했다.

199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소비 트렌드는 다소 달라졌다. 가격이 싸면 지갑을 열던 소비자들이 ‘질’을 찾기 시작했다. 무리해서 자기 뼈를 깎아내기만 하던 기업들은 무너졌고 ‘지속 가능한 저가 상품’만이 살아남는 시대로 돌입했다.

일본 맥도널드는 1998년 7월 당시 130엔이던 햄버거 가격을 65엔으로 내렸다. 망하려 작정했느냐는 질타가 쏟아졌지만 두 달간의 실험 뒤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놀라웠다. 반액으로 내놓은 햄버거가 전년 동기 대비 9.6배 팔렸다. ‘박리다매’ 전략이 먹힌 것. 반값 햄버거는 일종의 미끼상품이기도 했다. 햄버거를 사면 대개 음료수, 감자튀김 등도 함께 주문하니 이윤을 챙길 수 있었다.

가격 파괴를 하고서도 살아남은 기업들은 이 밖에도 적지 않다. 100엔숍, 유니클로, 저가 덮밥업체인 요시노야(吉野屋), 1000엔 미용실 등은 일본의 장기 불황이 낳은 히트 기업들이다. 이들은 고가품의 가치에 뒤지지 않는 저가 상품이라 하여 ‘저가 실력파’ 상품이라 불렸다. 마케팅 전문가들은 원가 압축, 원료나 자재의 국제 조달, 비용 삭감, 낚시 마케팅, 소비자 입장에서의 가격 설정을 저가 실력파 상품의 조건으로 꼽았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가격 파괴에 살아남은 기업들은 여전히 성업 중이다. 맥도널드의 현재 햄버거 가격은 100엔. 다이소의 100엔숍도 여전하다. 1000엔 미용실도 여러 개의 체인점이 있다. 유니클로는 세계로 뻗어나가 저가 의류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아베노믹스 추진 이후 기업 실적, 주가, 고용 등 주요 금융 실물지표가 호전되며 완만한 회복세라고 자평한다. 하지만 일본인의 소비는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가계소득 증가율이 미미한 데다 일본인 특유의 절약지향 소비가 민간소비 회복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생산가능인구가 줄고 고령자가 늘어나는 인구의 구조적 문제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자산이 소비성향이 낮은 고령층에 집중돼 있는 현실도 문제를 악화시키는 요인이다. 2015년 기준 65세 이상 고령자는 전체 인구의 26.8%인데, 일본의 가계 금융자산은 60세 이상 고령자가 68.2%를 가지고 있다. 장기 불황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초고령사회 일본이 빠져나와야 할 또 다른 함정이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디플레이션#가격파괴#100엔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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