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대한민국 정치 응답하라 1984

이재명 기자 , 차길호 기자 , 황형준 기자 입력 2015-12-05 03:00수정 2015-12-05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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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YS, 되살아난 민추협]
민추협 31년
31년 전인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한 김영삼(왼쪽), 김대중 전 대통령. 사진은 이듬해 민추협 사무실에서 열린 광복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두 사람. 동아일보DB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던 때가 있다. 불과 한 세대 전이다. 박찬종 변호사는 1984년 5월 18일 아침 집을 나서면서 부인에게 건넨 한 장의 메모지를 생생히 기억한다. 김수환 추기경실 등 4곳의 연락처를 적었다. “밤 12시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내 소재를 파악해 보라”는 비장한 말도 함께 남겼다. 이날 오전 10시 서울 남산 외교구락부에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발족할 것이라는 메시지가 언론사로 전해졌다.

민추협. 분열과 통합, 다시 분열, 그리고 뒤늦은 통합을 반복하며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 키워드다. 1987년 6월항쟁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의 주역은 단연 민추협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갈라졌고, 역사의 평가는 냉혹했다. 박 변호사는 “1987년 이후 민추협은 하나의 점으로밖에 남지 않았다”며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그들이 다시 뭉쳤다. 김영삼(YS) 전 대통령 서거가 계기였다. 다른 한 축을 이끈 김대중(DJ) 전 대통령도 고인이 됐다.

민추협은 YS의 가신그룹인 상도동계와 DJ의 측근들인 동교동계의 연합체. 전국 민주화 세력을 하나로 뭉치게 한 구심점이었고, 신군부의 철권통치 속에 숨죽여 있던 국민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됐다. 대선을 치르는 2017년이 되면 ‘1987년 체제’가 30년을 맞는다. 민주화의 길을 연 민추협이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할 수 있는 소임을 다했다는 평가가 많지만 YS와 DJ의 후예들은 통합과 화합이라는 시대정신을 통한 새로운 비전 제시를 꿈꾼다. 정치권 일각에선 차기 대선에서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다시 연대할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그들이 30년 전 성취한 개헌을 매개로다.


▼ 민주화 불씨 지핀 그곳, 종로 9층 건물 옥탑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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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추협의 탄생

군부 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1980년대에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모험이었다. 1984년 8월 15일 서울 남산 외교구락부에서 열린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 기념식에서 김영삼 공동의장이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고문으로 위촉됐지만 미국 망명 중이어서 함께하지 못했다. 동아일보DB
1984년 5월 18일 남산 외교구락부에서 김녹영 전 의원이 성명서를 낭독했다. “우리는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우리 국민 모두에게 주어진 절대적 사명임과 민주주의는 오직 국민의 투쟁에 의해서만 이룩될 수 있는 것임을 선언한다.” 민추협 탄생을 세상에 알리는 ‘민주화 투쟁 선언’이었다.

이날은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 4주년이었다. YS가 전두환 정권에 맞서 23일간 목숨을 건 단식을 한 지 1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YS는 단식 이후 민주화 세력이 뭉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비밀리에 접촉하며 YS 단식 1주년에 맞춰 민추협을 띄운 것이다.

당시 DJ는 미국 망명 중이었다. 이 때문에 YS가 공동의장을, 동교동계인 김상현 전 의원이 공동의장 권한대행을 맡았다. DJ는 고문으로 위촉됐다. 양 진영은 철저하게 절반씩 지분을 나눴다. 국장을 상도동계가 맡으면 부국장은 동교동계가 맡는 식이었다.

발족과 함께 민주화의 불꽃이 타올랐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들을 기다린 건 끝없는 핍박이었다. 민추협 간부들에겐 정권의 집요한 협박과 회유가 뒤따랐다. 김상현 권한대행에게는 “형 집행정지를 취소하고 즉각 재수감하겠다”는 위협이 가해졌다.

사무실을 구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무역회사나 동창회 사무실 등으로 위장해도 금세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파악해 건물주를 압박했다. 처음 사무실을 얻은 곳은 서울 종로구 관철동의 한 건물 9층 옥탑방이었다. 이미 민주산악회를 통해 상도동계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상대적으로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던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당시 특위 부위원장)가 임차료의 절반을 냈다고 한다. 하지만 경찰은 사무실 집기조차 가져다 놓지 못하도록 막았다. 결국 한동안 사무실에 돗자리를 깔고 회의를 열어야 했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조직, 민추협

민추협에는 회칙과 정관이 없었다.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상호 합의해 일을 처리한다고만 구두로 약속했다. 김상현 전 의원은 “정관과 회칙이 없는 역사상 최초의 조직일 것”이라고 말했다. 정관과 회칙을 만들면 공안사건으로 엮일 수 있다고 우려한 것이다.

이는 기우가 아니었다. 1985년 1월 민추협을 모태로 신한민주당(신민당)이 창당된다. 당시 정강정책을 두고 전두환 정권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엮으려 했다. 정강정책을 만든 상도동계의 안경률 전 의원과 동교동계의 이협 전 의원은 수시로 공안기관에 불려 다녔다. 이들은 철저히 묵비권을 행사했다고 한다. YS는 이들을 불러 “검찰에서 절대 아무 말도 하지 말라”며 “최악의 경우 내가 불러준 대로 썼다고 해라.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고 말했다고 한다.

민추협은 활동 기록도 거의 없다. 수시로 공안기관이 들이닥쳐 서류를 통째로 가져갔기 때문이다. 박광태 민추협 공동의장(전 광주시장)은 “당시 경찰차에 실려 남한산성이나 서울 외곽 고속도로에 버려지는 일이 숱했다”고 말했다. 모두 연행해 감방에 넣을 수 없으니 도심 멀리 내쫓은 셈이다. 그러면 밤새 걸어 시내로 들어오곤 했다고 한다.

민추협 발족 당시부터 참여한 박찬종 변호사는 인권문제특별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학생들의 무단 연행에 항의하러 경찰서를 방문한 뒤 불쑥 기자실에 들어갔다고 한다. 정권의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기사가 나오리라 기대하진 않았다. 당시 정권이 보도지침을 내려 언론사를 통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 날 동아일보에 기사가 났다. 박 변호사가 민추협 사무실에 들어서자 김상현 전 의원은 “당신 덕분에 민추협이 신문에 났다”며 와락 껴안았다고 한다. 박 변호사는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눈시울이 붉어진다”고 했다.

민주화 불씨를 전국으로 퍼뜨리다

김무성 대표는 당시 민추협 활동을 떠올리며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만 해도 민주화 투쟁이 서울에 머물러 있었다. 민추협은 전국을 누비며 집회를 열었다. 이를 위해 지역에 가면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전국을 다니며 민주화 투쟁의 불을 댕긴 것이다.”

1984년 12월 7일 서울 종로 한일관에서는 역사적 회의가 열렸다. 민추협은 운영위 전체회의를 열어 이듬해 2월 12일 총선 참여를 결의했다. 바로 하루 전 민추협이 큰 힘을 얻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조순형 김정수 김길준 신순범 의원 등 11대 국회 무소속 의원 4명이 민추협 참여를 전격 선언한다. 신군부는 현역 의원의 민추협 가입을 철저하게 막고 있었다. ‘무소속의 집단 참여’는 당시 동아일보 1면에 보도됐다. 이날 늦은 저녁 YS는 이들을 상도동 자택으로 불렀다. YS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다”며 크게 기뻐했다고 조순형 전 의원은 전했다.

1985년 1월 18일 신민당을 창당하고 불과 26일 만에 치러진 2·12총선에서 신민당은 ‘선거혁명’을 이뤄 낸다. 민주정의당(민정당)이 148석을 얻어 다수당이 됐지만 신민당은 67석으로 ‘제1야당’에 올랐다. 당시 다수당이 전국구의 3분의 2를 차지하도록 하는 등 불공정 선거였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약진이었다. 신민당의 선전은 선거를 통해 정권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국민에게 안겼다.

총선이 있기 나흘 전인 2월 8일 DJ가 신군부의 위협에도 2년여간의 미국 망명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귀국 즉시 가택연금 조치가 취해졌지만 2·12총선 직후 가택연금은 해제됐다. 3월 18일 DJ가 YS와 함께 민추협 공동의장에 취임하면서 민주화운동은 새 국면을 맞았다.

신군부를 무너뜨리다


2·12총선 1년 뒤인 1986년 2월 12일 민추협은 ‘1000만 개헌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신군부는 다시 DJ, YS를 포함해 민추협 지도부에 대해 가택연금 조치를 취하지만 이미 민주화의 활시위는 당겨졌다.

신민당 이민우 총재가 민정당이 주장한 내각제를 수용하려 하자 민추협 세력은 탈당해 1987년 4월 13일 통일민주당 창당발기인 대회를 열었다. 바로 이날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직선제 개헌 요구를 묵살하고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그러면서 집요하게 통일민주당 창당을 방해했다. 당시 창당 방해사건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용팔이’ 김용남 씨는 지난달 YS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민추협과 통일민주당, 재야단체, 종교계는 그해 5월 27일 ‘호헌철폐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한다. 민주화 투쟁을 위한 최대의 연합조직이 탄생한 것이다. 이어 6월 10일 ‘고문 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민주헌법 쟁취 국민대회’를 연다. 그해 1월 서울대 학생 박종철 씨는 경찰의 고문을 받다 숨졌다.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이날 집회는 민정당 노태우 총재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날이기도 하다. 전국 22개 도시 514곳에서 수십만 명의 시민이 참여하며 민주화의 바람은 돌풍으로 번졌다.

다음은 권노갑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의 증언이다. 6·10항쟁을 이틀 앞두고 DJ가 권 상임고문 등 3명을 주한 미국대사관에 보내 “10일 대규모 시위를 열 것”이라고 알리도록 했다. 그러자 대사관 측에선 “전두환을 우습게 보지 마라.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고 한다. 이 얘기를 전해들은 DJ는 “미국도 우리를 쉽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반드시 해낼 것”이라고 결의를 다졌다고 한다.


▼ “분열의 정치 그만… 다시 민추협 정신으로” ▼


희망은 다시 좌절로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동교동계와 상도동계가 다시 손을 잡았다. 지난달 30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민추협 송년오찬모임에 참석한 동교동계 김상현 전 민추협 공동의장 권한대행(왼쪽)이 ‘YS의 오른팔’이었던 상도동계 최형우 전 의원의 손을 맞잡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그해 6월 18일 집회엔 150만 명이, 6월 25일 집회엔 180만 명이 참여하는 등 집회 참여 인원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넥타이 부대’가 나서면서다. 결국 노태우 후보는 직선제 개헌과 구속자 석방, 언론·출판의 자유 허용 등을 약속하는 ‘6·29선언’을 한다. 민추협 발족 3년 만에 이룬 기적의 역사였다.

하지만 기대가 컸던 만큼 좌절도 컸다. YS와 DJ는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뒤 갈라섰다. 민추협의 발족 정신은 두 지도자의 야망 앞에서 휴지조각이 됐다. 당시 ‘민주화 투쟁 선언문’의 맨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났다.

‘우리가 마침내 쟁취할 민주주의의 영광은 역사와 국민에게 돌리고, 모든 고난과 희생은 우리의 것으로 하는 헌신을 우리 활동의 기초로 삼고 투쟁한다.’

두 민주화 지도자의 분열은 민주세력 전체의 분열로 이어졌고, 극심한 지역감정을 낳았다. 노태우 정부 탄생의 최대 공로자라는 멍에까지 써야 했다.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당시 분열을 두고 “지금까지 수많은 시행착오와 오늘날 정치적 혼탁, 불안정성의 뿌리를 만들었다”고 혹평했다.

민추협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정치적으로 가장 어두운 시기 횃불을 들고 민주주의를 향한 첫 디딤돌을 놓은’(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의 평가) 민추협은 양김(兩金)의 분열과 극한 갈등 속에서 민주화 운동의 공(功)마저 빛을 잃어 버렸다. 김대중 정부 당시 민주화 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보상을 하면서도 민추협 활동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지난해 민추협 창립 30주년 행사장에선 이런 절규까지 나왔다. “민추협을 위해 헌신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병원 치료라도 받을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해 달라.”

그들이 다시 뭉쳤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동교동계와 상도동계가 다시 손을 잡았다. 지난달 30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민추협 송년오찬모임에 참석한 동교동계 김상현 전 민추협 공동의장 권한대행(왼쪽)이 ‘YS의 오른팔’이었던 상도동계 최형우 전 의원의 손을 맞잡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2009년 8월 DJ 서거에 이어 올해 11월 YS마저 서거하면서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다시 통합과 화합을 시대정신으로 내세웠다. 두 지도자마저 이루지 못한, 그렇기에 그들의 유지로 남은 그 정신을 가신그룹이 계승하겠다는 의미다.

평가는 엇갈린다. 이미 고령인 정치 원로들의 뒤늦은 화해가 과연 현재 정치권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 시각도 적지 않다. 그들에게 아직 소진되지 않은 잠재력이 남아 있느냐는 반문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그들이 정치권의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2017년 대선 역할론이 그것이다. 한 동교동계 인사는 최근 민추협 모임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말까지 했다. “민추협에서 대통령 2명을 배출했다. 다시 한번 민추협 출신 대통령을 만들어보자.”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 등 양대 정당의 내분이 역설적으로 민추협 세력의 연대를 이끌 촉매제라는 관측도 있다. 양당의 비주류인 비박(비박근혜)계와 비노(비노무현)계가 PK(부산 경남) 중심의 상도동계와 호남을 기반으로 한 동교동계와 연대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다.

이석현 국회부의장은 “20대 국회에서 동교동계와 상도동계가 단합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그는 “1987년 당시 직선제 개헌을 이뤘듯 이제 대통령의 권력 분산을 포함해 지방분권과 지역주의 탈피 등 사회 변화를 담아내는 개헌을 양 세력이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1987년 분열이 지금도 상대의 잘못이라고 말할 정도로 양 진영 간 갈등의 골은 깊다. 또 양 진영 모두 정치적 영향력이 예전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쇠퇴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30년 전 통합을 통해 국민에게 희망을 준 민추협이 던진 ‘통합과 화합’의 메시지는 지금 이 시대에 결코 가볍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재명 egija@donga.com·황형준·차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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