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형준

황형준 기자

동아일보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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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입사해 사회부, 경제부, 정치부를 거치며 경찰, 기획재정부, 정당, 법조, 청와대 등을 취재했습니다. 정치와 법, 권력구조 그리고 사람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취재분야

2024-06-22~2024-07-22
정치일반40%
칼럼17%
인물10%
검찰-법원판결10%
사설/칼럼7%
정당7%
경제일반3%
인사일반3%
대통령3%
  • 尹 직무 긍정평가, 4%P 올라 29%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석 달여 만에 30%에 근접했다. 윤 대통령 지지율은 4월 총선 직전 3월 넷째 주 34%에서 총선 패배 직후인 4월 셋째 주 23%로 급락했다가 다시 30%대에 가까워진 것이다. 19일 한국갤럽이 16∼18일 전국 만 18세 이상 유권자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윤 대통령의 직무수행 긍정평가는 29%로 지난주와 비교해 4%포인트 상승했다. 부정평가는 60%로, 직전 조사보다 8%포인트 하락했다. 직무수행 긍정평가의 이유로 응답자는 ‘외교’(31%)를 가장 많이 꼽았다. 윤 대통령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75주년 정상회의 참석차 닷새간 미국을 방문했다가 12일 귀국했고, 체코 정부는 17일 원전 신규 건설사업 우선협상대상자로 한국수력원자력을 선정했다. 정당 지지율은 국민의힘 35%, 더불어민주당 27%, 조국혁신당 8%, 개혁신당 4%, 진보당 1%, 기타 정당 1%로 나타났다. 국민의힘 지지율은 지난주와 같았고, 민주당 지지율은 3%포인트 하락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 2024-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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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尹 지지율, 4%p 상승한 29%…총선 석 달만에 30% 근접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석 달만에 30%에 근접했다. 윤 대통령 지지율은 4월 총선 직전 3월 넷째주 34%에서 총선 패배 직후인 4월 셋째주 23%로 급락했다 처음으로 30%대에 가까워진 것이다. 19일 한국갤럽이 16∼18일 전국 만 18세 이상 유권자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윤 대통령의 직무수행 긍정평가는 29%로 지난주와 비교해 4%포인트 상승했다. 부정평가는 60%로, 직전 조사보다 8%포인트 하락했다. 직무수행 긍정평가의 이유로 응답자는 ‘외교’(31%)를 가장 많이 꼽았다. 윤 대통령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75주년 정상회의 참석차 닷새간 미국을 방문했다가 12일 귀국했고, 체코 정부는 17일 원전 신규 건설사업 우선협상대상자로 한국수력원자력을 선정했다. ‘1호 영업사원’을 자처한 윤 대통령의 세일즈 전력이 먹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정당 지지도는 국민의힘 35%, 더불어민주당 27%, 조국혁신당 8%, 개혁신당 4%, 진보당 1%, 기타 정당 1%로 나타났다. 국민의힘 지지율은 지난주와 같았고, 민주당 지지율은 3%포인트 하락했다.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 2024-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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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만금 이차전지 산단 이끌 인재 양성… 전북에 KAIST-GIST 공동대학원 설립”

    정부가 국가전략기술 중 하나인 이차전지의 석박사급 인력 양성을 위해 전북 지역에 한국과학기술원(KAIST)-광주과학기술원(GIST) 공동대학원을 설립하기로 했다. 이에 더해 탄소 및 수소산업의 역량을 강화하는 등 전북을 첨단 산업의 거점으로 육성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18일 전북 정읍에서 열린 27번째 민생토론회에서 “전북을 대한민국 첨단산업의 교두보로 만들겠다”며 “2029년까지 700억 원을 투입해 전주, 완주, 정읍에 걸친 바이오 융복합 전북 연구개발특구에 바이오 융복합 산업 테스트베드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이차전지 인재난 해소를 위해 전북 지역에 KAIST와 GIST의 공동 대학원을 설립하겠다고 밝혔다. 올해 하반기(7∼12월) 중 부지와 양성 인력 규모 등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하기로 했다. 지난해 전북 새만금 국가산업단지가 이차전지 특화단지로 지정된 만큼 관련 인재들을 육성해내겠다는 것이다. 농업, 식품 등 그린 바이오에 특화된 전북 연구개발특구는 레드 바이오(보건·의료), 화이트 바이오(친환경 에너지)로 범위를 확대할 계획이다. 입주 기업에는 규제, 세제 등에서 적극 혜택을 주겠다는 방침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전북이 탄소·수소 산업의 연구 및 생산 거점이 될 수 있도록 역량 강화에 집중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우선 총사업비 1000억 원 규모의 ‘K-Carbon 플래그십 기술개발 사업’에 착수하기로 했다. 또 완주에는 2026년까지 240억 원을 투입해 ‘수소상용차 신뢰성 검증센터’도 구축하기로 했다. 윤 대통령은 “완주 수소특화 국가산업단지 조성을 적극 추진하고 인프라를 확충해 수소 상용차 혁신 생태계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농림축산식품부도 농촌 재생 활성화를 위한 사업을 패키지로 지원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협약을 맺은 농촌은 삶터와 일터, 쉼터로서의 기능을 위해 필요한 사업을 지원받는다. 전북은 2020년부터 현재까지 임실군, 순창군 등 10개 시군과 농촌협약을 맺었고, 이에 따라 약 5183억 원의 투자가 이루어질 예정이다. 내년에는 정읍시와 완주군, 장수군이 농촌협약을 체결할 계획이다. 이 밖에 농식품부는 전북에 특례지구 조성과 함께 규제 완화 및 세제 특례 등 인센티브를 제공하기로 했다. 윤 대통령은 “식량혁명을 이끌었던 곡창지대 전북에 새로운 역할이 기다리고 있다”며 “전북을 농생명산업 허브로 키우겠다”고 말했다. 최지원 기자 jwchoi@donga.com이호 기자 number2@donga.com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 2024-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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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기부 장관에 유상임 서울대 교수 지명

    윤석열 대통령이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후보자로 유상임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사진)를 지명했다. 정진석 대통령실장은 18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브리핑을 열고 유 후보자와 차관급 인사 3명에 대한 인선을 발표했다. 유 후보자는 서울대 무기재료공학과 출신으로 미국 아이오와주립대에서 재료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미 에너지부(DOE) 에임스연구소 박사 후 연구원 등을 거쳐 1998년부터 서울대 교수로 재직했다. 강원도 영월 출신인 유 후보자는 쌀가게인 ‘대운상회’를 운영한 부모님 슬하에서 4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셋째 아들은 국민의힘 유상범 의원이고 막내 아들은 배우 유오성 씨다. 윤 대통령과 유 후보자의 직접적인 인연은 없지만 친윤(친윤석열)계인 유 의원에 대한 신뢰도 반영됐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유 후보자는 이날 브리핑에서 “인공지능(AI), 양자, 바이오 등 현 정부가 추진해온 주요 주제에서 세계적 주도권을 가져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유 후보자는 최근 지명된 조지호 경찰청장 후보자 등과 함께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임명될 예정이다. 이와 함께 윤 대통령은 북한 외교관 출신인 태영호 전 국민의힘 의원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에 내정했다. 탈북민 출신이 차관급에 임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또 김성섭 대통령중소벤처비서관은 중소벤처기업부 차관으로, 남형기 국무조정실 국정운영실장은 국무조정실 2차장에 내정됐다. 이에 따라 이달 초부터 진행된 ‘중폭’의 순차 개각도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분석이 나온다. 고용노동부 장관과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 신설되는 대통령저출생수석비서관 등 인선은 검증이 끝나는 대로 발표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윤석열 정부 초기부터 자리를 지켜온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과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 이주호 교육부 장관 등은 수해 대응과 의료개혁 등 현안이 남아 있어 당분간 유임될 것으로 보인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 2024-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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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황형준]진영 간 정쟁 수단 된 탄핵… 법에 구체 요건 명시해야

    그야말로 올해 여름 정국은 탄핵으로 뜨겁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달 이재명 전 대표 관련 사건을 수사했던 검사를 포함해 검사 4명의 탄핵소추안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했고, 윤석열 대통령 탄핵 청원 관련 청문회를 추진 중이다. 지난달엔 김홍일 전 방송통신위원장의 탄핵소추안이 발의되자 김 전 위원장은 7개월 전 이동관 전 위원장과 마찬가지로 ‘자진 사퇴’ 카드를 꺼내 맞섰다. 급기야 민주당은 15일 류희림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을 겨냥해 민간인인 방심위원장의 신분을 정무직 공무원으로 바꿔 탄핵할 수 있게 한 법안까지 내놨다. 이 정도면 야당이 ‘탄핵 중독’에 걸렸다는 여당의 야유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야당은 140만여 명이 동의한 국회 국민동의청원을 윤 대통령 탄핵의 근거로 삼고 있다. 청원 내용을 보면 △해병대 박정훈 수사단장에 대한 외압 행사 △대통령 일가의 부정비리 △전쟁 위기 조장 등 5가지가 탄핵 사유로 명시돼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사유는 수사와 재판을 통한 사법적 판단이 필요한 사안이거나 언뜻 보기에도 위헌·위법이라고 판단하기 어려운 현 정부의 정책적 사안이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16일 브리핑에서 “수사나 재판 중인 사건들은 국회법상 청원 대상이 아니다”라며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는 국가 안보를 위한 대통령 결정 사항인데 탄핵 사유에 넣은 것은 문제”라고 밝혔다. 탄핵은 불소추특권이나 신분 보장 등으로 해임이나 파면되기 어려운 고위공직자를 대상으로, 헌법이나 법률에 위반된 구체적인 범죄 행위가 있을 때 실시하는 예외적, 최후의 수단이다. 특히 국민들이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선출한 대통령을 대상으로 할 때는 도저히 대통령을 그 자리에 둘 수 없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야만 탄핵이 인용될 수 있다. 선거법 위반이 사유가 된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과 국정농단이 사유가 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대해 헌법재판소의 심판 결과가 달랐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탄핵 사유와 요건에 대한 구체적인 법 규정이 없다 보니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해 진영 논리에 따라 정쟁의 수단이 되는 측면도 있다. 헌법 65조는 ‘대통령, 국무총리, 국무위원, 법관 등 기타 법률이 정한 공무원이 그 직무 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에는 국회는 탄핵의 소추를 의결할 수 있다’고만 돼 있다. 법원조직법, 검찰청법 등 하위 법률에도 어떤 행위가 헌법과 법률 위반인지 규정하지 않고 있다. 반면 미국 연방헌법(제2조 4항)은 반역죄와 수뢰죄 또는 기타 중대한 범죄와 비행으로 최소한의 탄핵 사유를 적시해 놓았다. 탄핵 제도가 남용되며 소모적인 논란으로 끝나지 않게 하려면 탄핵 사유부터 법에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헌법 개정이 어렵다면 하위법에 구체적인 탄핵 요건을 마련해야 한다. 가령 부정부패나 판사의 재판 거래, 검사의 수사권 남용 등 업의 본질을 흔드는 사유 발생 시를 탄핵 요건으로 명시할 수 있을 것이다. 입법권을 장악한 거대 야당이 먼저 해야 할 일은 성긴 법망을 촘촘하게 짜는 데 있지 아무 데나 그물망을 던지는 데 있지 않다. 칼은 칼집에 있을 때가 가장 위력이 세다는 말처럼 탄핵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면 그 위력은 저감될 수밖에 없다.황형준 정치부 차장 constant25@donga.com}

    • 2024-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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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년 광복 80주년… 역사-비전 담은 기념사업 추진

    정부가 내년 광복 80주년을 앞두고 ‘광복 80년 기념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대통령령 제정안을 16일 국무회의에서 의결했다. 제정안은 국무총리 소속으로 광복 8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설치해 기념사업 종합계획 수립과 관련 행사 계획의 종합·조정 및 지원에 관한 사항 등을 심의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을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과 헌신이 있었는지, 다시 한번 되짚어 볼 때”라며 “모든 국민이 함께 머리를 맞대어 대한민국 광복 80년의 역사와 글로벌 중추국가 비전을 보여줄 기념사업들을 함께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 202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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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尹 “희생-헌신 되짚어 볼때”…광복 80주년 기념사업 추진

    정부가 내년 광복 80주년을 앞두고 ‘광복 80년 기념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대통령령 제정안을 16일 국무회의에서 의결했다. 제정안은 국무총리 소속으로 광복 8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설치해 기념사업 종합계획 수립과 관련 행사계획의 종합·조정 및 관련 행사 지원에 관한 사항 등을 심의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을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과 헌신이 있었는지, 다시 한번 되짚어 볼 때”라며 “모든 국민이 함께 머리를 맞대어, 대한민국 광복 80년의 역사와 글로벌 중추국가 비전을 보여줄 기념사업들을 함께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기미독립선언서’에서 자유의 정신과 세계 평화를 외친 독립운동가들의 꿈은 이제 한 세기를 지나 세계의 자유와 평화, 번영에 기여하고자 하는 대한민국의 꿈이 됐다”고 덧붙였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 2024-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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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르면 내일 부분 개각… 경찰청장 조지호 유력

    윤석열 대통령이 이르면 17일 경찰청장 등 차관급 인사를 발표하며 순차 개각에 재차 나설 것으로 알려졌다. ‘채 상병 특검법’ 처리와 윤 대통령 탄핵 청원 청문회 등을 둘러싸고 여야 갈등이 고조된 가운데 개각을 통해 국정운영의 동력을 마련하겠다는 구상이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15일 대통령실에 따르면 차관급인 경찰청장에는 조지호 서울경찰청장(사진)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경찰청장은 인사청문회를 거쳐 임명되는 자리로 윤희근 현 경찰청장은 8월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다. 신임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에는 박성택 대통령산업정책비서관이, 중소벤처기업부 차관에는 김성섭 대통령중소벤처비서관이 각각 유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용산 비서관’을 부처로 내려보내 후반기 국정 장악력을 높이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장관급은 윤석열 정부 출범 당시부터 자리를 지켜온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과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 등 ‘장수 장관’들이 교체 대상이다. 유상임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 신성철 전 KAIST 총장 등이 거론된다. 노동부 장관 후보에는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등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다만 마땅한 인물을 찾지 못해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윤 대통령과 가까운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경찰 인사와 수해 대응이 맞물리면서 현 단계에선 교체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점쳐진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과 이주호 교육부 장관도 의정 갈등 국면이 일단락될 때까지 자리를 지킬 것으로 보인다. 사회부총리를 겸할 초대 인구전략기획부 장관과 저출생 문제를 전담할 초대 대통령저출생수석비서관으로는 여성을 기용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당초 대통령실은 남성 후보자를 검토했지만 저출생수석에는 여성을 기용해야 한다는 윤 대통령의 뜻에 따라 시간을 두고 재차 검증을 진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인구전략기획부 장관은 정무장관과 함께 정부조직법 개정 이후에나 본격적인 인선이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이상헌 기자 dapaper@donga.com}

    • 2024-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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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북 영동-충남 논산 등 5곳… 호우피해 특별재난지역 선포

    윤석열 대통령이 8∼10일 집중호우 피해가 속출한 충북 영동군과 충남 논산시·서천군, 전북 완주군, 경북 영양군 입암면 등 5곳을 특별재난지역으로 15일 선포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5개 지방자치단체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며 “이번 주 장마전선이 다시 북상하면서 추가적인 피해가 우려되므로 피해 지역에 대해서는 신속하게 응급 복구, 피해조사 등을 실시하고, 다른 지역에서도 사전 대비 태세에 만전을 기할 것”을 관계부처에 지시했다고 대통령실 김수경 대변인이 전했다. 기상청에 따르면 장마전선과 서쪽에서 다가오는 저기압 등의 영향으로 16일부터 중부지방 곳곳에 많은 양의 비가 내릴 전망이다. 16, 17일 예상 강수량은 서울 등 수도권과 강원 지역은 30∼80mm(많은 곳 100mm 이상), 충청권 30∼80mm 등이다. 정부는 다른 지역에 대해서도 이달 말까지 합동 조사를 진행한 뒤 추가로 특별재난지역 선포를 검토할 계획이다.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면 피해 복구비 일부를 국비로 충당할 수 있어 피해 지방자치단체의 재정부담이 줄어든다. 또 세금 납부 유예, 상하수도 요금 감면 등 일반재난지역에 해당되는 18개 지원책 외에 건강보험료 감면, 전기 요금 감면 등 12개 지원이 추가로 이뤄진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박성진 기자 psjin@donga.com}

    • 2024-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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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년 와신상담은 단련의 시간”… 약자 동행 외치는 ‘승부사 오세훈’[황형준의 법정모독]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본격적으로 공부한 지 3년 만에 사법시험을 통과했다. 환경 전문 변호사에서 TV 방송 진행자로, 국회의원으로 변신한 뒤 45세 최연소 서울시장이라는 기록을 달성했다. 30, 40대에 일종의 퀀텀 점프를 한 것이었다. 훤칠한 키에 귀공자 같은, 호감 가는 외모로 특히 여심을 사로잡았다. 출세 가도를 달리며 만인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성공한 인생’이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하 오세훈)의 정치 인생만 놓고 보면 2000년부터 2010년까지 ‘전반전’엔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후반전’이 시작된 2011년부터 2021년까진 좌절이 이어졌다. 겨울은 길었다. 한 번 KO패 해도 타격이 큰 데 세 번의 선거에서 떨어졌다. 서울 종로, 서울 광진을 국회의원 선거와 당 대표 선거에서 잇따라 패배한 것이다. 주변에 이른바 ‘측근’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도 한번쯤은 화투 용어인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는 말을 떠올렸을지 모른다.그래도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남들은 안 될 거라고 했지만 2021년 10년 만에 다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도전해 3선 서울시장이 됐고 이듬해 지방선거에서 4선 서울시장이 됐다.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정치 공백 10년 동안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재도약을 위해 공부했고 반성했고 스스로를 단련했다. 그 10년이 결코 ‘잃어버린 10년’이 아니었다. 자신을 담금질하는 시간이었다. “제 정치적인 운명에 대해서 어떤 확신 같은 게 있는 편이었다. 그래서 선거에 떨어져도 그렇게 큰 데미지를 입지 않았다. 이건 어느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이다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또 공부했네’, ‘나를 다듬는, 나를 단련하는 훈련하는 기간이다’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10년 동안 뭐가 제일 힘들었냐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한 번도 힘들었다고 답변한 적이 없다. 나는 계속 충만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종로 선거에서 떨어지는 날, 광진을에서 떨어지는 날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 취재 메모 중 -그는 지금 연장전을 뛰고 있다. 전반전에서의 득점과 후반전에서의 실점을 넘어 이제 연장전에서 마지막 승부를 기다리고 있다.● “공부해야 가난 이겨낼 수 있다” 교육열 높았던 어머니 오세훈은 1961년 1월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중소건설회사를 다녔고 아버지 월급만으로 부족했기에 어머니는 방석과 베갯잇 등을 만드는 수예점을 하셨다. 아버지 월급이 몇 달씩 지체돼서 며칠 라면이나 싸라기 밥만 먹으며 지낸 적도 있고 이모님 댁에 돈 꾸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잡아준 택시에서 내려 걸어온 적도 있었다. 택시비를 아끼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는 늘 “세훈아, 공부해야 이 가난을 이긴다”고 강조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선생님으로부터 “세훈이가 몸이 약하니 특별히 신경을 쓰시라”는 말을 듣고 1년 내내 된장찌개와 밥을 담은 쟁반을 보따리에 싸서 학교까지 갖다줄 정도로 아들을 챙겼다. 어머니의 교육열 덕분인지 그는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때부터 공부를 잘했고 6년 내내 반장을 놓치지 않았다. 학창 시절 그의 별명은 일본어로 젓가락인 ‘와리바시’, 키가 커서 책상에 엎드려 잘 때 새우처럼 등이 굽어진다는 의미의 ‘잠새우’ 등이었다. 고교 시절 그의 키는 180cm에 55kg으로 마른 체구였다.1979년 한국외대에 입학했다가 2학년 때 고려대 법대에 편입학했다. 이 과정엔 당시 고려대 문과대를 다니고 있던 부인 송현옥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교수의 영향이 컸다. 송 교수의 오빠인 송상호 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가 디스크로 학교를 1년 쉰 뒤 오세훈과 같은 반이 되면서 세 사람은 고2 때 함께 과외를 하게 됐다. 과외는 금방 깨졌지만 두 사람은 고3 때 입시학원에서 다시 만났고 이후 고려대에서 유명 커플이 됐다. 오세훈은 아내가 시장에서 국밥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이 정도라면 이 친구와 결혼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가 고시 공부를 하게 된 계기는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의 회장님은 어머니의 이모부였다. 선대 회장이 돌아가신 뒤 그에게 외오촌 당숙이 되는 그 아들이 회장이 됐는데 대학생 때 집안 어른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듣고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고시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어느 날 집안의 어른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듣던 중 아버님이 회사에서 손아래 동생뻘인 회장님께 깍듯하게 예를 갖추신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할 것 같은 그 말이 당시에는 왜 그렇게도 내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모르겠다. 그때 나는 절대로 샐러리맨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고는 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오세훈, ‘가끔은 변호사도 울고 싶다’, 1995년-그는 고시생 시절에 하루 14시간 앉아 끈기 있게 공부를 했다. 대학원 1년 때 1차 시험을 붙었고 2차 시험은 같은 해 바로 붙었다. 시간 끌면 패스를 못 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1984년 제26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것. 오랫동안 앉아 있던 탓에 엉덩이에 난 종기가 심해져 2시간 넘게 수술을 받기도 했고 지금도 흉터가 남게 됐다. 오세훈은 사법시험에 붙은 직후인 1985년 결혼했다.연수원을 졸업한 뒤 변호사 생활을 하며 환경 분야에 눈을 떴다. 1993년 인천 부평구의 한 아파트 주민들이 일조권 문제로 대기업과 소송을 준비한다고 찾아왔다. 일조권에 대한 판례가 없어 스스로 일본 등 해외 판례를 손수 번역해 재판부에 제출했다. 결국 재판부는 대기업에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고 이 사건은 대한민국 최초로 헌법상 일조권을 환경권으로 인정받은 판례가 됐다. 이 과정에서 환경운동연합(당시 공해추방운동연합)을 알게 됐고 시민상담실장과 법률위원장 겸 상임집행위원을 지내며 환경변호사로 활약했다.“환경운동연합을 갔는데 충격을 받았다. 나는 초임 변호사라도 먹고살 만했는데 환경운동연합의 젊은 활동가들이라는 게 대부분 20대인데, 그때 회사원들이 받는 월급의 한 반이나 3분의 1을 활동비라는 명목으로 받고 사실상 자원봉사를 했다. 그런 시민단체 활동을 보고서 ‘이 사람들이 이렇게 자기 젊은 시절을 희생하면서 열정적으로 하는구나’ 감동을 해서 그 사람들을 돕기 시작한 것이다. 하다 보니 운동가들과 친해지게 되고 열심히 돕다 보니 여러 직책을 맡게 됐다.” - 취재 메모 중 -● TV 프로그램 진행자로 인기 누리다 정치권 진출그는 이후 MBC의 법률상담 프로그램인 ‘오변호사, 배변호사’를 진행하면서 인기를 누렸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등 각종 시사 프로그램의 진행도 맡았다. 정장 등 TV 광고모델이 돼 달라는 요청도 들어왔다. 인지도가 높아지자 정치권에서 ‘콜’을 받았다. 그도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 현실정치에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영입 제안도 받았지만 그는 이회창 총재의 제안을 수용해 한나라당에 입당하며 보수 정치의 길을 선택했다. 기본적으로 국가는 인간의 자율과 동기부여를 중시하는 정책 원리로 운영돼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정의하는 보수는 이렇다. “보수는 ‘물’ 같은 것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 마시는 물 한 잔에 특별한 감흥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보수는 겉보기에 대단한 이념이나 이상이 들어 있지 않은 것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개인의 도전과 국가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 근본이념인 자유와 경쟁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중략) 보수 우파는 역사의 저류임과 동시에 현실이다. 재미없고 지루하지만 실수가 적어 시행착오를 최소화할 수 있고 실용적이다.” - 오세훈, ‘미래’, 2019년 -반면 진보는 톡 쏘는 시원함과 청량감이 있는 ‘사이다’였다. 변화와 혁신을 추구하기에 가슴 뛰고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실수가 잦고 좌절과 오류가 빈번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에 입당한 그는 서울 강남을 지역구에서 당선됐다. 당 부대변인, 청년위원장, 이회창 대선 후보의 비서실 부실장을 맡는 등 당 초선으로서 비중 있는 역할을 했다. 자신의 관심 및 전문 분야인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소장파로 활동하며 불출마 선언… 정치개혁법안인 ‘오세훈법’ 주도국회의원이 됐지만 그는 지독한 마음고생을 했다. 힘없는 정치 초년생에게 수시로 주어지는 역할이 ‘소총수’ 역이기 때문이다. 그는 상대 당 소속 국회 부의장의 날치기 법안 통과를 막기 위해 자택 앞에 동원됐을 때 한없이 부끄러웠다고 한다.중학교 2학년이던 둘째 딸이 선생님으로부터 “정치인은 모두 쓸어서 한강에 처넣어야 할 족속들”이라는 말을 듣고 제 방에 와서 틀어박혀 울었던 일도 있었다. 딸이 아빠를 창피해한다는 게 그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이후 그는 마음을 다시 먹었다.“시인 폴 발레리가 말했던 것처럼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과 절박함이 내게 또 다른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나를 지배하던 가장 큰 생각은, 1인 보스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패거리 정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1인 보스 중심의 정치가 지역주의의 심화를 가져왔다고 생각했다. 또 그 집단을 유지하기 위한 막대한 자금 소요가 정치 부패를 낳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선결과제는 정치자금 시스템의 혁명적 변화라는 확신이 섰다.” - 오세훈, ‘시프트 : 생각의 프레임을 전환하라’, 2009년 중 - 이에 오세훈은 당내 정풍운동에 앞장섰다. 2003년 소장파였던 남경필 원희룡 의원 등이 함께한 ‘미래연대’ 대표를 맡아 ‘5, 6공 세력 용퇴론’을 주장했다. 이후 2004년 1월 그는 부끄러움과 정치개혁 외침에 대한 책임을 거론하며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당 개혁을 외쳐도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는 데 좌절했던 그가 “내가 던져야겠구나”라는 생각에 극약처방을 한 것이었다.“지난 4년을 돌이켜 보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먼저 정치 현실에 정통하지 못하면서 정치를 바꿔보겠다고 덤벼든 무모함이 부끄럽고, 잘못된 길을 가는 모습을 보고도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묵인한 무력함이 부끄럽고, 묵인을 넘어서서 어느 사이 동화되어 간 무감각함이 부끄럽고, 미숙한 자기 확신을 진리인 양 착각한 무지함이 부끄럽고, 세계관이 다르다는 이유로 내심 무시하고 배척한 편협함이 부끄러우며, 그리고 이렇게 부끄러운 자신의 입으로 역사에 공과가 있음을 애써 무시하고 선배들께 감히 용퇴를 요구한 그 용감함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흔들리는 나라를 살리려면 정치를 바로 세워야 하고, 정치를 바꾸려면 다수당인 한나라당이 바뀌어야 하고, 한나라당을 바꾸려면 사람을 바꾸어야 한다는 조급증 때문이었음을 이해하여 주십시오. 누구를 탓하기에 앞서 제 자신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며, 조그마한 기득권이라도 이를 버리는 데에서 정치개혁이 시작된다고 주장했던 대로 이제 실행하려 합니다. 그러한 고민의 산물이 지난번 지구당위원장직 사퇴에 이은 이번 불출마이며, 이것이 정치권의 새로운 변화를 바라는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 2004년 1월 오세훈의 불출마 선언문 중 -‘불출마 승부수’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오세훈의 지지자 2만여 명은 인터넷을 통해 ‘오세훈을 사랑하는 모임’을 결성해 ‘오풍(吳風)을 일으키자’는 캠페인까지 벌이기 시작했다.또 그는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정치자금법소위원장을 맡아 기업의 정치자금 기부 금지, 국회의원 1년 후원금 1억5000만 원(선거가 있는 해는 3억 원) 제한, 지구당 폐지 등 법 개정을 주도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여야가 수백억 원의 대선자금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면서 비난 여론이 거세게 일었던 덕분이다. 그의 정치개혁법안은 그대로 반영이 됐고 나중에 일명 ‘오세훈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국민들에게 그의 이름을 각인시킨 첫 번째 순간이었다. 이후 그는 다시 변호사로 돌아갔다. 같은 해 6월 강원 속초시에서 열린 2004설악국제트라이애슬론대회(철인3종경기)에 출전해 이를 완주하며 강한 체력과 정신력을 과시하기도 했다.휴지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며 다시 정치권으로 돌아온 것이다. 경선 과정에서 그는 홍준표 맹형규 등 후보와 경쟁했지만 압도적인 차이로 승리했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당시 그를 향해 “당이 어려울 때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 혼자 이미지만 가꾸고 다녔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당 후보로 선출된 그의 선거캠프는 과거 선거캠프와 달리 벽(파티션), 돈, 종이컵 등이 없는 3무(無) 캠프로 주목을 받았다. 캠프 부서 간 경계를 허물어 소통하고, 정치개혁을 앞세운 그의 깨끗한 이미지를 위해 선거비용을 줄이고, 환경보호를 위해 종이컵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열린우리당 강금실 후보 등과 붙어 승리했고 최연소 민선 서울시장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 디자인에, 복지에, 환경에 ‘미친’ 시장님오세훈은 시장으로서 신명 나게 일했다. 디자인, 환경, 복지에 미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2010년 세계 디자인 수도에 선정되며 서울을 ‘디자인 중심도시’로 만들며 브랜드를 업그레이드했다. 서울시청 청사 신축을 과감히 추진했고 노점상 등을 설득해 동대문야구장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로 변신시켰다. 반포대교 인근 세빛섬과 반포 분수 등 한강 조경도 바꾸며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 특히 그는 인생의 전환 기회를 주는 것이 진정한 복지라는 생각에서 ‘노숙인 희망의 인문학 코스’를 만들었다. “십 년 전에 인문학 강의로 인생 바뀐 사람이 많다. 얼마 전에 경비원 하시는 분을 만났는데 10년 전에 그 희망의 인문학 코스를 2년을 들었다더라. 그래서 인생이 달라졌다고 했다. 노숙인들이 중요한 건 알코올중독 때문에 안 바뀌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교육을 받음으로써 알코올중독을 벗어날 수 있는 의지가 생긴다.” - 취재 메모 중 -이와 함께 그는 창의행정과 여성이 행복한 도시 프로젝트인 일명 ‘여행(女幸) 프로젝트’를 도입해 ‘UN 공공행정상’을 2회 연속 수상했다. 직접 시민인 척 민원실에 전화를 걸어본 뒤 느낀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다산 120콜센터’로 행정 문의 안내를 통합한 서비스를 정착시켰다. 장기전세주택인 ‘시프트’도 정착시켰다.오세훈의 업무 스타일에 대한 전직 서울시 공무원의 이야기다. “꼼꼼하게 직접 챙기고 매일 아침 회의를 통해서 점검하고 또 문제가 있으면 바로바로 해결하려고 한다. 보고를 하면 바로 피드백을 주고 상황 파악과 업무 장악력, 문제 해결 능력이 뛰어났다. 업무 이해도가 높고 시스템을 장악하고 있으니 공무원들은 늘 노심초사하고 좌불안석이다. ‘무관용’, ‘노 머시(no mercy)’ 스타일이어서 매몰차게 면전에서 단죄하는 스타일” - 취재 메모 중 -2010년 재선에서 성공했지만 2011년 위기가 찾아왔다. 당시 여야는 단계적 무상급식이냐 전면적 무상급식이냐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했는데 오세훈이 주민투표로 이를 결정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해 8월 급기야 오세훈은 정치적 생명을 걸고 투표율이 33.3%에 미달하면 시장직을 사퇴하겠다는 의사까지 공식 발표했다. 돌파를 위한 승부수였지만 결국 자충수로 돌아왔다. 투표율은 25.7%에 그쳤고 그는 결국 시장직에서 물러났다.● 영국·중국 연수, KOICA 자문단 등으로 활동하며 10년 와신상담이때부터 오세훈은 혹독한 후반전에 돌입한다. 시장직을 건 결정은 당 지도부의 동의 없이 진행해 당내에선 보수 진영의 궤멸을 자초했다는 책임론이 제기됐다. 그해 10월 치러진 보궐선거에선 서울시장 자리를 박원순 시장에게 내줬다. 그는 이듬해 5월 영국 킹스칼리지 공공정책대학원 연구원 자격으로 유학길에 올라 복지정책에 대해 공부하고, 중국 상하이(上海)로 넘어가선 어학 공부를 했다. 2012년 12월 대선 직전 귀국했지만 좀처럼 언론에 등장하지 않았다. 일종의 자숙의 시간을 보낸 것이다.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와 법무법인 대륙아주의 고문변호사 등을 지내던 그는 2013년 12월부터 2015년 1월까지 한국국제협력단(KOICA) 중·단기 자문단의 일원으로 중남미 페루에서 6개월,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6개월을 보냈다. 수도승같이 지내던 외로운 시간이었다. 그는 매일 혼자 밥을 해 먹었다. 매일 시청에 출근해 배울 게 있으면 배우고 조언할 게 있으면 조언을 했다. 어머니가 걱정할까 봐 아프리카 등 현지에 있다고 솔직하게 얘기를 못 했다. 나태해지지 않기 위해 골프장은 물론 술집 한 번 가지 않았다. 일기를 쓰며 현지에서 느낀 걸 책으로 출간했다.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르완다에서는 아이들이 맨발로 다니다 거머리에게 물려 결국 발목을 자르는 사례를 보고 신발 보급 활동도 펼쳤다. 오세훈이 사실상 정계에 복귀한 건 2016년 20대 총선이다. 총선을 앞두고 당 지도부로부터 험지 출마 요청을 받았지만 그는 서울 종로 출마를 고집했다. 종로 지역구에서 3선을 했던 박진 현 외교부 장관과 경선 끝에 본선에 진출했지만 민주당 소속 정세균 전 국무총리에게 패배했다. ‘정치 1번지’에서 당선된 뒤 대선 후보로 부상하려는 ‘화려한 복귀’는 실패로 끝났다.이후 2019년 당 대표 선거에서 황교안 전 대표에게 패배했고 2020년 21대 총선에서 서울 광진을에 출마했다가 고민정 의원에게 고배를 마셨다.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할 무렵엔 그의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 캠프 대변인을 시킬 사람조차 없었다고 한다. 광진을 선거에서 떨어지자 ‘재기 불능’에 가까워졌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떠나는 사람들이 하나도 밉거나 섭섭하지 않았고 이해가 됐다고 한다. 그는 2021년 재·보궐 선거 초반 사상 초유의 ‘조건부 불출마’를 선언했다. 안철수 의원이 국민의힘에 입당하면 시장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는데 당시 정치권에선 기이한 행보라는 비판이 나왔다. 무상급식 주민투표 자진 사퇴와 겹치면서 당시 여권 안팎에선 “오세훈도 이제 정치생명 끝난 것 같다”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난관 끝에 그는 이를 돌파했고 당선됐다. 후반전 10년이 그를 가장 서글프게 한 건 달라진 세상의 인심을 보는 것이었다.“2021년 선거에서 4위로 출발했을 때 나는 속으로 당선된다는 확신이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경선에서 나경원 후보를 이기고 나니까 그때는 이제 일할 사람들이 캠프에 찾아오기 시작했다. 안철수 의원과 단일화에 성공하니까 이제 정말 못보던 사람들까지 전부 캠프에 와 가지고 ‘자리를 달라’고 난리 치고 싸우기 시작했다. 그 10년은 굉장히 큰 인생 공부가 됐다.” - 취재 메모 중 -● 서울시장 5선이냐, 대선 도전이냐…오세훈의 길은? 그렇게 오세훈은 10년 만에 다시 서울시장 자리로 돌아왔고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뒤 치러진 2022년 지방선거에서 4선에 성공했다. 그는 ‘약자와의 동행’이라는 시정철학을 통해 안심소득, 안심주택, 서울런(Learn) 등 복지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한강 수상버스 도입, 상암동 하늘공원 대관람차, 서울 고도 제한 완화 등 다양한 정책도 추진 중이다.그는 10년 동안 끊어진 서울시 정책을 보면서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직을 건 것을 많이 후회했다고 한다. 토건(토목건설) 위주 정책을 반대했던 박원순 전 시장 시절 기반시설에 대한 투자가 멈춰 있었고 자신의 재임 시절 추진했던 정책이 중단됐기 때문이었다. 특히 최근 일본 도쿄를 다녀온 뒤 후회를 많이 했다고 한다. 지난 10년 동안 일본은 도쿄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디자인과 기반시설을 준비했고 녹지공간 등 도시계획을 새로 하면서 시민들에게 아름답고 편리하게 공간이 재편된 반면 서울은 멈춰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서울 올림픽 유치를 내세운 이유이기도 하다.“내가 할 말을 잃었다. 이번에 진짜 뼈저리게 내가 지난 10년 동안, 정치를 그만둔 때에도 물론 순간순간 후회하고 반성하고 할 때가 있었지만 이번만큼 내가 절실하게 쇼크를 받은 적이 없어요.” - 취재 메모 중 -자신이 추진했던 정책이 중단된 것을 본 그는 2026년 시장 5선 도전과 2027년 대선 출마에 대해 “지금 마음은 반반”이라고 했다. 자신이 추진하는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시장직을 계속해야 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에서다.대선 주자로서 그는 여전히 조직과 세력이 약하다거나, 이미지 정치를 한다거나 ‘선당후사’가 아닌 선사후당의 정치를 하며 개인플레이를 해왔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기성 정치인답지 않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과거의 오세훈은 이런 비판을 내심 무시하며 ‘일만 잘하면 되지’ 하는 생각이었다. 깨끗한 정치가 그의 슬로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혹한기 10년을 보낸 지금의 오세훈은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이런 비판을 수용하고 민심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각각 성공과 실패의 원인이 됐던 그의 승부사적 기질이 어떻게 발휘될지 지켜볼 일이다. 승부처는 결국 서울시정의 성과물이 될 것이다. 오세훈 시장의 핵심 목표인 ‘약자와의 동행’이 오 시장의 ‘웰빙 변호사’ 이미지와 서민적이지 않은 느낌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고 그에게 돌직구를 던졌습니다. 아마 오 시장 삶의 궤적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고 이를 희석시키기 위해 오히려 동행을 내세우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담긴 비판이지요.그러자 그는 “정치인의 말이나 이미지를 보지 말고 행적과 발자취를 봐달라”며 “10년 전에도 서울형 그물망 복지를 추진했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자신이 서울시장 초재선 시절부터 일관되게 복지에 초점을 맞춘 다양한 정책을 추진해 왔다는 겁니다.오 시장의 책들을 예상보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서울시민인 저 자신도 오 시장이 남긴 성과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를 만나면서 솔직담백하고 지도자로서의 소신과 일관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장전’에선 그의 철학과 진심이 좀 더 많은 이들에게 호소력있게 전달되길, 멋진 승부를 겨룰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올 1월부터 연재하기 시작한 시리즈는 이번 25화로 끝을 맺습니다.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가 이뤄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고민도 있었고, 또 정치가 우리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래서 정치를 혐오의 대상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는 생각과 그래서 각각 정치인들의 매력을 알리고 응원하고 싶었던 필자의 속마음이 담겼습니다. 그동안 애독과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 2023-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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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황형준]검찰수사가 불러온 정치개혁… 정치권은 부끄러워해야

    정치권에선 과거 대선이나 총선 때마다 돈이 대량으로 살포되는 경우가 많았다. ‘눈먼 돈’이 그나마 줄어들기 시작한 건 2003년 대선 자금 수사 이후였다. 당시 검찰 수사에선 2002년 대선 직전 이회창 후보 측에서 ‘차떼기’ 등의 방식으로 823억 원의 불법 선거자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이후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은 ‘차떼기 당’이란 오명을 얻었고 국민들에게 사죄하며 당사를 팔고 천막당사로 옮겨야 했다. 민주당에서도 불법 대선자금 113억 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 측근들이 구속되거나 재판에 넘겨졌다. 이후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정치자금법이 개정돼 기업이 법적으로 정당에 기부할 수 있는 길이 막혔고 후원금은 개인만 낼 수 있게 됐다. 한마디로 검찰이 이끈 정치개혁이었다. 당시 수사팀엔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 이원석 검찰총장 등이 있었다. 2012년에는 한나라당 고승덕 전 의원이 2008년 당시 전당대회에 출마했던 박희태 전 국회의장으로부터 300만 원이 든 돈봉투를 받은 사실을 폭로해 정치권이 발칵 뒤집혔다. 돈봉투를 받은 사람은 고 전 의원뿐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객관적 증거가 부족했다. 돈을 받은 인사들이 스스로 자백할 리도 없는 만큼 어려운 수사였다. 검찰은 박 전 의장과 전당대회 캠프 상황실장으로 돈봉투 전달에 관여한 김효재 전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을 조사한 뒤 재판에 넘겼다. 두 사람 모두 현직에 있어 정권 외압도 적지 않았지만 수사를 관철시킨 것이다. 그 대신 박 전 의장이 고령인 데다 3부 요인이고, 의장직 사퇴 의사를 밝힌 점 등을 고려해 불구속 기소했다. 결국 박 전 의장은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 김 전 수석은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확정받았다. 이듬해 여야는 정당법을 고쳐 전당대회 때 관광버스 비용이나 식사비를 중앙당에서 제공하게 했다. 정치적 현실에 맞게 법을 바꾼 것이다. 당시 여권은 ‘관행’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두 사람을 엄호했고 결국 모두 특별사면을 받았다. 그로부터 11년 만에 다시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이 불거졌다. 유사 사건이 재연된 것은 당시 제도 개선이 미진했거나 방향이 잘못됐다는 얘기다. 어쩌면 ‘솜방망이’ 처벌 때문일 수도 있다. 이번 사건도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2부(부장검사 김영철)가 이정근 전 민주당 사무부총장의 녹음파일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수면 위로 드러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당사자들은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지만 녹음파일에 드러난 내용을 보면 이들의 억울함을 그대로 믿기는 쉽지 않다. 감시가 느슨해지면 위정자들은 경각심을 잃고 일탈하게 마련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온다. 이를 감시할 검찰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다. 지금도 음지에선 진화된 방식으로 불법 자금이 흐르고 있을지 모른다. 자체 개혁을 못 하는 건 정치권이 부끄러워해야 할 대목이다. 여야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정치개혁 방안 마련을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할 것이다. 곪은 상처는 완전히 도려내야 새살이 돋는다.황형준 사회부 차장 constant25@donga.com}

    • 2023-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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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펙은 비인간적이지만… ‘고시3관왕’ 김관영 지사의 대학 시절 별명은 ‘스트립’[황형준의 법정모독]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 학창시절에 꼭 그런 친구가 있다. 노는 것도 잘 놀면서 공부도 잘한다. 경쟁자를 의식해 공부 안 한 척 안심시키고 몰래 공부하는 ‘No 재수’도 아니다. 콩 한 쪽도 나눠 먹지 화장실에서 몰래 초코파이를 까먹는 ‘이등병’도 아니었을 것이다. 반장은 고3 때 1번 맡았지만 오락부장은 늘 맡았다. 누구나에게나 진심으로 대해 주기 때문에 여야를 떠나 적(敵)이 없다. 친화력이 있고 무엇보다 소탈하고 인간적이다. 최연소 공인회계사시험 합격을 포함해 행정고시, 사법시험 등 고시3관왕 스펙(spec)이 비인간적일 뿐….김관영 전북도지사(이하 김관영)는 늘 웃는 상이다. 실패를 겪어도 자신감이 있다. 아무리 수재여도 하나도 통과하기 어려운 고시를 3개나 패스한 경험이 그의 자산인 것이다. 2011년 펴낸 책 ‘저를 만나면 즐거우시죠?’라는 제목도 자신감이 넘친다. 누구든 행복 바이러스로 즐겁게 해줄 자신이 있다는 거 아닌가.● 6남 중 5남…‘리어카에서 태어날 뻔했던 아이’“참말이지, 관영이 너는 리어카에서 나오는 줄 알았어야.” 1969년 전북 군산시 학당군(당시 지명은 옥구군 회현면 학당리)에서 6남 중 5남으로 태어난 김관영은 어머니로부터 이런 말을 자주 들었다. 채소 장사를 하던 어머니가 산통을 느끼고 귀가하던 중 진통이 시작됐다. 버스 정류장 앞 가게 아주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해 리어카에 실려 집에 온 뒤 무사히 자택에서 그를 출산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농사일을 했고 시장에서 소매로 채소 등을 팔았다.김관영도 어릴 때부터 농사일을 거들었다. 오이 심고 농약 주고 가지 심고, 배추 다듬고, 마늘 심고 생강 심고… 일 년 내내 농사는 이어졌다. 아버지는 공부를 하기 싫으면 나랑 같이 농사짓자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어린 마음에도 농사는 너무 힘들고 이문이 별로 남지 않는 일이라 그 말이 무서웠다고 한다. 아들만 6명인 형제들은 용감했다. 싸움을 하건 농사일을 하건 단결 하나는 끝내줬다고 한다. 형들은 동생들이 공부할 수 있게 도와줬고 희생했다. 형제들 사이에서 정치와 사회를 배웠다. 김관영이 천재는 아니었다. 어렸을 때는 형들로부터 “야, 우리 집에 너같이 공부 못한 사람은 없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열심히 해서 240명 중 3등으로 졸업했다. 군산제일고에도 전교 18등 정도로 입학했지만 점점 공부에 재미를 붙였다. 대입 학력고사를 예상보다 잘 못 보았지만 아버지는 재수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큰형의 조언으로 이과에서 문과로 바꿔 성균관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1987년 대학교 1학년 때 열심히 데모에 참석하며 화염병을 던지는 등 ‘열혈청년’으로 지냈다. 6월 민주항쟁으로 6·29선언이 이어지자 큰형은 여름에 “시골 부모님 생각하고 네 자신도 생각하면서 공부를 좀 해라”라며 상업부기 학원 수강증을 끊어줬다. 2학기부터 성균관대 고시반에 들어가 회계사 시험을 준비했다. 그는 경제학 등을 공부하며 재미를 느꼈다. 다음 해 4월 치러진 1차 시험에서 객관식 문제가 굉장히 쉽게 나왔다. 1차 합격자 발표가 6월이고 8월 2차 시험 예정이었는데, 그는 그때까지도 떨어졌다고 생각하고 1차 시험 준비를 다시 하고 있었다. 그런데 덜컥 합격했고 11월 최종합격자 발표에서 230명 중 자신의 이름을 발견했다. 성대 고시반에서 2학년이 합격한 것도 처음인 데다, 학교를 일찍 들어간 김관영은 만 18세 최연소 합격자로 소개됐다. 그는 이 과정에서 “시험장에서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시험 준비할 때 나는 무조건 된다고 생각하고 공부를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비인간적 스펙…김관영의 공부법“공부와 관련된 일반 원칙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집중력’을 높이는 것이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의 차이는 결국 집중력의 차이다.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첫째, ‘동기 부여’가 중요하다. 가난과 역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새로운 도전의 기회로 삼는다는 정신, ‘헝그리 정신’ 같은 것이다. 집중력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실천력을 기르는 것이다. 실천력은 ‘성공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중략) 내가 개발한 나만의 학습법은 ‘나만의 책’ 만들기이다. 요즘은 이런 식의 학습법을 ‘단권화’ 작업, ‘오답 노트’ 만들기라고 하면서 장려하는 것을 보면, 그 효과가 검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관영, ‘저를 만나면 즐거우시죠?’ 중에서 재학 중에 회계사 시험에 합격한 김관영은 지도교수로부터 행정고시를 준비하라는 조언을 받고 다시 행정고시반에 들어갔다. 다시 한번 최연소 합격을 하겠다는 욕심이 있었지만 1차에서 2번 떨어졌다. 3년 9개월 동안 고시반에 있으면서 결국 1992년 10월 합격했다.대학이랑 대학원을 다닐 때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고시 공부를 했다. 교사를 꿈꾸던 아내를 만나서 내조를 받았고 1995년 4월 회계장교로 입대하기 전에 결혼식을 올렸다. 원래 사법시험을 볼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에 배치되고 보니 법안을 만드는 과정이 재밌었다. 마침 군대에서 오후 5시 퇴근 후 저녁시간을 낼 수 있어 법 공부를 시작했다. ‘이렇게 할 바에야 제대로 하자’는 생각이 들어서 아예 고시를 목표로 공부를 시작했다. 두 번의 낙방 끝에 군대 마치기 직전인 1998년 1차 시험에 합격했다. 재정경제부에 복직한 뒤 공부 시간 확보를 위해 정부과천청사 옆에 고시원을 얻어 ‘주경야독’을 했다. 형을 따라 성균관대에 입학한 김관영의 막냇동생이 함께 사법시험 공부를 하며 자료 등 도움을 줬다. 형제는 나란히 1999년 합격해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같은 대학을 나온 형제가 나란히 사법고시 2차에 합격했다. 주인공은 김관영(金寬永·31) 형완(炯完·26) 씨 형제. 특히 형 관영 씨는 88년 공인회계사자격증(CPA), 92년 행정고시 합격에 이어 ‘고시 3관왕’에 올랐다. 그는 현재 재경부 감사담당관실에 근무하고 있다. 전북 옥구군 회현면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김 씨 형제의 부모는 무엇보다 형제애를 강조했다. 이 때문에 이들 형제는 이번 합격이 너무나 기쁘다고 말했다. 이들 형제는 성균관대 동문으로 각각 경영학과와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형제는 이 대학 사법고시 준비반인 ‘양현관’에서 함께 시험 준비를 했다. 동생은 낮에 자료를 정리해 퇴근 후 양현관을 찾은 형에게 줬고 형은 슬럼프에 빠진 동생을 격려했다. 이들 형제는 23일 면접만 남겨놓아 사실상 합격한 상태. 관영 씨는 재경부에서 계속 근무할 예정이며 형완 씨는 판사나 검사를 희망하고 있다.” ―1999년 11월 10일자 동아일보그 스스로 본인이 머리가 좋거나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다고 여긴다. 중학교 시절 IQ 테스트 결과도 113이었다. 대신 그는 남들보다 강한 인내심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는 “내가 마땅히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은 그러니까, 세 개의 합격증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기울였던 나의 ‘열심’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대학 별명은 ‘스트립’…‘가장 김앤장 같지 않은 변호사’로 불려공부도 공부지만 그는 놀기도 잘 놀고 무대 체질이었다. 노래를 잘했고 중학교 소풍 때 장기자랑으로 시골 약장사 촌극을 벌였다. 대학교 1학년 때 엠티 장기자랑에서 4학년 선배의 ‘픽업’으로 스트립쇼를 연출해서 별명이 ‘스트립’으로 불렸다고 했다. 대학원 신입생 환영회 때도 어김없이 장기자랑에 나서 노래를 불렀고 심봉사 연기를 해 박수를 받았다. 중앙공무원교육원 시절엔 자치회 기획부장을 맡아 오락부장 역할을 했고 인기가 많았다.사법연수원에 있는 동안 김앤장법률사무소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당초 공무원으로 돌아갈 계획이었지만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된다는 생각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당시 그는 나중에 뜻 있는 사람들을 모아 나라에서 할 수 없는 사업에 자원을 분배하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같은 자선사업을 생각하고 있었다. 회계사 자격증과 재경부 재직 경험 및 인맥 등은 변호사로서 큰 장점이었다. 인재들이 모인 김앤장에서도 김관영은 잘나갔다. 소탈함과 솔직함, 성실성은 그의 품성이었고 김앤장의 제1원칙인 ‘고객중심주의’에도 잘 부합했다. 그러면서도 겸손한 호감형이었다. ‘가장 김앤장 같지 않은 변호사’라는 별명도 붙었다. 그의 좌우명은 ‘지경을 넓히는 삶’, 즉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이다. 기독교인인 그는 ‘야베스의 기도’라는 기도문을 좋아하는데 여기에 나오는 표현이라고 한다. 이를 위해 그는 정치인이 돼 지금보다 더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김앤장에서 근무한 지 10년 만이었다.● 차세대 리더로 주목…제3당 원내대표 지내고향인 군산에서 출마한 김관영은 2012년 4월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전북 군산에서 당선됐다. 그의 나이 43세였다. 당 기준으로 청년(45세)이었다. 그는 ‘고시 3관왕’이라는 ‘간판’으로 인해 주목을 받았고 당 비상대책위원과 수석대변인, 대표 비서실장 등 요직을 차지했다. 주목받는 초선 의원이자 차세대 리더로 불렸다. 물론 실력이 드러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19대 국회 전반기엔 국토교통위원으로 활동하다 후반기엔 기재부 출신의 장점을 살려 기획재정위원으로 활동했다. 2014년 12월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현 국민의힘)이 추진하던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 표결을 앞두고 반대토론에 나섰다. 중소기업의 가업상속공제 적용 요건을 낮춰 경제 활성화를 꾀하겠다는 게 당시 여당 입장이었다.하지만 김관영은 “대한민국에 전통 있는 명문 가족기업을 육성해서 지속적으로 고용과 성장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정부의 취지에 100% 동의한다”면서도 “그 방법이 기업을 하는 부자들에게 그냥 수백억 원의 세금을 면제해주는 방식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여야가 합의한 사안임에도 김관영의 반대토론 이후 여당 내 기권표가 늘면서 결국 부결됐다. 김한길 국민통합위원장이 민주당에 있던 시절 그를 따라 국민의당으로 옮겼다. 그는 2016년 20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박지원 원내대표 체제에서 원내수석부대표를 맡은 김관영은 20대 국회에서 여야 협상 창구를 맡으며 제3당의 존재감을 보여줬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이 시작되자 탄핵소추위원을 맡았다.당시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가 대선에서 패배한 뒤 유승민 의원이 창당한 바른정당과 합당하면서 바른미래당 소속이 됐다. 김관영은 재선 의원으로선 드물게 바른미래당에서 원내대표에 당선됐다. 2019년 4월 선거제 개편과 공수처 설치법 등의 패스트트랙 지정 논란에 중심에 서기도 했다.바른미래당이 내분으로 당이 깨지면서 2020년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결국 낙선했다. 그 뒤 싱크탱크인 한국공공정책전략연구소(KIPPS·킵스)를 설립해 김성식 채이배 전 의원 등과 함께 여야를 뛰어넘는 공동의 정책 어젠다를 만들었다.2022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에 복당했고 같은 해 6월 지방선거에서 전북도지사에 당선됐다.● MB의 청계천처럼 새만금은 김관영의 브랜드… 친기업 성향 비판도 그는 워커홀릭이다. 김앤장법률사무소에 있으면서 하루 14시간씩 일했고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도 8년 동안 지역구인 전북 군산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 매일 오전 6시에 경기 성남시 분당구 자택에서 출근을 했다고 한다. 도지사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일 자체가 재밌고 일을 즐길 줄 아는 것이다. 본인이 즐거우니 그를 만나는 사람도 즐거울 수밖에 없다.몇 달 전 김관영에게 행정(도지사)과 정치(국회의원) 중 어떤 게 더 재밌냐고 물어봤다.“일단 행정이 더 재밌지, 지금은 도지사인데… 왜냐하면 여기는 이제 내가 얘기를 하면 집행이 되잖아 그 변화가 즉각 있잖아. 그리고 일주일 후에 보고를 하잖아. 내가 강조하는 게 ‘한 번 지시, 세 번 점검’이야. 내가 보고받을 때 ‘이렇게 이렇게 하겠습니다’라는 보고를 받은 뒤부터 내가 세 번 점검하는 것. 하겠다라는 계획에 대한 보고는 누구나 할 수 있고 받을 수 있어. 그러나 점검이 더 중요해.” ―취재 메모 중 김관영에게 새만금 개발사업은 정치의 시작이자 끝이다. 새만금 개발의 성패에 따라 그의 미래도 달렸다. 2013년 새만금청이 설립될 때부터 지역구 의원으로 도레이첨단소재 등 해외 기업 유치에 나섰다. 2013년 이후 9년 동안 새만금 투자 유치 규모가 1조5000억 원에 불과했지만 김관영은 7월 취임 이후 6월 말까지 60개 기업과 투자협약을 체결해 7조1000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발로 뛰고 해외 기업인들을 직접 만나 투자를 설득한 결과다.그는 야당 재선 의원 당시 새만금에 카지노복합리조트 건설을 추진하기 위해 새만금 내국인 카지노 허용 법안을 내기도 했지만 야당과 시민단체 등의 반대가 거세 좌절된 상태다.이런 점 때문에 일각에선 그를 향해 엘리트 출신, 김앤장 출신답게 지나치게 친기업적이라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김관영이 추구하는 건 무엇보다 실용이다. 그는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강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정치적 스승으로 삼고 있다. “대한민국은 이미 이미 정치와 행정이 이끄는 사회가 아니다. 나는 경제인이 이끈다고 봐요. 공직자들의 월급이 어디서 나오냐. 다 세금 걷어야 나온다. 법인세 부가가치세 소득세 등 3개가 국세의 80%인데 이 3개는 철저하게 기업 활동과 관련해서 나온 것이다. 대한민국은 자본주의가 고도화됐기 때문에 결국 기업인들이 대한민국을 이끌어 간다. 그러면 정치인의 롤은 뭐냐. 우리 기업인들이 국제적 글로벌 경쟁에서 뒤지지 않도록, 그 사람들이 너무나 뒤처지지 않도록 빨리빨리 제도 개선을 해서 뒷받침하는 것이 나는 정치와 행정의 역할이라고 본다. 특히 한국은 수출 경제이고 글로벌 경제에서 살아남아야 되기 때문에 글로벌 경제에 뒤지지 않도록 제도를 정치와 행정이 뒷받침해주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 ―취재 메모 중● 여당과 협치의 협치 행보로 주목… 전북 국가예산 9조 원 시대 열여김관영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정치인은 김한길 위원장이다. 김 위원장이 민주당 대표였던 시절 그를 수석대변인과 비서실장 등으로 중용했다. 김관영은 그를 보며 정치를 배웠다. 김 위원장 측이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여러 차례 함께 윤석열 대통령을 돕자는 제안을 했지만 그는 “국민의힘으로 갈 경우 군산을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가능성이 높고 나중에 퇴임하고 나서 지역에 있는 친구들하고 편하게 소주 한잔, 막걸리 한잔 마시기가 어려운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 완곡히 거절했다고 한다.김한길계로 불렸지만 그다음 당 대표였던 문재인 대통령도 그를 아꼈고 마지막까지 국민의당으로의 탈당을 만류했다. 안철수 의원도 그를 좋아해서 ‘초선 원내대표’로 내세우자는 말까지 한 적이 있다. 도지사가 되고 나서도 윤석열 정부, 국민의힘과 협치를 통해 보조를 맞추고 있다. 국민의힘 전북도당 사무처장 출신인 박성태 씨를 3급 정책협력관 직위에 임명했고, 김 지사는 도·정협의회를 전북도-민주당이 아닌 전북도-국민의힘-민주당으로 바꿨다. 여야 협치 결과 김관영은 사상 처음으로 전북도 예산 9조 원 시대를 따내는 성과도 냈다.지난해 12월엔 윤 대통령과 시도지사협의회 임원들하고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2023년 8월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 개최와 관련해 60억 원 특별교부세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더니 윤석열 대통령이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게 “예산을 한 푼도 깎지 말고 다 도와줘라”라고 했다고 한다. 김관영이 잼버리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자 윤 대통령이 “내가 옛날에 보이스카웃을 했다”며 관심을 갖고 호응을 해줬다는 것이다. 예산 지원은 물론 잼버리 조직위원장에도 행안부 장관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포함시켰다고 한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듯이 김관영이 윤 대통령의 신뢰를 받고 환심을 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같은 일이 전해지자 다른 시도지사가 “왜 전북만 챙겨주냐. 우리도 챙겨달라”고 항의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김관영의 정치에는 재미와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는 철학이 깔려 있다. 그 스스로 ‘치어리더’를 자청하는 이유다.“우리 삶에서 원래 힘들고 지루했던 일을 그 자체로 재미있고 즐거운 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진정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정치 지도자라면 그 과정에서 누구보다도 유능한 ‘치어리더’를 자청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중략) 하지만 결국 ‘진심은 통한다’는 것이 나의 인간관계 지론이다. ” ―김관영, ‘저를 만나면 즐거우시죠?’ 중에서2014년 민주당 수석대변인이던 김관영 전북도지사를 처음 만났습니다. 이후 ‘저를 만나면 즐거우시죠?’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뒤 “오늘은 저를 어떻게 즐겁게 해주실 거냐”고 묻곤 했었습니다. 정치는 성적순이 아닙니다. 하지만 공부할 때 체득한 성실함과 열정으로 정치를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게 김 지사의 최대 장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김관영의 ‘즐거운 정치’가 국민들을 좀 더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어주길 기대해봅니다. 54세, ‘도백’으로 성장한 그는 이제 차세대 주자로 꼽힙니다. 주변에서 2027년 대선 도전을 권유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새만금 개발이 그의 정치적 브랜드로 자리 잡을지, 당내 주자들의 역학관계에 따라 결정될 것 같습니다. 다만 낮은 인지도와 당내 세력 부재 등도 그가 넘어야 할 벽입니다. 여지껏 서울시장을 제외하곤 광역단체장 중에 대권을 잡은 인물은 없습니다. 중앙 무대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지방정치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다음 법정모독 [25화]는 7월 13일 공개될 예정입니다. 여권의 유력 정치인에 대해 쓸 예정입니다. 참고로 [25화]를 마지막으로 법정모독 연재를 마칩니다.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 2023-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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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최초 유튜버 겸직 장관…23년째 비상 못하는 ‘완전연소남’ 원희龍[황형준의 법정모독]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강의가 귀에 쏙쏙 들어온다. 뒤늦게 재능을 찾은 것 같았다. 국민들도 그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공부의 신’이라고 해서 꼭 남을 잘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둘 다 갖췄다.전국 수석과 대장동 1타 강사로 국민적 인지도를 얻었던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하 원희룡)의 이야기다. 1982년 대학입시에서 전국 수석과 서울대 법대 수석 입학, 1992년 34회 사법시험 수석 합격이라는 진귀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원희룡은 장관 취임 이후인 지난해 7월 ‘원희룡 TV’에서 유튜브를 다시 시작했다. 그는 정치적 발언은 하지 않는 단서로 국무총리로부터 겸직 허가까지 받았다고 했다. 세계 최초라고 한다. 그는 당시 “여러 장관 중에 대표 주자로 유튜버 겸직 장관으로서 여러분 앞에 섰다”며 “어떤 분들은 또 장관이 매정하게 ‘야 장관이 일이나 똑바로 하지 무슨 유튜버야?’ 그런 분들은 아시죠,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웃으며 말하기도 했다. 늘, 참, 열심이다. 정책 홍보와 국민 소통 등을 이유로 시작한 유튜브의 이 영상은 현재 기준 조회 수 1만7000회에 그쳤다. 다시 시작한 원희룡 TV 구독자 수도 17만8000명에서 약 1년 동안 19만4000명으로 1만6000명밖에 안 늘었다(그는 “간에 기별도 안 간다”고 아쉬워했다).원희룡은 올해로 정치에 입문한 지 23년이다. ‘소장파’로 이름을 날린 그도 이제 어느덧 환갑을 앞두고 있다. 더 이상 ‘차세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장을 지냈고, 당 사무총장과 최고위원 등을 역임했고 제주도지사에 두 번 당선됐다. 하지만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가 되지 못했고, 2007년과 2022년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선거 경선에 출마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꽃이 너무 빨리 핀 것일까. 좀처럼 뜨질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주류이면서도 당내에선 비주류였기 때문인지 모른다. 보수 여당에서 개혁적인 목소리를 내왔고, 제주도 출신으로 영남이 기반인 당에서 활동했다. 정치를 오래했지만 최근 국민들에게 각인된 건 대장동 1타 강사였다. 하지만 일각에선 지금이라도 그냥 1타 강사로 전업해 교육업계로 진출하는 게 어떠냐는 조롱도 들린다. 2020년 총선을 앞두고 ‘마라톤 유세’를 폈던 안철수 의원에게 ‘마라토너로 전업하라’는 비난처럼…물론 원희룡도 마라톤에 심취해 2005년에 ‘나는 서브쓰리를 꿈꾼다’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을 발간하기도 했다.그가 정치를 하는 이유는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서다. 정치적 부침은 있었지만 그의 정치엔 진정성이 느껴진다.“우리 사회에 고통이 있는 한, 누군가는 이 고통을 나누고 덜어내고 치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일을 저의 운명으로 받아들입니다. (중략) 긍정의 정치의 근본 뿌리에는 우리 사회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끌어안는 ‘사랑의 철학’, ‘사랑의 정치’가 있습니다.” -원희룡, ‘사랑의 정치’-● 연수원 동기 “제주도에서 ‘원희룡 아냐’ 물으면 다 알아”그는 1964년 제주도 서귀포에서 2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시장에서 고무신, 농약 등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늘 가난과 함께했다. 중학교 3학년까지는 전깃불도 없었다. 빚 독촉에 시달리는 부모님을 보면서 함께 떨었던 적도 있었다. 부모님이 마지막에 하다 망한 게 책 장사였다고 한다. 그는 어린 나이에 가정의학대백과 사전부터 동화책, 만화책, 심지어 농사에 관한 책까지 다 읽었다. 제주제일고를 졸업한 뒤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전두환 정부 시절 들어간 대학 캠퍼스에선 군사독재에 대한 투쟁이 한창이었다. 그도 바로 사법시험을 보지 않고 학생운동을 함께 했다. 독재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몇 번이나 경찰서에 끌려갔고 철제 의자로 숱하게 맞았다고 한다. 실제 동아일보에 처음 등장하는 원희룡은 가리봉동 5거리 시위와 관련해 경찰 조사를 받고 있는 서울대생의 모습이다. 구로공단에 있는 야학에서 연합을 해서 공동으로 유인물을 뿌리며 가두시위를 벌인 것. “서울남부경찰서는 지난 25일의 九老구 加里峰동5거리 시위와 관련、元喜龍 군(20·공법학과 3년) 등 서울대생 4명을 소환、사건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동아일보 1984년 6월 4일 자 <경찰 시위 주동 大學生 일제 소환> 기사 중-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경인 지역 공장에 위장 취업해 2년 가까이 지하 노동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동구 공산권이 몰락하고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제6공화국이 들어서자 고민이 깊어졌다. 석 달 동안 무전여행을 떠나고 여러 사람을 많이 만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전투적인 사회주의나 민족주의 이념이 아닌 자유주의를 통해 헌법 내에서 우리의 이상을 충분히 담아내고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투쟁적·조직적으로 진지전을 벌이는, 집단주의 이념에서 자유로워져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는 사법시험 준비에 나섰고 1992년 사법시험에 수석 합격했다. 수석 합격 기록이 많던 그는 연수생 사이에서도 유명했다고 한다. 24기 연수원 동기의 전언이다.“연수생들 사이에 리더 같은 존재였다. 연수원 때 우리가 다 모여서 무슨 민사 판결문이 어쨌다, 형사 판결문이 어쨌다, 시험 얘기만 할 때 희룡이 형은 ‘지금 세계정세가 어떻고 아시아가 어떻고’ 이런 굉장히 들을 만한 얘기를 많이 하셨다. 그때도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 등 미래학에 관한 책도 많이 봤다. 그때부터 ‘정말 이 사람은 똑똑하다 그러고 정치할 것 같다’ 그런 평이 많았다. 그때 이제 연수생들이 놀란 게 제주도를 놀러 가서 택시를 타서 ‘혹시 원희룡 아시냐?’ 그러면 다 알 정도로 제주도에서 수재(秀才)로 유명했다.” -취재 메모 중- 최상위권 성적으로 사법연수원을 마친 그는 검사를 지원했다. 판사보다는 현장을 다니며, 백지인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검사직에 더 끌렸기 때문이다. 서울지검(현 서울중앙지검) 2년, 여주지청 1년, 부산지검 6개월 등 3년 6개월간 검사 생활을 했다. 하지만 1998년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국가적 위기에 스스로의 역할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사표를 냈고 변호사로 활동하다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의 권유를 받고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에 입당했다.● 소장파 개혁운동 이끌어… ‘한나라당의 유시민’ 평가도“대한민국 안보와 경제 성장을 이끌어온 게 보수였다. 보수가 변해야 한국이 압도적으로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선진국의 우파나 보수들이 갖고 있는 그 품격과 실력에 대해서 상당히 부러웠다. 그래서 한국도 그렇게 가야 되지 않았나 이렇게 봤고… 386운동권의 상당히 부패하고 자기 합리화적인 오만한 그런 구석들도 많이 봤기 때문에 그들과 동화되기 싫은 측면도 있었다. 그게 20년 뒤에 조국 사태로 피크를 쳤다.” -취재 메모 중- 원희룡은 2000년 16대 총선에서 서울 양천갑에 출마해 국회에 입성했다. 그의 나이 만 36세였다. 그는 당내에서 남경필 정병국 의원 등과 함께 움직이며 소장 개혁파의 대표 선수가 됐다. 그는 이회창 후보가 대선에서 패배한 뒤 2003년 “당내 60세 이상은 물러가라”고 주장하기도 했고 2004년 최병렬 당시 대표 퇴진 카드를 꺼내 드는 등 쇄신에 목소리를 냈다. 2004년 7월부터 2006년까지 최고위원을 지내며 쓴소리를 이어갔다. 국가정보원의 X파일 처리와 감세안, 대북 지원 방안 등 여야가 대치하는 주요 현안마다 당론과 다른 견해를 공개적으로 밝혀 왔고 ‘한나라당의 유시민’이라는 평가까지 받았다. 2006년 1월엔 당의 사학법 장외 투쟁과 관련해 당시 대표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을 향해 “박 대표의 이념적 편견은 병(病)”이라며 비판했다가 당내 반발이 커지자 공개 사과하기도 했다.“저는 그동안 당내에서 별로 인기가 없었습니다. ‘소장 개혁파’로 당내에서 쓴소리를 많이 하니까 한나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별로 없고 오히려 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습니다. 참 당혹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원희룡, ‘사랑의 정치’-당 안팎에서 주목을 받았지만 여당에선 “좌파”라고, 야당에선 “변절자”라는 등 양쪽으로 비판을 받았다. 학생운동권 출신이 보수 정당에 몸을 담는다는 것부터 각오는 했고 내부에서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역할로 ‘포지셔닝’을 하려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힘들었다. 소신대로 하고 불이익은 감당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변화하지 않으려는 집단의 관성은 공고했다. 그가 여당 내 비주류로 주목받지 못하게 된 이유다. 소장파로서 주어진 역할은 딱 거기까지였다. 원희룡은 2007년 대선 경선에서 이명박 박근혜 홍준표 당시 후보와 경선했지만 낙마했다. 2010년 서울시장 경선에서 오세훈 당시 시장에게 밀렸고 2011년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 선언과 함께 19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지만 홍준표 현 대구시장에 밀려 당 대표의 꿈은 좌절됐다. 주변에서 수재라고 대우만 받던 그도 줄줄이 쓴맛을 맛본 것이다.● ‘잃어버린 10년’ 이후 다시 중앙무대로2012년 총선에 불출마한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대 등에서 방문연구원을 지내고 휴지기를 가진 뒤 2014년 제주도지사로 출마해 당선됐다. 2017년 대선에 불출마했고 2018년 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도지사로 7년간 근무하며 원희룡은 차근차근 행정 경험 등을 쌓았다. 2017년 유권자시민행동이 수여하는 ‘대한민국 유권자 대상’을 3년 연속 수상했다. 제주 신항만 건설과 영리병원 등을 추진했다. 하지만 그는 중앙무대에선 조금씩 잊혀져 갔고 소외됐다.반전은 2021년 대선 경선에 출마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원희룡은 그해 10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성남시장 시절 벌어진 대장동 개발사업 특혜 의혹이 불거지자 유튜브를 통해 관련 의혹에 대해 ‘대국민 강의’를 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누리꾼들로부터 ‘대장동 1타 강사’라는 별칭을 얻었다. 윤석열 대통령도 당시 “원 후보의 ‘대장동 게이트 1타 강사’ 동영상을 봤다. 아주 잘 설명하셨다”며 “솔직히 말하면 원 후보의 그런 능력이 부럽기까지 했다”고 공개적으로 칭찬하기도 했다. 2021년 11월 경선 결과 윤 대통령이 대선 후보로 선출되고 원희룡은 4위에 그쳤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그를 선거대책본부 정책본부장으로 임명해 정책을 총괄하도록 했다. 대선 뒤에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기획위원장을 신설해 원희룡에게 위원장을 맡긴 뒤 5년의 핵심 국정 과제를 조율하도록 했다.윤 대통령의 신임을 받은 원희룡은 지난해 4월 윤석열 정부 초대 국토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서울대 법대 3년 선후배 사이지만 학창 시절에는 전혀 친분이 없었다고 한다. 이제 그는 부동산정책, 지역 균형 발전, 화물연대 파업 등 각종 현안의 주무 장관으로서 현장을 누비고 있다.● 학보사 기자였던 한동훈이 ‘연수생 원희룡’ 인터뷰… 기이한 인연 한동안 ‘차세대’로 불렸던 원희룡은 이제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같은 후배들에게 ‘차세대’란 바통을 물려줄 때가 됐다. 서울대 법대 10년 후배인 한 장관과 그의 인연도 기이하다. 원희룡은 대학에서부터 전국 수석 등으로 유명했던 만큼 그가 사법연수원을 다닐 시절 한 장관이 그를 찾아온 적이 있다고 한다. 서울대 법대의 학보사인 ‘법대신문’ 기자로서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찾아온 것. 향후 그를 만난 한 장관이 약 30년 전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며 이를 언급했다고 한다. 원희룡은 한 장관에 대해 “아주 명석하고 상황에 대한 감각도 뛰어나고 저랑도 옛날에 인연이 있는 선후배 관계”라고 평가했다. 원희룡은 이미 윤석열 정부와 운명공동체다. 그의 미래는 윤석열 정부의 성공 여부와 궤를 같이할 수밖에 없다. 그를 두고 국무총리 발탁이나 내년 총선 출마 및 향후 당 대표 도전 등 여러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에 대한 원희룡의 답변이다. “아직 국토부에서 해야 될 임무가 좀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개인의 어떤 미래의 진로를 따로 생각하기보다는 윤석열 정부를 어떻게 뒷받침하고 거기서 우리 대통령께서 가장 좋은 구상을 펼쳐 가실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국민들에게 단체전 평가 점수를 잘 받을 거냐, 여기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야 되는 거고요. 그런 점에서는 한동훈 장관이나 저나 마음이 똑같다. 만약에 총선을 앞두고 윤 대통령이나 당에서 ‘당으로 돌아가라’ ‘총선을 뛰어라’라고 하신다면 나는 가기 싫어요라고 하기는 어렵겠죠.”원희룡 장관은 자칭 ‘완소남’입니다. ‘완전 소중한 남자’가 아니라 ‘완전 연소를 꿈꾸는 남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사랑의 정치’에서 “되돌려주는 삶, 이것이 우리가 인생의 방향을 잡거나 속도를 조절함에 있어 가장 지혜로운 철학”이라며 “되돌려주는 삶은 ‘지금 바로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썼습니다. 자신이 한국으로부터 많이 받은 인생을 산 만큼 자신을 불살라 한국에 바치겠다는 뜻이지요.그는 윤 대통령의 장점에 대해 “결단을 내렸을 때 그 결단을 믿고 밀고 나가는 어떤 결기와 강단, 뚝심이 있다”며 “또 사람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이 많고 사람 관계 속에서의 인간적인 결속력을 굉장히 중시하는 리더십이다. 그러니까 이제 ‘석열이 형’으로 불리고 보스 기질이 있고 친화력이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석열이 형’으로 부른 적은 아직 없다고 하네요.정치인으로서 그의 한계는 낮은 인지도와 세력의 부재입니다. 그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부족한 점을 알고 또 거기에 진정성과 전력을 다하면, 뿌린 만큼 열매를 거둘 것”이라며 “함께할 세력을 만들기 위해서 그 사람들하고 모든 걸 나눠야 되는데, 원희룡이 안 나눠줄 것 같고 자기 혼자 깨끗할 것 같은 이런 느낌 때문에 안 되는 거라면 그건 제가 문제”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내가 안 변했기 때문에 국민들의 인식이 안 변하는 문제일 테니까 제가 변화하면 저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도 변화할 것”이라며 “길이 열릴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그가 20년 전 “당내 60세 이상은 물러가라”고 외쳤던 나이도 이제 내년입니다. 완소남은 과연 뜰 수 있을까요? 그의 진정성이 받아들여질지 그의 미래와 변화가 궁금해집니다.다음 법정모독 [24화]는 야당의 광역단체장으로 넘어갑니다. 자칭 ‘즐거운 희망 전도사’입니다.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 2023-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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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재 타도 외치는 ‘이른바 진보’, 직무유기한 ‘뒤끝 정부’[광화문에서/황형준]

    2008년 5월 필자는 수습기자를 마친 뒤 사회부에 배치돼 경찰을 출입하는 사건팀 기자가 됐다. 정식 기자가 됐다는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비슷한 시기 시작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 현장을 몇 달 동안 취재해야 했다. 시위대는 취임한 지 몇 달 안 된 당시 이명박 대통령을 향해 ‘독재 타도’, ‘명박 퇴진’ 등의 구호를 외쳤다.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선출된 대통령을 부정하고 독재라고 낙인찍는 ‘이른바 진보’ 진영을 보면서 쓴웃음이 나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진짜 독재정권이었다면 이들이 ‘독재’라고 마음대로 외칠 수도 없었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게다가 일부는 폭력 시위로 변질돼 갔다. 사전적 의미에 맞지도 않지만 대안이 없어 그대로 쓰고 있는 표현이 진보 대 보수다. 역사는 15년이 지나 반복되고 있다. 이른바 진보 진영에선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와 관련해 비슷한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광우병 괴담처럼 오염수 괴담과 가짜뉴스도 나오기 시작했다. 야당은 먹거리에 예민한 민심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나섰고, 일부 단체는 거리에서 ‘윤석열 대통령 퇴진’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하지만 이제 ‘독재’라는 주장에 박수를 치는 국민은 거의 없다. 대부분이 과장된 구호로 여길 뿐이다. 이를 두고 민도가 높아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편 지난주 행정안전부는 6·10민주항쟁 기념식에 불참했다. 기념식을 주관하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대통령 퇴진 주장 단체를 후원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업회는 “해당 단체가 협의 없이 정치적 내용을 포함했다. 후원금은 집행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행안부는 요지부동이었다. 6·10민주항쟁이 2007년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뒤 줄곧 행안부가 주최하고 사업회가 주관하던 기념식의 전통이 깨졌다. 주최자인 행안부와 여당 지도부가 불참하면서 행사는 싱겁게 끝났다. 지난해 한덕수 국무총리가 기념사를 하고 이준석 당시 여당 대표가 참석했던 것과 대조적이었다. 행안부의 불참은 과거 정부에서 시민단체에 준 보조금 상당수가 부정 집행됐다며 목소리를 높였던 윤 대통령 및 대통령실의 생각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문제는 행안부의 행사 주관이 관행이 아니라 법 규정 사항이란 것이다. 대통령령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행안부는 ‘6월 민주항쟁을 기념하는 행사를 한다’고 명시돼 있다. 물론 안 지켰을 경우 벌칙 조항은 없다. 하지만 법령에 규정된 업무를 하지 않은 것은 엄연한 직무유기다. 행사 불참을 행안부 혼자 결정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유관 단체의 사소한 실수로 주최자가 행사에 빠진 건 자기부정이다. 일부 보도를 문제 삼아 기자를 공군 1호기에 못 타게 한 것처럼 ‘길들이기’로 비칠 수밖에 없다. “옹졸하다”는 야당의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이른바 진보’와 ‘뒤끝 정부’는 현행 헌법을 탄생시킨 1987년 6·10민주항쟁의 의미와 정신을 진정 존중하고 계승하는 걸까. 그랬다면 괴담을 앞세운 시위도, 민주항쟁 기념식 불참 해프닝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황형준 사회부 차장 constant25@donga.com}

    • 2023-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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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움받을 용기’ 가진 자유인… 활극 뒤 ‘공성불거’ 외치며 퇴장한 양정철[황형준의 법정모독]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은,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고 앞으로다. 통합의 정치로 가야 한다. 답은 연정밖에 없다. 한 10년, 아니 단 5년만이라도 정치적 휴전을 하고 여야가 힘을 합쳐야 한다. 그런 기치하에 협력과 통합의 정치로 가지 않으면 G7 도약은 힘들다. 여야가 연정을 해야 한다. 일시적 협치 실험이라도 좋다. 안에서 화합하고 바깥 경쟁에서 이기려면 그 길밖에 없다.” -취재 메모 중-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이하 양정철)이 2~3년 전부터 줄곧 강조하는 이야기다. 그의 이 같은 통합론과 연정론을 처음 들었을 때 의외였다. 솔직히 그가 가진 이미지는 강성 이미지였고 논쟁적인 이슈의 선봉에 서서 ‘홍위병’으로 불렸으니까. 그 역시 50대에 들어 30, 40대 때와 생각이 조금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그 스스로 일본과 뉴질랜드, 미국 등 세계를 돌아보며 시야가 바뀐 측면이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나도 골수 운동권이었는데 청와대 5년 있으면서 국가 전체를 보는 쪽으로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있었고 또 하나가 지난 3년간 유랑을 다니면서 모든 사고와 시각이 바뀌었어. 지금 내 관심은 다음 대통령이 우리 당이냐, 저 당이냐, 누가 되냐 관심이 없다. 이젠 대통령 당선이 중요한 게 아니라 대한민국 발전을 위해서라도 어떻게 ‘성공하는 대통령’이 되느냐가 훨씬 중요하다.” -취재 메모 중- 독재정권에 맞서 투쟁했던 운동권 출신이라 과거엔 피아 편 가르기를 하고 기득권에 분노하는 마이너적이면서 인권 감수성이 높은 가슴이 뜨거웠던 청년이었는지 모른다. 어찌 보면 그는 노무현 문재인 전 대통령의 곁에서 줄곧 ‘악역’을 도맡아 왔다. 그 탓에 호불호가 엇갈리고 ‘논쟁적’인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세상의 오해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미움받을 용기’를 지닌 것이다. “자네가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것. 그것은 자네가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증거이자 스스로의 방침에 따라 살고 있다는 증표일세.” -기시미 이치로, ‘미움받을 용기’ 중- 결국 그는 문재인 전 대통령을 도와 2017년 문재인 정부의 일등공신이 됐다. 하지만 잊혀질 권리와 공성불거(功成不居·공을 세웠으면 그 자리에 머물지 말라) 원칙, 내 자유도 소중하다며 문재인 정부 내내 공직을 맡지 않았다. ● 등단 꿈꾸던 문학소년에서 운동권 핵심으로 양정철은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나 구로구에 위치한 우신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글이 좋고 책이 좋았던 문학소년은 고교 시절에도 문예서클에서 활동했다.“내가 초등학교 때 직장에서 밀려난 선친은 어렵게 가족 부양하느라 이사를 자주 했다. 자연히 전학이 잦았다. 친구 사귈 기회가 적었고 외로움을 책으로 달랬다. 나중엔 친구보다 책이 좋았고 또래들과 이야기하는 것보다 글 쓰는 게 좋았다.” -양정철, ‘세상을 바꾸는 언어’ 중에서 - 가난은 그의 시선을 사회로 향하게 만들었다. 특히 서클 지도교사였던 동화작가 김진경 선생님으로부터 사상교육을 받았다. 이에 고교생 양정철도 운동권 대학생들이 보는 이른바 ‘불온(?) 서적’들을 그 시절 이미 섭렵했고 사회에 눈을 떴다. (후에 김 선생님은 이를 이유로 해직됐지만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교육문화비서관이 됐고 그와 함께 비서관으로 일하는 기이한 인연을 맺게 됐다.) 등단 작가를 꿈꿨던 그는 국문과에 진학하려 했다. 하지만 형편이 어려웠던 가족의 반대로 한국외대 법대에 진학했다. 그는 전공에 관심이 없었고 학보사에 들어가 기자로 활동하는 데 몰입했다. 3학년 때 편집장을 지냈고 동시에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전대기련) 회장도 맡았다. 그는 점점 운동권 핵심에 속하게 됐다. 1986년 전대기련에서 발행한 기관지가 문제가 돼 지명 수배를 받게 됐고 아예 한국외대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조국통일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학내 시위를 주도했다. 이와 함께 전국단위 대학 투쟁조직인 ‘학생투쟁연합’ 서울지역 부의장을 맡아 1987년 6월 민주항쟁에서 대학가의 반정부 민주화운동 연합시위를 주도했다. 1년 넘게 장기 도피 중에 검거돼 그는 결국 국가보안법 위반과 특수공무집행방해 등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실형을 살았지만 1988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대규모 사면·복권을 단행하면서 수형 4개월 만에 석방됐다. 글을 쓰며 밥벌이를 하고 싶었다. 언론사 기자를 해볼 생각도 있었지만 전과도 있는 데다 언론민주화 운동에 대한 믿음이 있어 전국언론노조연맹에서 언론노보 기자로 일을 시작했다. 중앙 일간지에서 이직 제안도 받았지만 ‘언론노조를 지켜야 된다’는 사명감에 6년간 일했다. 그러다 결혼을 하면서 대기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현실적 이유였다. 나산, 한보, 신원그룹과 스카이라이프 등 4곳을 거쳐 차장에서 임원으로까지 승진했다. 하지만 마음은 헛헛했다. “젊은 나이에 ‘운동’하다가 갑자기 기업-기업주 대변하는 일은 마음고생이 컸다. 언론계에 있는 선배들에게 부끄럽기도 했다.” -양정철, ‘세상을 바꾸는 언어’ 중에서- 결국 2002년 노무현 후보 대선캠프에 합류했고 인수위를 거쳐 5년 내내 노 전 대통령을 모셨다.● 30대 최연소 청와대 비서관으로 정치 무대 등장언론인에서 대기업 임직원으로, 청와대 비서관으로 변신한 양정철은 정치 무대의 전면에 섰다. 39세로 최연소 비서관으로 고속 승진했다. 국내언론비서관과 홍보기획비서관을 맡아 정부의 신문방송 정책을 총괄했다. 쉬운 자리는 아니었다. 그는 혈기가 왕성했고 언론계에선 언론노보 기자 출신인 그를 쉽사리 인정해주지도 않았다.노 전 대통령은 언론에 대한 불신이 뿌리 깊었다. “기자실에 몇몇 기자들이 죽치고 앉아 보도 자료를 가공하고 담합한다”며 추진한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은 그 정점이었다. 언론에 민감했던 노 전 대통령이었던 탓에 양정철에겐 악역이 맡겨졌다. 홍보기획비서관 시절 동아일보 등 언론의 신행정수도 이전 관련 보도에 대해 “저주의 굿판을 걷어치워라”고 막말을 했다. 2005년 8월에는 노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을 거부한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해 “박 대표의 반응은 책임감, 결단, 역사의식, 깊은 성찰, 일관성 등 5가지가 없는 5무(無)”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해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2007년엔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을 수립해 기자실 통폐합을 실행해 전 언론으로부터 ‘언론 탄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사실 그는 선진화 방안에 대해 신중한 입장이었다고 한다. 이를 추진하려면 임기 초에 추진했어야 하고 언론계 내부의 공감과 설득 없이는 실효성도 없을 것이라는 취지로 대통령에게 여러 차례 얘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이 뜻을 굽히지 않자 주무 비서관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전면에 나섰다는 게 주변 인사들의 전언이다.● 盧 지키지 못한 회한에… 文 앞세운 정권 교체에 주력노무현 정부 말기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야”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쓸쓸한 퇴장이었다. 양정철도 참모로서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 아닌가 싶은 죄책감이 들었고 퇴임 후 봉하마을로 내려간 노 전 대통령이 외로워 보였을 것이다.퇴임 후 어느 날 노 전 대통령이 양정철을 불렀다. 정치에 나서보겠다고 했지만 노 전 대통령은 뜻밖에도 이를 말리셨다.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민주주의적 진보를 이루려면 국민들 생각과 의식을 바꾸고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정치를 하지 말고 좋은 책을 내자고 제안하셨다.양정철은 두말없이 짐을 싸서 봉하마을로 내려갔다. 그러나 이후 검찰 수사를 받던 노 전 대통령은 2009년 5월 23일 부엉이바위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노무현을 지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분이 모진 결심을 놓고 번뇌하던 오랜 시간, 그의 고독을 가늠조차 못 했다는 죄책감에 양정철은 괴로웠다. 그 죄책감을 이겨내고 노 전 대통령을 재평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정권교체였다.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입니다.” -2002년 11월 노무현 당시 대선 후보가 부산에서 문 전 대통령을 소개하며- 노 전 대통령이 이같이 평가했던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비서실장, 문재인 전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만든다는 게 그의 과업이 됐다.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문 전 대통령을 설득했고 2011년 ‘문재인의 운명’ 출간을 도왔다. 2012년 4월 총선에서 문 전 대통령은 부산 사상에 출마해 당선됐지만 양정철은 서울 중랑을에 출사표를 던졌다가 경선에서 박홍근 의원에게 밀려 탈락했다. 문 전 대통령은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가 됐지만 그해 12월 치러진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패배했다.● 문재인 정부의 일등공신이었지만 대선 뒤 홀연히 떠나 대선 이후 문 전 대통령을 비롯한 친문(친문재인) 진영은 대선 패배 책임론에 시달렸다. 양정철도 그 대상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호철 전 민정수석비서관과 전해철 의원 등과 함께 ‘3철’로 불리면서 ‘비선’이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문 전 대통령이 2015년 2·8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됐지만 야당은 내홍을 겪으며 혼란이 빚어졌다. 김한길 안철수 전 공동대표 등 비문 진영에선 ‘친노(친노무현) 패권주의’로 몰아세웠고 끊임없이 당을 흔들어댔다는 게 친문 진영의 시각이었다. 그해 4·29재·보궐선거에서 참패하면서 대표 책임론은 더욱 심해졌다. 당시 한 최고위원이 전했던 이야기다.“재·보선 참패 이후 어느 날 비공개 최고위원회에서 ‘양정철이 도대체 어떤 ××냐.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는데 뒤에서 다 결정한다고 하냐. 차라리 비서실장이든 부실장이든 공식적인 직위를 주든지 해라’라고 호통을 쳤다. 그랬더니 문 대표는 얼굴이 벌게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 -취재 메모 중- 거듭된 쇄신 요구에 양정철도 2015년 12월 이호철 전 민정수석, 윤건영 민형배 김영배 현 의원 등과 함께 20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거듭된 희생 요구이자 문 전 대통령이 평소 강조해온 육참골단(肉斬骨斷·자신의 살을 베어 내주고, 상대의 뼈를 끊는다는 뜻)이었다. 2016년 결국 안철수 의원이 국민의당을 창당하면서 문 전 대통령은 당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민주당은 김종인 전 대표를 내세워 총선을 치렀다. 그해 6월 문 전 대통령이 히말라야 트레킹을 떠났을 때 양정철은 탁현민 전 대통령의전비서관과 함께 동행했다. 문 전 대표의 대선 예비캠프 성격인 ‘광흥창팀’을 주도하며 대선 준비는 물론이고 정권 교체 이후 밑그림도 그렸다. 2020년 4월 그가 했던 이야기다. “정치 경력이 짧았던 문 대통령에게 핵심 측근이랄 수 있는 사람은 나랑 이호철 전 수석 등 단 네 명이었고 그 네 명이 목숨 걸고 대통령 만들기에 올인했다. 심지어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임기 첫날부터 일정도 미리 준비해 둘 정도로 다양한 준비를 했다.” -취재 메모 중-양정철은 대선 승리 직후인 2017년 5월 “저의 퇴장을 끝으로, ‘패권’이니 ‘친문’ ‘친노’ 프레임이니 ‘삼철’이니 하는 낡은 언어도 거둬 주시기 바란다”며 “멀리서 그분을 응원하는 여러 시민 중 한 사람으로 그저 조용히 지낼 것”이라며 “잊혀질 권리를 허락해달라”고 밝혔다. 그 뒤 뉴질랜드로 출국해 일본, 미국 등 유랑에 나섰다.● 당 외곽에서 ‘장막 뒤 조언자’ 역할 이어가 그는 7개월 뒤 ‘세상을 바꾸는 언어’ 책을 내면서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그를 중용한 노무현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진 마음의 빚은 정권교체로 일부 갚게 된 것이다.“그분이 서거 며칠 전 내게 건넨 마지막 말은 ‘양비는 먹고살 방도는 있는가?’였다. 죽음을 결심한 분이 일체 내색하지 않으시고 마지막 순간까지 참모들 걱정을 한 것이다. 이 책은 ‘깨어 있는 시민으로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려 발버둥치고 있다’는, 그분을 향한 나의 안부 인사이기도 하다. 노 대통령이 부디 그곳에서 편하셨으면 좋겠다.” -양정철, ‘세상을 바꾸는 언어’ 중에서-주진우 전 기자는 이 책 추천사에서 “양정철은 자기를 낮춘다. 주위를 비춘다.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안 했다고 한다. 그래서 짠하다. 그리고 찡하다”고 썼다.그러다 2019년 5월 이해찬 당시 대표의 강력한 부탁을 받고 민주연구원장으로 전격 복귀했다. 그는 “민주연구원이 총선 승리의 병참기지 역할을 하도록 하겠다”는 첫 일성을 냈고, 백원우 전 의원과 함께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공천에서 물갈이 의지를 드러냈다. 인재 영입을 맡았고 위성정당 논란이 일자 총선 승리를 위해 비례연합정당 참여가 불가피하다며 연합정당 참여를 밀어붙였다. 그 결과 민주당은 2020년 21대 총선에서 180석 압승을 거뒀다. 물론 그 이후 열린우리당의 악몽처럼 입법 독주 등을 거듭하다가 2년 뒤 정권을 다시 빼앗기게 됐지만 당시로선 전례없는 성과를 낸 것이었다. 총선 직후 그는 관용과 통합을 외치며 연구원장직을 던지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문재인 정부의 마지막 비서실장 등으로도 거론됐지만 그는 결국 약속대로 공직을 맡지 않았다. 2021년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객원 선임연구원을 지내는 등 자유인으로 살았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민주당과 청와대 인사들과 접촉하며 조언과 쓴소리를 했다. 2021년 6월 6일 필자가 했던 인터뷰다. ▶양정철 “與 절박함 없어…정권 재창출 비관적 요소 더 많아”대선을 앞두고 있던 2021년 11월에는 당내 초선 의원 특강에서 이같이 조언했다.“스타일리스트형 정치인은 제발 안 되셨으면 하는 간곡한 부탁을 드린다. 하찮은 패션 따위로, 튀는 표현이나 말장난, 돌출 행동 등으로, 그저 뜰 수만 있다면 SNS 통해 뭐든 하려는 분들을 많이 본다. 여야의 그런 모습이 정치를 희화화시키고 냉소와 조롱을 유발한다. 각자가 정치적 정책적 신념은 확고히 가져 주시되 행동에서는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원칙을 지켜 주셨으면 좋겠다. (중략) 저는 ‘스러짐의 미학’을 아는 사람이 좋은 정치인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즉, 국민과 공공을 위한 헌신과 희생 후 어느 때 스스로 소멸되어 가는 것이 아름다운지 정확히 아는 것이 좋은 정치라 생각한다.” -취재 메모 중-● 소문의 남자… “엇갈리는 평가는 자업자득” 지적도야권 일각에선 그가 결과적으로 윤석열 정부의 공신 역할을 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양정철은 2016년 총선을 앞두고 윤석열 대통령 영입을 위해 처음 만나면서 윤 대통령과 적지 않은 친분을 쌓았다. 서울중앙지검장 발탁이나 검찰총장 임명,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수사로 어려움을 겪을 때도 당시 여권에 윤 대통령을 감싸는 등 엄호에 나섰던 것으로 전해졌다. 문재인 정부의 킹 메이커였지만 그도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의힘 소속으로 대선에 출마할 것이라고 예상하진 못했던 것이다. 소문이 무성하고 논쟁적인 인물, 양정철에 대한 한 정치권 인사의 평가다. “양정철은 실제로 킹 메이커 역할을 하고 대통령을 만든 사람이다. 그만큼 실제 기획력도 인정한다. 다만 그 과정이 투명한 게 아니라 대부분 음모적이어서 항상 장막 뒤에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음흉한 이미지가 생긴 거다. 그리고 본인이 또 그걸 즐긴 것 아니냐? 뒤에서 자기가 조종하고 자기의 힘을 은근히 과시하고 다닌 거다. 그러니까 엇갈리는 평가는 자업자득이지 뭐….”정부 탄생의 일등공신이면 어느 자리라도 맡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은 사실상 무보수 명예직인 싱크탱크 수장만 맡았고 끝까지 원칙을 지켰습니다. 여러 사람으로부터 여러 차례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자리는 한사코 고사하고 은둔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공개석상이나 언론에 등장하지 않을 계획이라는 게 양 전 원장 지인들의 전언입니다. 얼마 전 사석에서 공직은 아니더라도 교수로 후배들에게 가르침을 주거나 다른 적합한 일은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양비는 먹고살 방도는 있는가?’라는 노 전 대통령의 말처럼 생계는 유지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과거 대기업 다니며 모은 돈 등으로 생활하면 족하다고 했습니다.“배 째드리지요.” 그가 한 것으로 알려진 이 말에 대해서도 다시 확인해봤습니다. 2006년 8월 유진룡 당시 문화관광부 차관이 인사 청탁을 들어주지 않자 대통령홍보기획비서관이었던 그가 청와대 행정관을 통해 이 같은 말을 했다고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기사를 찾아보니 양 전 원장은 줄곧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해왔지만 그의 해명은 저조차도 알지 못한 채 그의 강성 이미지만 덧씌우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당시 사정을 정확히 알고 있는 노무현 정부 청와대 출신 인사들에 따르면 그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양정철이 그런 말을 했다더라고 누가 들었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다’가 전부인 ‘카더라’였다”며 “당시 소송을 해서라도 진위를 가렸어야 했는데 당시 민정수석실 만류로 적극 대응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라고 억울해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그가 2018년 펴낸 ‘세상을 바꾸는 언어’ 책에는 평등, 공존, 배려 등의 개념으로 우리 의식을 좌우하는 언어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말과 글의 힘을 아는 그이기에 오해는 오해였나 보다 생각이 듭니다. 필요에 따라 거친 언어를 쓰며 악역을 맡았지만 알고 보면 부드럽고 문재(文才)가 뛰어난 사람입니다. 장막 뒤에서라도 통합과 협치를 위한 정치권을 만들어가는 데 기여해주길 바랍니다.다음 법정모독 [23화]는 여당의 ‘일타강사’ 장관님입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 2023-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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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로운 정치 꿈꾸던 ‘기획자’ 김한길… 중도실용 ‘ONE WAY’[황형준의 법정모독]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김한길 국민통합위원장(이하 김한길)은 여의도에서 ‘전략기획통’으로 불린 대표적인 ‘브레인’이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선거 기획을 맡았고 DJ정부 청와대 정책기획수석비서관, 노무현 전 대통령 인수위 기획특보, 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 의원 시절 전략기획위원장, 총선기획단장 등 그의 이력엔 유독 ‘기획(企劃)’이 많다. 2000년과 2004년 두 번이나 총선기획단장을 맡은 것은 거의 전례가 없다. 선거 ‘판’을 짜고 ‘킹메이커’ 역할을 잘하는, 여의도식 표현으로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2016년 20년 가까이 몸담았던 민주당을 떠난 뒤 국민의당을 거쳐 윤석열 대통령을 도와 현재 장관급 국민통합위원장을 지내고 있다. 애연가였던 그는 2018년 폐암으로 사경을 헤맸지만 신약을 통해 기적적으로 완치됐고, 다시 정치의 중심에 뛰어들었다. 야당 지지자들은 그가 탈당했을 때마다 그를 향해 간혹 ‘창당 전문가’라거나 ‘정당 브레이커(breaker)’라는 등의 비난을 해왔다. 민주당에 있을 때부터 중도 노선으로 ‘우클릭’한다는 공격도 받았다. 하지만 그가 실천해온 정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티면서 희망을 탐색하는 직업’이요, DJ의 금언인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조화시키는 중도실용의 정치였을 것이다. DJ가 영입했지만 그는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과 같은 DJ맨도 아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를 아꼈지만 친노(친노무현)계와 특히 각을 세우며 ‘계파 패권주의’를 외친, 어쩌면 정치권의 외로운 이방인이었다. ● 金에게 ‘제갈공명’급으로 평가한 김중권 전 비서실장베스트셀러 작가였던 김한길은 1996년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DJ에 의해 영입돼 새정치국민회의 비례대표 후보로 당선되며 정치인으로 변신한다. 총선 선대위 대변인을 거쳐 총재특보, 1997년 대선에서 TV 토론회 등을 맡아 DJ의 승리를 이끌었고 대통령직인수위원이자 당선자 공보팀장, 대변인 등으로 활약했다. 1999년 3월 대통령정책기획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되면서 비례대표 의원직을 사퇴했다. 정책기획수석으로서 각종 정책 조율과 행사 기획, 국정홍보 등을 맡았다. 소설가이자 방송인 경험을 활용해 DJ의 메시지 및 홍보전략 등을 맡았던 것이다. 2000년 총선을 앞둔 1999년 11월 총선 출마자들이 청와대를 나가자 DJ는 “실장도 나가고, 정무수석도 그만두는데 김한길 수석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 김 수석은 여기 남아 계속 나를 도와주어야 한다”며 김한길의 총선 출마를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DJ가 마음을 바꾸면서 그에게 “총선기획단장을 맡아라”는 임무를 주며 2000년 새천년민주당 비례대표 후보로 총선에 내보냈고 그는 다시 국회로 돌아왔다. 당 총재를 겸하던 DJ가 그에게 비례대표 의원직을 두 번이나 준 것이다. DJ는 그해 9월엔 박지원 당시 장관의 후임으로 그를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지명해 김한길은 1년간 내각 경험을 쌓았다. 2001년 10월 비례대표 의원직을 버리고 서울 구로을 재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DJ 정부의 김중권 전 대통령비서실장은 함께 호흡을 맞췄던 김한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역사가들은 중국 역사상 뛰어난 참모의 전형으로 제갈공명을 거론하면서 그를 ‘식치(識治)의 양재(良才)’라고 평했다. 어려운 시기에 대통령을 지근 거리에서 보좌하면서 그의 진면목을 직접 체험한 사람의 입장에서 평하자면, 김 수석은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식치의 양재’라는 평가가 결코 과분하지 않은 사람이다.” - ‘김한길의 희망정치’ 추천사에서 -김한길은 DJ에 대해 자주 언급하지 않았지만 “아버지 같은 분”이라며 “내가 평가하기에 너무나 큰 거인”이라고 했다. ● “김한길 아니었으면 내 당선도 없었다”고 했던 盧 김한길은 향후 비노(비노무현)계의 좌장, 수장으로 불렸지만 친노, 친문(친문재인)의 계파주의를 경계했을 뿐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사감’은 없었다. 2002년 9월 대선 지지율이 하락했던 노 전 대통령은 김한길을 찾아와 도와달라고 했다. 선대위 미디어특별본부장을 맡기면서 사실상 전권을 줬다고 한다. 그는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 협상에선 노 후보 측 협상단 대표로 나서 정 후보 측과 단일화 협상을 타결하기도 했다. 대선 직후에는 당선자 기획특보를 맡았다.노 전 대통령은 그를 아꼈다는 일화도 많다. 대선 승리 뒤 소장파 의원들과 부부동반으로 63빌딩에서 자체 축하연을 하고 있는데 바로 옆방에 노 전 대통령이 다른 사람들과 식사 중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잠깐 그 자리에 들러 김한길 부부를 앞으로 나오라고 한 뒤 “김한길 본부장 아니었으면 내 당선도 어려웠을 것이다”고 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의원들의 입장에선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후 김한길은 다른 의원들로부터 은근한 견제를 받았다고 한다.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이 추진되자 그도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에 합류했고 2004년 17대 총선 서울 구로을 지역구에서 당선됐다. 3선 의원으로서 당시 국회 건설교통위원장을 지냈고 2006년엔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88 대 49의 역대급 표 차이로 당선됐다. 하지만 2006년 6월 치러진 4회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16개 광역단체 중 전북 1곳에서만 이기고 당시 한나라당이 광역자치단체 12곳을 차지하는 등 참패하고 2007년 대선 패배 위기감이 돌자 당내 신당 논의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같은 해 11월 당시 원내대표였던 김한길은 국회 교섭단체대표연설에서 “열린우리당의 창당은 우리 정치사에 크게 기록될 만한 의미 있는 정치실험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치실험을 마감하고 지켜가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려내서 또 한 번 ‘다시 시작하는 아침’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그는 탈당하기 전날 청와대에 가서 노 전 대통령을 만났다. 그는 “당시 박상천 대표의 ‘꼬마 민주당’과 힘을 합쳐야 된다”고 주장했지만 노 전 대통령은 “지역주의 극복을 외친 내가 어떻게 지역당과 합치냐”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열린우리당을 나오기 전날 만난 노 전 대통령은 내 옆에서 가슴을 치면서 ‘우리가 이렇게 헤어지더라도 내가 김 대표에게 진 마음의 빚은 여기에 담아두고 잊지 않겠습니다’고 말씀하시더라. 그 때문인지 노 전 대통령이 탈당한 다른 의원들에 대해선 실명을 거론하며 비난했지만 나에 대해서는 끝까지 욕을 안 했다. 그 마음의 빚이라는 게 이런 건가 나중에 생각했다.” - 취재 메모 중 - 결국 김한길은 열린우리당을 탈당해 2007년 통합신당모임을 이끌며 중도개혁통합신당을 창당했고 열린우리당 창당 당시 분당됐던 민주당과 통합 등 합종연횡 과정을 거쳐 11월 대통합민주신당으로의 통합을 완성시키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2007년 12월 대선은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의 참패로 끝났다. 김한길은 “대선 참패 후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지적이 매우 아프다. 나를 버려 우리가 사는 데 도움이 된다면 나부터 기득권을 버려야겠기에 18대 총선 불출마를 결심했다”며 불출마를 선언했다. 당시 서울에서 구로을을 포함한 4곳만 민주당 승리가 예상됐는데 당선될 수 있는 사람이 책임을 져야 된다는 생각이었다. ● 4선 의원으로 복귀하자마자 전당대회 출마4년간 야인으로 지냈지만 공백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4년 뒤 김한길은 선거를 한 달여 앞두고 서울 광진갑에 전략공천을 받아 당선됐다. 한명숙 당시 대표의 출마 권유를 여러 차례 사양했지만 공천 마감일이 끝난 뒤에도 출마 요구가 거듭되자 이를 거절하지 못한 것이다. 대선을 8개월 앞둔 시기였다. 김한길은 총선 직후 당선자 신분이 된 2012년 4월부터 존재감을 보였다. 그는 “총선 패배의 중요한 원인이 계파 공천”이라며 쓴소리를 시작했고 당시 ‘이해찬 당 대표-박지원 원내대표’로 지도부를 꾸리자는 이른바 ‘이-박 담합’ 논란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는 곧장 주변 의원들의 독려를 받아 6·9 전당대회에 당 대표 후보로 나섰다. 이해찬 전 대표가 24.3%(6만7658표)를 얻어 김한길(23.8%·6만6187표)을 0.5%포인트(1471표) 차로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충남과 부산을 제외한 지역 대의원 투표에서 김한길이 앞서 있었지만 모바일 투표에서 결과가 뒤집어졌다. 모바일 선거인단 불법 모집 의혹이 불거졌지만 그는 승복을 선언했다. 몇 년 뒤 그가 했던 이야기다. “2012년 당 대표 경선에서는 모바일 투표에서 뒤집히면서 내가 지고 이해찬이 당선되지 않았나. 나를 따르던 의원들은 전부 다 불복 선언하라고 난리를 쳤다. 그런데 그때가 대선 6개월 남았을 때다. 내가 불복하면 당이 엉망이 되고 대선에서 이길 가능성이 없어질 거 같았다. 그래서 이해찬 대표에게 다음 날 ‘결과를 수용하겠다. 대신 이번 지방 경선에서 나타난 당원들 표심을 잊지 말아 달라’고 했고 이 대표도 ‘알겠다’고 했다.” - 취재 메모 중 -이후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문재인 전 대통령과 안철수 후보 측이 단일화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안 후보 측이 당 혁신을 요구해 11월 이해찬 당시 대표가 사퇴했다. 대선에서도 패배하면서 이듬해 치러진 5·4 전당대회에서 김한길이 당 대표로 선출됐다. ● 야당 대표 시절, 정권교체 위해 안철수 신당과 통합 결단제1야당 대표가 된 김한길은 그해 8월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의혹 등에 대한 대통령의 사과 등을 요구하며 45일간 서울광장 천막당사에서 노숙 농성을 벌이며 박근혜 정부와 각을 세웠다. 국회를 식물 상태로 마비시켰다는 비판도 받았지만 야당의 존재감을 보여줬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었다. 다음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그의 일화다. “처음 만난 게 ‘박근혜 수필가’였다. 내가 MBC 토크쇼 진행할 때였는데 여러 차례 출연 제의가 들어왔다. 클로징 멘트에서 ‘우리는 동갑인데 같은 세월을 살았지만 서로가 너무 다른 세월을 살았다. 박근혜 씨가 어머니를 대신해 청와대에서 안주인 노릇을 하는 동안 나는 긴급조치로 감옥에 갇힌 아버지를 면회 다니면서 세월을 까먹은 사람이다. 이렇게 다른 우리가 한 시간 동안이나 사이좋게 얘기한 것은 아마 좋은 일일 겁니다’ 뭐 이런 멘트였는데 이거를 빼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나가긴 나갔더라. (중략) 대통령이 돼서도 회동하면 편하게 얘기했다. 박 대통령도 격식을 안 따지더라. 항상 준비 많이 해서 수첩에 빼곡히 써온다. 중간에 내가 말을 끊고 하면 다시 볼펜으로 짚어가면서 써온 것을 읽더라. 내가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시절에 박 대통령이 여당 대표였다. 생일날 꽃을 사 들고 찾아갔더니 기자들이 많이 와 있는데 기자들에게 그가 ‘우리가 동갑인데 난 머리에 물감을 안 들였다’고 내 백발을 가리키며 얘기해 한바탕 웃었다. 재밌는 구석이 있다.” - 취재 메모 중 -김한길은 2014년 3월 창당을 추진하던 안철수 의원 측과 합당을 선언해 새정치민주연합을 출범시켰다. 중도층을 흡수하고 야권 통합을 이뤄내야 정권교체와 대선 승리가 가능하다는 평소 소신을 발휘한 것이다. 북한인권법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켰고, 북한의 무력도발을 비판하는 등 튼튼한 안보를 강조하며 중도 노선을 강화했다. 그 탓에 당내 친문 진영 등 전통적인 지지층으로부터 ‘우클릭’을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비판을 감수하며 “진영 논리와 막말과 이전투구로 국민을 불안하고 걱정하게 만들었던 정치와 결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합당한 뒤 안철수 의원과 함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를 맡았던 그는 7·30 재·보궐선거에서 패배하자 다음 날 즉각 당 대표직에서 사퇴했다. 이후 비대위 체제를 이어가던 당은 2015년 2·8 전당대회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이 대표로 선출되며 친문-비문 진영 간 갈등이 극심해졌다. 이 무렵부터 김한길도 제3지대 신당 창당과 ‘창조적 파괴’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2015년 1월 그가 했던 이야기다.“우리 정치가 전반적으로 양당 중심 체제에서 적대적 공생 관계에 안주하고 있다는 지적을 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지적을 극복하기 위한 진지한 모색이 있어야 된다. 중요한 문제예요. 지금은 이념과 지역과 세대 간의 일종의 분열을 기반으로 기득권을 누리고 있다고 볼 수 있거든요. 과감하게 그 기득권을 벗어버린다는 각오가 있어야 우리 정치에 새로운 장이 열리지 않겠는가. 적대적 공생이 아닌 경쟁적 상생 관계가 되어야 국민으로부터 박수를 받고 국민이 정치에 희망을 가지지 않겠나.” - 취재 메모 중 -이후 김한길은 친문 진영의 패권정치에 절망하다가 안철수 의원과 함께 국민의당을 창당했다. 2016년 총선을 앞두고 당시 야권의 압도적 승리를 위해 민주당과 수도권에서의 야권연대를 강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자 책임 정치 차원에서 불출마를 선언했다. 당시 국민의당은 38석을 얻어 약진했다. 연대를 거부한 안 의원이 옳았다는 시각도 있지만 만약 김한길의 주장대로 야권연대가 성사됐다면 (국민의당이) 더 큰 성과를 거뒀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섣부른 불출마 김한길… DJ 후광 못 챙긴 김홍걸…결과적으로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치러진 2017년 5·9대선에서 문 전 대통령이 당선됐다. 정치권의 제갈공명으로 불렸던 그의 판단도 결과적으론 어긋난 셈이다. ● 2013년 국정원 댓글 수사팀장이던 尹과 묘한 인연… 킹메이커 된 金국민의당의 대선 주자였던 안철수 의원은 대선에서 패배했고 바른미래당과 합당하며 결국 사라졌다. 안 의원이 다시 국민의당을 창당했지만 그마저도 2022년 국민의힘과 통합됐다.이 무렵 김한길은 정치무대에 거의 나서지 않으며 휴지기를 가졌다. 폐암 선고를 받은 뒤 방사선 치료 등을 받고 2018년 12월 3주가량 의식을 잃을 정도로 사경을 헤맸다. 다행히 신약이 몸에 잘 맞아 사실상 완치됐다. 자연스럽게 정계를 은퇴한 것으로 보였지만 세상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유력 야권 대선주자로 급부상하면서 그를 찾아왔고 그는 결과적으로 킹메이커로 다시 성공한다. 어찌 보면 윤 대통령이 지금 자리에 있는 것도 김한길과 무관치 않다. 당시 김한길은 의원총회에서 2013년 국정원 댓글 수사팀장이었던 윤 대통령에 대해 “윤석열 검사와 같이 정의로운 검사를 야당 국회의원들이 보호하지 못하면 안 된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이에 야당 법사위원들이 윤 대통령을 국감 증인으로 신청했다. 이어 법사위에 나온 윤 대통령은 외압을 폭로하며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면서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날 김한길도 법사위 회의실을 찾아 구석에서 ‘검사 윤석열’을 멀리서 처음 봤다고 한다. 김한길은 윤 대통령에 대한 마음의 빚도 있었다. 장외투쟁을 하던 김한길이 박 전 대통령과 영수회담에서 윤석열 검사 등 댓글수사팀의 신분 보호를 요구했는데 이듬해 1월 인사에서 좌천됐기 때문이다. 자신의 요구가 오히려 윤 대통령을 좌천되게 한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김한길은 2014년 7·30 재보선 당시 대구고검으로 좌천됐던 윤 대통령에게 출마 의사를 타진하기도 했다. 2019년 5월 서울중앙지검장 시절 윤 대통령이 했던 이야기다. “김한길 전 민주당 대표가 2014년에 누구 통해서 재보선 나오라고 하길래 ‘정치 안 합니다’고 했어. 2016년에도 민주당, 국민의당에서도 전화가 오더라고. 근데 내 적성도 아니고 국정원 사건 재판 진행 중인데 정치판 간다는 게 말이 안 돼서 기분 안 나쁘게 거절했어. 재판 진행 중인데 성향이 야당 쪽이라 기소한 거 아니냐는 말 나올 수 있으니까 당에 부담될 거라고 말했어.” - 취재 메모 중 - 이후 종종 만남을 이어오던 두 사람은 검찰총장직에서 사퇴한 윤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대선 출마를 결심하면서 정치적 멘토와 멘티 관계로 발전했고 김한길은 또 한 번 킹메이커로 불렸다. ● 尹과 자주 독대하며 현안 논의“행정부와 입법부 관계라고 볼 때 이 여당과 청와대 역시 견제와 균형이 원칙인 것이죠. 우리 정치가 크게 잘못된 거 하나가 청와대가 여의도를 우습게 여긴다는 거죠. 청와대와 여당과의 관계는 굉장히 어려운 관계거든요. 청와대가 여의도, 국회를 업신여겨서는 안 되고요. 특히 여당과의 관계가 여당이 청와대의 졸이 아니잖아요. 문제가 크지요. (중략) 왜 정치의 중심이 국회여야 하냐. 어쨌든 국회의원들은 민심에 민감하니까 이렇게 막무가내 할 수 없거든요.” - 취재 메모 중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5년 1월 김한길이 필자에게 했던 이야기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윤석열 정부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김한길은 윤 대통령과 자주 독대하며 현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조언과 쓴소리도 적지 않게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 대통령을 돕기로 한 그였지만 모든 게 계획된 대로 흘러간 것 같지는 않다. 김한길과 가까웠던 한 야당 인사는 김한길로부터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의힘이 아닌 제3지대로 갈 줄 알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적대적 공생관계인 양당제를 깨고 제3당을 꿈꿨던 것이다.다음은 김한길의 말이다. 그를 향한 세상의 삐딱한 시선에 대한 항변이자 이상주의자의 면모가 드러난다. “지난 대선 마지막 토론회에서 윤석열 이재명 안철수 등 모든 후보들이 정치발전의 첫 단계로 한국이 다당제가 돼야 된다는 데 동의했다. 다당제는 결국 양당이 아닌 제3당이 있어야 된다. 정당 설립은 범죄도 아니고 헌법에 있는 기본권이다. 그런데 창당하려고 하면 여기저기서 벌떼같이 달려들어 공격을 받고 창당하려고 하면 역적이 된다. 내가 비록 실패는 했지만 3당을 만들려고 했던 노력들이 적어도 비난받을 대상은 아니지 않을까. 내가 대선 끝나고 본 문구 중 마음에 와닿는 문구가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세상도 수많은 이상주의자의 좌절을 통해서 이룩된 것이다’는 말이다.”정치권에선 김한길 위원장의 향후 역할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대통령비서실장, 국무총리 등 현 정부에서 윤석열 정부의 성공을 위해 역할을 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의 어깨가 무거운 이유입니다.김 위원장은 윤 대통령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습니다. 솔직하고 뚝심 있고 적어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보기보다 훨씬 더 괜찮은 정치인이라는 것입니다. 정치 경험이 적은 윤 대통령의 부족한 점을 그가 잘 채워주고 그가 말했던 ‘인간화의 시대’를 여는 데 기여하기를 기대합니다. 다음 [22화]는 다시 야당 정치인으로 넘어갈 예정입니다. 지난 정부의 ‘킹메이커’로 불린, 호불호와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야인입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 2023-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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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 방랑이여…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이방인’ 김한길 국민통합위원장[황형준의 법정모독]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내가 생각하는 정치는 이런 거야. 우리사회 구성원들 저마다의 꿈과 자유의 한부분씩을 저당 잡아 생긴 큰 힘으로 뭔가를 해내서,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사람들에게 저당 잡았던 것보다 더 큰 꿈과 자유를 되돌려주는 일이야.“김한길 국민통합위원장(이하 김한길)이 1981년에 쓴 단편소설 ‘세네카의 죽음’에는 남자 주인공이 이같이 말하는 내용이 나온다. 작가로서 이름을 날리던 김한길이 정치에 뛰어들게 된 이유가 담겨 있다. 김한길은 학창 시절 모범생도 아니었고 기성 정치인의 시각에서도 ‘이단아’였다. ‘모든 시험문제에는 모범답안만 있을 뿐 정답은 없다’고 생각하고, ‘농담이나 하면서 실속 없이 살자’고 생각했던 한량이고 ‘아무것도 각오하지 않고 딱 일 년만 살아보고 싶다’던 청년이었다. 삶을 사랑하고 이별할 줄 알며, 아파할 줄 알고, 성장통을 겪으며 청춘을 보냈다. 그는 한때 젊은이의 우상이었고 여성 팬이 많았다. 본인 스스로 어느 여성잡지에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YS)을 제치고 ‘인기남 1순위’였다고 전한 적이 있다. 실제 그는 당대 최고 여배우였던 탤런트 최명길 씨와 1995년 결혼해 한길이 명길이 ‘길길이’ 부부가 됐다. 작가로서 이름을 날렸고, 방송인으로도 활동하다 정치권에 진출했다. 민주당에서 4선 의원과 민주당 대표를, 김대중 정부에서 문화부 장관과 대통령정책기획수석비서관을 지냈다. 중도개혁 성향으로 탈당과 중도정당 창당을 반복했던 그는 윤석열 대통령의 멘토 역할을 하며 장관급인 국민통합위원장을 맡고 있다.● 정치인 아들로 일본에서 태어난 金… 영원한 이방인 김한길은 김철 전 사회민주당 위원장의 3남 중 2남으로 1953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도쿄에서 유학 중 그가 태어난 것이었고 일곱 살 때까지 일본에서 컸다. 그 시절부터 그는 이방인이었다.“우리는 물론 간혹 다투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이들은 나를 어김없이 ‘조센징’이라고 놀렸다. 일본 사람들의 어느 명절날, 때때옷을 입은 아이들이 나를 끈으로 묶어 앉혀놓고 자기들이 지어낸 노래를 불렀다. 조오세엔징…조오세엔징…그러면서 한 녀석씩 내게 다가와서 나를 쥐어박았다. 조센징에게는 그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그 얼마 뒤부터 나는 서울에서 살게 되었다. 나는 아직 우리 말을 잘하지 못했지만 조센징들의 나라에서 초등학교에 다니게 된 것이 너무나 기뻤다. 나는 다시 시작해보려고 했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있었으므로 나는 아주 착한 아이인 체하였다. 새로 사귄 친구들이 나를 ‘쪽발이’라고 놀려대기 전까지는. (중략) 나는 나를 조센징이라고 놀려대던, 지금은 사십 대가 돼 있을 어린 날의 옛 친구들을 진작부터 용서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내가 그 옛 친구들을 용서하지 않고 품고 있으면 내가 더 망가지기 때문이었다. 잊자 한들 잊혀질 일은 결코 아니었다.”- 1995년 8월 16일 자 동아일보 칼럼 ‘김한길의 세상읽기 <일본의 옛 친구에게>’ 중에 -한국의 대표적인 사회민주주의 계열 정치인이었던 아버지는 가정에 소홀했다. 외국을 오갔고 1971년엔 사회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하기도 했고, 박정희 정부에서 탄압을 받았다. 1975년 긴급조치 위반으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진보정당 이력으로 인해 공안당국의 감시를 받은 적도 있었고 대학생일 때 쓴 글이 문제가 돼서 기관에 잡혀갔다가 돌아온 적도 있었다. 아버지가 그를 시대의 반항아로 만들었던 것이다. “내가 이제까지 누군가를 미워했던 양으로 친다면, 가장 많이 미워한 사람이 바로 내 아버지가 아닐까 싶다. 늘 민주화와 통일과 민족과 못사는 사람들의 삶을 말하면서 정작 당신이 거느린 식솔들에게는 한없이 무력했던 분. 세상에서는 옹고집, 반골로 불리면서도 정작 당신 둘째 아들의 반항에는 속수무책이었던 분. 통일이고 민주화고 개뿔이고 간에 아버지 제발 우리한테도 좀 신경을 써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내가 대들면 말없이 한숨만 내쉬시던 분…” - 1994년 7월 5일 자 동아일보 ‘내가 가장 미워했던 사람’ 기고문 - 20대의 김한길은 “무슨 꿈 같은 것도, 희망 같은 것도, 야망도 욕심도 없었다. 그런 알량한 낱말들은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하여간 그랬다”고 썼다. 합격한 대학을 때려치우고 구두닦이를 하기도 했다. 건국대 국문과에 입학했다가 제대한 뒤 정치외교학과로 전과해 졸업한 뒤 서울 중앙여고에서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78년 김한길이 군에 입대하고 나서 처음 넉 달 동안에 쓴 ‘병정일기’는 월간 ‘문학사상’에 실려 화제가 됐지만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는 이 글이 완간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한길이 미국행을 택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독재정권하의 고국은 우울했고 미래는 보이지 않아 불안하게 했다. “내가 쓴 어떤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가 모 기관의 지하실에 끌려가서 야단을 맞고 나온 뒤로는, 주위 사람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내게 권했다. 일단은 해외에 나가서 관망해보는 게 좋을 거라고.” - 김한길 수필집 ‘눈뜨면 없어라’ 중 - ● 미국 건너간 뒤 주유소, 햄버거 가게 등에서 일하다 5년 만에 언론사 지사장1981년 6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도착한 그는 목수 보조, 주유소 계산원, 햄버거 가게 요리사보조 등으로 일하기도 했다. 흑인들이 많이 살아 ‘흑석동’으로 불린, 홍등가에 있는 주유소에서 방탄유리 안쪽에서 카운터를 맡았다. 밥벌이를 하면서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지만 노동과 생활의 무게는 그를 짓눌렀다. 수면 부족과 지나친 흡연으로 인한 두통에 시달렸다. “나는 주유소 주인인 최 씨를 미워한다. 최 씨는 매일 아침 교대 시간보다 삼사십 분씩 늦게 오기 때문에 나는 그를 미워한다. 그러면서 단 한 번도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그를 나는 진짜로 미워한다. 나를 삼사십 분씩 덤으로 더 부려 먹는 것이 자신의 순이익이라고 생각하는 최 씨의 그 낯간지러운 꾀를 미워한다. 또 최 씨는 내게 단 한 번도 보수를 제날짜에 준 적이 없기 때문에 나는 그를 더 미워한다. 며칠을 참다가 내가 마지못해 말을 꺼내면 그제야 잔뜩 목에 힘을 주며 돈을 던져주는 최 씨를 나는 속으로 미워한다. 일한 만큼의 정당한 보수를 받는 나를 괜스레 초라해지게 만드는 최 씨를 나는 무지무지 미워한다. - 김한길 수필집 ‘눈뜨면 없어라’ 중 -“완전히 미국 사람이 되지는 말라는 너희들의 충고는 엉터리다. 생각해보렴. 내가 어디 여탕에 뛰어든다고 갑자기 여자가 되겠니, 이 바보들아. 우리는 어떤 ‘인종’이나 한 ‘세대’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람’ 그 자체에 대한 이해를 키워가야 할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길만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숱한 의문과 혼돈을 조금씩이나마 풀어줄 수 있을 거야.” - 김한길 수필집 ‘눈뜨면 없어라’ 중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 -이듬해 3월 이후 그는 미주한국일보 샌프란시스코지사에 기자로 취직했고 중앙일보 미주지사장까지 지냈다. 미국에 온 지 5년 만에 이룬 성공이었다. 그는 미주한국일보 기자로 일하면서부터 억척으로 일했고 남에게 지고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했다. 충성스럽게 일하고 뛰며, 기사며 칼럼을 써제꼈다. 1987년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강원용 목사가 조직위원회 문화예술행사추진위원장을 맡으면서 업무를 도와달라고 해 한국으로 돌아와 위원회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듬해 강 목사가 방송위원장을 맡으면서 방송위 기획국장으로 일했다.그러면서도 틈틈이 글을 썼고 글쟁이로 이름을 날렸다. 1981년에 소설 ‘바람과 박제’가 문학사상에서 소설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고 ‘병영일기’, ‘미국일기’ 등 에세이와 ‘여자의 남자’,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등 소설을 써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1992년 3권짜리 장편소설 ‘여자의 남자’는 400만 부가 넘게 팔렸고 1993년 MBC에서 같은 이름의 드라마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방송국에서 구성 작가로 일하고 있는 남자 주인공과 대통령의 외동딸인 여자 주인공의 러브스토리로 드라마에선 정보석 김혜수 씨가 주연을 맡았다. 김한길은 1988년 발표된 가수 조영남의 ‘화개장터’를 작사했다. 2015년 1월 그가 직접 했던 이야기다.“내가 화개장터가 있다는 걸 조그마한 기사를 보고, 영호남 사람이 어울리는…그래서 작사하자고 했는데 조영남 씨가 건전가요라 팔리지도 않는다며 반대했다. 그런데 조 씨가 레코드 만드는 데 노래가 몇 개 없어서 화개장터도 넣은 거야. 그게 조 씨 노래 중 톱10에 들어간 유일한 노래가 된 거야. 그게 26년 전인데 저작권법이 없었다고 조 씨가 얘기하더라고. 어쨌든 그때 미국에서 오래 있다 보니까 영호남 문제가 오래갈 거 같은데 강연하고 책 쓴다고 될 일도 아니고 그래서 가요 만들자고 한 것이다…국민들 마음속에 영호남이 화합해서 같이 살면 좋겠다…그런 마음을 담아서 우리나라 전체가 하나의 화개장터가 됐으면 좋겠다고 작사를 했다.” - 취재 메모 중 -● 작가·방송인 등으로 전국적 인기 누린 金소설 외에도 위트와 풍자, 촌철살인 등이 담긴 칼럼을 썼고 라디오와 TV 방송에서 토크쇼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배우자 최명길 씨를 만났다. 두 번째 결혼이었다. MBC 라디오의 진행자로 평소 알고 지내던 두 사람은 1994년 MBC 방송대상 라디오 부문 수상자로 나란히 선정돼 각종 행사에 참석하면서 자주 만난 것이 서로에 대한 호감을 사랑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대뜸 1995년 1월 그가 “나에게 시집오면 어떻겠느냐”고 전화로 청혼을 했고 최 씨도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그 무렵부터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토록 미워했던 아버지였지만 마지막에 화해한 것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나는 이 땅에서는 가망이 없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좇아 미국으로 도망갔는데 아우의 편지가 나를 못살게 굴었다. ‘아버지를 보고 있으면 말이야. 내가 당신의 아들이라는 생각이 들질 않아. 위인전을 읽을 때처럼 거리감이 느껴지는 거야. 너무나 성실하게 자기 갈 길을 가는 한 거인을, 결코 좌절할 줄 모르는 한 영웅을 아버지에게서 보는 거야.’ 문민정부가 들어섰을 때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우셨다. 나는 이제 아버지를 미워했던 마음의 열 배쯤 내 아버지가 자랑스럽다.” - 1994년 7월 5일 자 동아일보 ‘내가 가장 미워했던 사람’ 기고문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등 여야 양쪽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한국 사회의 지역주의와 지역 갈등이 제일 큰 걸림돌이라고 봤던 그는 문화적으로 차별당하는 쪽에 힘을 보태는 게 맞다는 생각에 야당을 택했다.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비례대표 의원으로서 본격적인 정치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가 자주 언급했던 단어 중 하나는 희망이었다. 그가 정치를 하게 된 이유는 여기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 “(정치는) 차라리 산문 쪽에 가깝다. 우리들 자신과, 우리가 모여 사는 사회의 크고 작은 실체와 끊임없이 맞닥뜨리는 일이 정치의 시작이니까 그렇다. 우리의 현실을 고스란히 담은 거울 속의 풍경은 종종 황량하고 을씨년스럽다. ‘동물의 왕국’에서처럼 야비하고 잔인하고 냉혹하다. 그 속에서나마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티면서 희망을 탐색하는 직업이 정치가 아닐까 싶다.” - 저서 ‘김한길의 희망일기’ -어느 날 9살 된 아들이 노래를 흥얼거립니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는 / 섬진강 줄기 따라 화개 장터엔 / 아랫마을 하동 사람 윗마을 구례 사람 / 닷새마다 어우러져 장을 펼치네~” 그래서 저도 따라 부르다가 “아빠가 잘 아는 할아버지가 그 노래를 작사했단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조영남 씨의 ‘화개장터’를 어린이가 아는 것도 신기했습니다. 그 무렵 김한길 국민통합위원장의 이야기를 한 번 다루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국민통합위원장 자리를 맡았을 때 참 적합한 자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방인 경험이 많았고 지역주의와 계파주의의 문제를 직시했고 늘 통합과 갈등 해소, 희망을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그의 대척점에 있던 정치인들은 ‘정당 브레이커’라거나 갈등을 만드는 인물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인간화시대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시대적 가치이자 시대정신입니다. 소위 우리가 겪은 산업화 민주화 시대 다음에 어떤 시대를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가. 산업화 시대가 최소한의 물질을 추구하고 민주화 시대가 민주적 제도를 갖춰가는 시기였다면 이제 물질과 제도가 사람을 위해서 쓰이는 시대가 되어야 된다는 것. 그런 의식은 상당 기간 숙성해왔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국민이 그런 인식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희망을 살려 나가는 게 우리 정치를 살려 나가는 것입니다.”그의 글에선 휴머니즘이 묻어납니다. 단문을 구사하며 위트와 유머가 담겼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나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글도 좋아할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번 20화에서 책에 나오는 그의 아픈 개인사는 일부러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김 위원장이 계속 작품 활동을 했다면? ‘정치인 김한길’로 살았을 때보다 우리 사회에 더 많은 메시지를 던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다음 에선 그의 정치활동을 중심으로 다뤄보겠습니다.황형준기자 constant25@donga.com}

    • 2023-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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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황형준]‘사법의 정치화’ 속에 존재감 잃어가는 헌재

    2016년 12월 9일 국회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키자 헌법재판소는 국가적 혼란을 조기에 해소하기 위해 재판에 속도를 냈다. 헌재는 매주 1, 2차례 재판을 열었고 총 3회의 변론준비기일과 17회의 변론기일 등 20차례 재판을 거쳐 이듬해 3월 10일 파면 결정을 내렸다. 탄핵심판의 재판장이었던 박한철 전 소장은 임기가 2017년 1월 31일 끝나 재판을 마무리하진 못했지만 매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는 퇴임식에서 “헌법질서에 극단적 대립을 초래하는 제도적·구조적 문제가 있다면 지혜를 모아 빠른 시일 내 개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희망한다”고 개헌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박 전 소장의 뒤를 이어 헌재소장 권한대행을 맡은 이정미 전 재판관은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역사적 선고문을 낭독했다. 선고 당일 평소보다 일찍 출근하느라 미처 떼어내지 못한 뒷머리 ‘헤어롤’ 2개가 카메라에 포착돼 화제가 됐다. 법조계에선 이때만큼 헌재가 국민적 지지와 박수를 받고 역할과 위상이 높았던 때는 찾기 어렵다는 의견이 많다. 헌법의 최종 수호자인 헌재가 탄핵심판을 마무리함으로써 국가적 혼란을 마무리하고 새 대통령 선출 절차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높았던 헌재의 위상은 6년 만에 급격히 추락했다. 특히 최근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했던 이른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입법에 대한 헌재의 권한쟁의심판 결과를 두고선 ‘사법의 정치화’의 전형을 보여줬다는 지적이 법조계에서 나온다. 헌재는 올 3월 국민의힘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청구한 권한쟁의심판을 모두 각하 또는 기각했다. 눈길을 끈 건 헌재 판단이 4 대 4로 극명하게 갈렸다는 점이다. 진보 성향 재판관과 중도보수 성향 재판관의 의견이 거의 모든 쟁점에서 대립하면서 키는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임명한 이미선 재판관이 쥐게 됐다. 이 재판관의 결정에 따라 헌재는 입법과정이 국민의힘 의원들의 표결권을 침해했다면서도 무효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선고 직후 여당에선 “헌재가 아니라 정치재판소 같다”는 날 선 반응이 나왔다. 박한철 전 소장은 지난해 9월 발간한 저서 ‘헌법의 자리’에서 “‘정치의 사법화’는 다시 사법을 특정 세력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거나 그의 숨겨진 정치 행위로 전락시키는 ‘사법의 정치화’로 나타나기도 한다”며 “그 결과 사법에 대한 국민 신뢰가 저하되고, 헌법시스템의 약화와 훼손, 국가 공동체의 위기라는 악순환이 발생할 가능성이 더 커지고 있다”고 썼다. 지금 헌재를 두고 지적되는 사법의 정치화는 문재인 정부에서 심화됐다. 우리법연구회 창립 멤버인 유남석 소장 등 이념적 지향성이 같은 재판관을 대거 충원했기 때문이다. 재판관이 인사권자의 입맛에 맞는 결정을 내렸다는 평가가 나오면 결과적으로 국민 신뢰를 갉아먹게 된다. 그 책임도 인사권자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 올 11월부터 유 소장의 후임을 포함한 재판관 3명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하는 윤석열 대통령이 잊지 말아야 할 점이다. 황형준 사회부 차장 constant25@donga.com}

    • 2023-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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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에서 수행 중인 ‘독일 병정’ 박한철 전 소장… “어디서든 주인이 돼라”[황형준의 법정모독]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 “나는 훌륭한 헌법재판이란 직선과 곡선, 그리고 색채가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음악과 같다고 생각한다. 좀 더 풀어서 말하면 국가와 사회의 지속성을 의미하는 직선, 공동체의 발전에 필요한 창의성을 뜻하는 곡선, 그리고 의견과 가치의 다양성을 상징하는 색채가 어우러져 고된 현실에 부대끼는 국민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희망을 주는 선율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박한철 전 헌법재판소 소장(70)은 지난해 9월 발간한 저서 ‘헌법의 자리’에서 헌법재판의 의미와 가치를 이같이 표현했다. 박 전 소장은 역대 유일한 검찰 출신 헌재 소장이었다.2016년 12월 9일 국회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키자 헌재는 국민적 혼란을 조기에 해소하기 위해 재판에 속도를 냈다. 헌재는 이듬해 3월 10일 파면 결정을 내릴 때까지 매주 1, 2차례 재판을 열었고 총 3회의 변론준비기일과 17회의 변론기일 등 무려 20차례 재판을 열었다. 그 수장이 박 전 소장이었다. 박 전 소장은 임기가 2017년 1월 31일 끝나면서 재판을 마무리 짓지 못했지만 언론으로부터 매일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는 퇴임식에서는 “우리 헌법 질서에 극단적 대립을 초래하는 제도적 구조적 문제가 있다면 지혜를 모아 빠른 시일 내에 개선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희망한다”고 개헌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때만큼 헌재가 국민적인 지지와 박수를 받고 그 역할과 위상이 높았던 때를 찾기 어렵다. 헌법의 최종 수호자인 헌재가 나서서 탄핵 심판을 마무리함으로써 국가적 혼란을 수습하고 대선을 통해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는 절차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6년 만에 높아졌던 헌재의 위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지금도 현 유남석 헌재 소장이 누군지는 몰라도 박 전 소장을 기억하는 사람은 적지 않다.● 특수·기획 거친 ‘독일 병정’ 검사1953년 부산에서 태어난 박 전 소장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인천으로 올라와 중·고교를 졸업한 뒤 1975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1981년 제23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사법연수원 13기로 수료한 뒤 1983년부터 검사로 재직했다.그는 검사 시절 특수통이자 기획통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평검사 시절 요직인 법무부와 서울지검(현 서울중앙지검), 청와대 파견 등을 거쳤다. 막스 플랑크 국제형사법연구소 객원연구원 등으로 독일에서 유학을 했고 헌재 파견, 인천지검 특수부장, 대검 기획과장,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 삼성 비자금 특별수사·감찰본부장, 대검찰청 공안부장, 대구지검장, 서울동부지검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후배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검사였다. 검사장 시절 조회 때 한시와 영시를 인용하기도 하고 후배 검사들에게 시집을 선물하는 등 시와 고전을 즐겨 읽었다. 동양과 서양 역사는 물론 문학과 철학에도 조예가 깊은 낭만주의자였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별명이 ‘독일 병정’이었다. 워낙 엄하고 철두철미한 업무 스타일 때문이었다. 박 전 소장 밑에서 일했던 검사 출신 A 변호사의 이야기다.“굉장히 꼼꼼하시고 일을 무지하게 열심히 하시는 분이니까 검사들이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결재도 워낙 꼼꼼하게 하다 보니 차장 시절에 그 밑에 있던 부장들이 아무도 결재를 안 올리려고 했다. 결재를 할 때 기록에다가 본인이 수정한 부분을 접어놓는데 수십 개가 접혀 있어서 놀라고 그걸 밤늦게까지 부랴부랴 수정한 기억이 있다.” - 취재 메모 중 -그는 이원석 검찰총장의 초청으로 올해 2월 서울 서초구 대검 청사에서 강연을 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후배 검사들에게 공익 실현 기관으로서의 검찰은 정치적 중립이 필수적이며 균형감각 등을 통해 헌법 가치를 실현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정치적 중립 의무는 헌법 가치를 실현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검찰 구성원, 총장으로부터 정문을 지키는 청원경찰에 이르기까지 모든 구성원들이 한마음으로 지혜를 짜내야 한다. 끊임없이 교감하면서 답을 찾아가야 한다. 검찰이 담당하는 모든 사건은 크고 작은 걸 떠나서 전부 방정식으로 풀어야 한다. 특히 복잡한 사건은 8,9차 방정식을 풀어야 하는데 고차방정식에 있어서는 국민 설득 문제가 가장 앞에 나온다. 국민이라는 건 언론이 가장 많은 부분을 대변하고 있고, 언론을 설득하는 문제, 신뢰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그걸 풀어나가는 게 검찰의 중요한 숙제다.” - 2월 대검찰청 강연 중 - 수사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지지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결국 검찰이 치명상을 입게 된다는 의미다. 이런 이유로 그는 언론 대응을 중시했다고 한다. 공보 역할을 맡을 때는 수사 상황을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어 선문답을 즐겼다.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로 있던 2005년 6월엔 기자단과의 티타임 도중에 “호연(浩然)한 기개 맑고 드높으며 선재(仙才) 뛰어나 속인은 알아보기 어렵네”라며 갑자기 한시를 읊기도 했다. 당시 불거진 ‘행담도 개발비리 의혹’을 둘러싸고 기자들이 “이 사건을 서울중앙지검이 맡게 되느냐”고 집요하게 묻자 중국 고사를 꺼낸 것이다. 당시 그는 이처럼 대답하기 난처하거나 보안이 필요한 질문에는 역사, 문화에 관련된 다양한 지식을 설명하며 피해 갔다고 한다. 기자들도 원칙을 지키는 그를 미워할 수 없었다. “2005년 4월 초순이었던 것 같은데 봄이었다. ‘춘래불사춘’, 봄은 왔는데 봄이 온 거 같지가 않구나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앞으로 엄청난 권력형 비리로 부각이 돼 있고 그게 궁금해하는 사항이니까 수사하는 데 여러분들의 협조를 간곡히 부탁한다. 의혹을 제기하는 것만으로는 기사를 쓰지 말고 검찰 수사와 속도를 맞춰서 보도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중략) 언론과는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신뢰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걸 강조하는 의미에서 말씀드렸다. ” - 2월 대검찰청 강연 중 - 그는 △오전 10시와 오후 2시 브리핑 △기자들이 취재해 오는 사항에 대한 확인 △기자들의 전화는 무조건 받을 것 등 기자단과의 약속을 몇 달간 지켰고 그 결과 언론과의 신뢰관계가 형성됐다고 한다. ● 고검장 승진 고배… ‘전화위복’으로 헌재 재판관 지명그런 그도 대검찰청 공안부장 시절인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집회를 잘 통제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고검장에 승진하지 못하고 서울동부지검장으로 옷을 벗었다. 이후 김앤장법률사무소에서 일하던 중 반전이 찾아왔다. 헌재 파견 근무를 하던 시절 눈에 띄었던 덕분인지 법무부 차관을 지낸 검사 출신 김희옥 재판관 후임으로 2011년 2월 지명된 것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이었다. 이어 재판관을 하면서도 당시 이강국 헌재 소장으로부터 “소장을 맡아도 될 것 같다”는 말을 종종 들을 정도로 그 자질을 인정받았다. 결국 2013년 헌재 소장으로 지명돼 헌법재판의 수장을 맡게 됐다. 또 다른 검찰 출신 B 변호사의 말이다.“대구지검장 시절에 대구 갓바위를 한 몇 달을 매일 올라가셨어. 불심이 깊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나라에 대한 걱정이 많으셔서… 나라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하셨는데 결국 그 기도가 헌재 소장까지 만들어 주신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 취재 메모 중 -그가 소장이던 시절 헌재는 역사에 남을 만한 결정을 많이 내렸다. 2014년 통합진보당 위헌정당 해산 심판 사건에서 정당 해산 인용 결정을 내렸다. 정당 해산 심판에 대한 최초의 헌재 결정이었다. 당시 헌재는 “통진당이 추구하는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는 조선노동당이 제시하는 정치 노선을 절대적인 선으로 받아들이고 그 정당의 특정한 계급 노선과 결부된 인민민주주의 독재 방식과 수령론에 기초한 1인 독재를 통치의 본질로 추구한다는 점에서 민주적 기본질서와 근본적으로 충돌한다”고 밝혔다. 또 2015년에는 간통죄에 대해 “간통 행위를 국가가 형벌로 다스리는 것이 적정한지에 대해 더 이상 국민의 인식이 일치한다고 보기 어렵게 됐다”며 “혼인과 가정의 유지는 당사자의 자유로운 의지와 애정에 맡겨야지 타율적으로 강제할 수 없다”고 간통죄 조항을 위헌으로 판단했다. 박 전 소장은 헌재 재판관 임명 제도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는 2013년 인사청문회부터 “9명의 재판관 중 대통령과 국회가 각각 3명씩 지명하는 것은 국민적 대표성이 있으나 대법원장이 3명을 지명하는 것은 국민적 대표성이 없다”며 “대통령과 국회의 합동 행위로 재판관 임명이 이어진다면 (이 문제가)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소신 발언을 했다. 2016년 3월 신문방송편집인협회 토론회에선 “솔직히 자존심이 상한다”며 “(선출되지 않고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원장은 국민의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한 상태다. 헌재가 이중으로 민주적 정당성이 희석돼 과연 권위를 가질 수 있느냐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판사 출신 헌재 소장이었다면 하기 어려운 소신 발언이었다. 박 전 소장과 함께 일했던 한 전직 헌재 재판관은 “검사 출신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았고 바르고 훌륭한 분이었다”고 말했다.2017년 1월 말 은퇴한 뒤에는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초빙교수와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초빙교수 등을 지냈고 지금은 동국대 법대 석좌교수로 지내며 인권법 강의를 학부생에게 가르치고 있다.● “사법의 정치화로 국민 신뢰 저하되고 헌법시스템 훼손” 박 전 소장은 지난해 9월 발간한 저서 ‘헌법의 자리’에서 헌법재판의 사회 통합 기능도 강조했다. 그는 “헌재는 보다 적극적인 헌법해석을 통해 우리 헌법이 구체적인 갈등 해결의 수단이자 목표로 작동하도록, 단계적 가치판단에 있어 헌법을 준거의 틀로 활용해야 한다”며 “동시에 정치와 권력기관에는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다 구체적이고 적극적, 지속적으로 제시해 밝은 미래를 향한 사회 통합의 나침반이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에 대한 문제의식도 담았다. 그는 “‘정치의 사법화’는 다시 사법을 특정 세력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거나 그의 숨겨진 정치 행위로 전락시키는 ‘사법의 정치화’로 나타나기도 한다”며 “그 결과 사법에 대한 국민 신뢰가 저하되고, 헌법 시스템의 약화와 훼손, 국가 공동체의 위기라는 악순환이 발생할 가능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라고 썼다. 특히 “정치의 과도한 사법화는 사법기관에 대한 소위 코드 인사와 맞물릴 경우 헌법재판이나 사법이 헌법과 법치주의의 실현을 넘어 재판관 개인 또는 그가 대표하는 정치적, 사회적 세력의 특정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거나 추종하고자 하는 숨겨진 정치 행위로 전락할 위험성이나, 명백한 정치적 판단은 아니라 하더라도 헌법정신과 정치적 의도를 적당히 절충·조정하는 타협적 판결에 이르게 할 가능성을 갖는다”라고 코드 인사를 에둘러 비판하기도 했다. 지금 헌재와 관련된 사법의 정치화는 문재인 정부에서 이념적 지향성이 같은 재판관을 일방적으로 임명한 것과 무관치 않다.특히 최근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했던 이른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입법에 대한 헌재의 권한쟁의심판 결과를 두고 ‘사법의 정치화’라는 지적이 다시 나오고 있다. 헌재는 국민의힘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청구한 권한쟁의심판을 올해 3월 각하 또는 기각했는데 헌재 판단은 4 대 4로 극명하게 갈렸다. ‘우리법연구회’의 창립 멤버인 유 소장을 포함한 진보 성향 재판관과 중도보수 성향 재판관의 판단이 엇갈리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이미선 재판관이 결정권을 쥐게 됐다. 그의 결정에 따라 헌재는 입법 과정이 국민의힘 의원들의 표결권을 침해했다면서도 무효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렇다 보니 여당에선 “헌재가 아니라 정치재판소 같다”는 날선 반응을 보였다. 윤석열 대통령은 올해 11월 퇴임하는 유 소장의 후임을 포함해 임기 중 재판관 3명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할 예정이고 이번 정부에서 헌재 구성원이 모두 교체된다. 헌재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선 사법의 정치화에 대한 박 전 소장의 지적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 부인과 사별한 뒤 절에서 기거… ‘아우라’ 있는 법조계 원로독실한 불교 신자인 그는 2009년 서울 서초구 아파트를 불교재단에 기부한 뒤 당시 전세보증금 2억2000만 원에 월세 100만 원을 내고 그 아파트에 그대로 살았다. 여기에는 불자였던 부인의 뜻이 반영됐다고 한다. 자녀가 없는 그는 2019년 부인과 사별한 뒤 서울 종로구의 한 절에서 기거하며 주말에만 서초구 아파트에서 지낸다고 한다. 공수래공수거다. 검사 출신 A 변호사는 “간혹 대구지검장 시절 멤버들과 골프를 치시는데 그때 보니 가방이나 골프화, 골프채 등이 정말 오래됐다”며 “하나 사드리고 싶은 마음에 골프 가방을 하나 사드렸는데 여전히 안 쓰신다. 요즘 나오는 게 아무래도 화려해서 비교적 점잖은 걸 사드렸는데 또 안 쓰시더라”고 전했다. 또 다른 후배 검사는 “내가 검찰 선배 중에 유일하게 ‘아우라’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박 전 소장이다. 통상 장관이나 총장을 한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얼굴이 달라진다”며 “하지만 박 전 소장은 그 아우라가 과거나 현재나 여전하다. 그분은 한결같고 사리사욕이 없는 분이라서 늘 존경하게 되고,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그는 ‘어느 곳이든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는 뜻의 수처작주(隨處作主)라는 말을 좌우명처럼 주변에 자주 한다고 한다. 중국 당나라 때 임재선사가 한 말씀이다. 그는 검사 시절은 검사로서, 헌재 재판관과 소장 시절에는 법관으로서의 역할을, 지금은 교수로서 충실히 후학을 양성하며 만족해한다고 한다. 말 그대로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법정모독 시리즈의 근간에는 정치와 법조의 영역이 구분되지 않고 수렴하고 있다는 현상이 담겨 있습니다. 최초로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이 탄생했고, 국회의원 등 정치인의 주류 집단은 법조인입니다. 로스쿨 도입 이후 법조인의 수가 늘어나면서 정치와 법조의 화학적 결합은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문제는 정치의 사법화, 사법의 정치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주요한 정치적 결정을 사법의 영역으로 미루는 일도 벌어지고, 그 과정에서 사법이 정치화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박 전 소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그를 법정모독 [19화]의 주인공으로 쓰게 된 이유입니다.글을 쓰기 전에 그를 직접 만나서절에 가보고 싶었지만 책이 나온 뒤 한 번 인터뷰한 것을 빼곤 모두 언론과의 접촉을 피했다며 완곡히 거절하셨습니다. 본인을 내세우는 것도 세상에 근황을 전하는 것도 꺼리시는 것 같았습니다. 대부분 법조인들이 현직에서 떠난 뒤 개업해 전관예우를 받아 부를 축적하는 상황과 달리 변호사로 개업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속세와 거리를 두며 검소하게 한결같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가 후배 법조인들로부터 존경받는 이유겠지요.다음 [20화]는 여권의 정치인을 다룰 예정입니다. 수식어가 많습니다. 언론인, 소설가, 야권 출신 중도 성향의 중량감 있는 정치인입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 2023-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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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바이든’ 꿈꾸는 ‘엉클 박’… 사라지지 않는 노병[황형준의 법정모독]

    “내가 아는 명리학자가 있는데 앞으로 7년간 운이 제일 좋다고 하더라. 원래 정치인이 고난을 겪는 사주여야지 대성한다. 나는 감방도 한번 갔다 왔고(웃음). 1942년생의 시대가 온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김정일 전 북한 노동당 총비서… 42년생 중에 국내에서 제일 유명한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은 죽었고 그다음 나다. 청와대에 잘 출입하고 있어라ㅎ” - 취재 메모 중 - 2021년 4월 청와대 출입기자였던 필자를 포함한 기자들과 사석에서 만난 박지원 당시 국가정보원장(이하 박지원)은 이렇게 말했다. 4선 의원과 문화관광부 장관, 대통령비서실장, 국정원장 등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자리는 다 했다. 그러면서도 대통령과 국무총리, 국회의장 등 끊임없이 권좌를 지향하는 게 그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노욕(老慾)에 끝이 없다”는 비난과 함께 “그래도 그만큼 열정적인 경험과 지혜가 많은 원로가 없다”는 평가가 엇갈린다.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감탄할 정도로 ‘지칠 줄 모르는 성실함과 놀라운 정치적 순발력’ 때문에 호불호를 떠나 ‘대단한 정치인’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다. 그의 왕성한 활동엔 권력욕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건강한지 모른다. 그에겐 ‘질투는 나의 힘’이 아니라 ‘권력욕은 나의 힘’인 셈이다. 최근 그는 매주 10~12회의 방송 출연을 하며 현안에 대해 언급하고 정부를 향해 쓴소리를 한다. 그러면서도 올 2~4월에 전국 16개 광역자치단체를 방문해 30여 회 초청 강연을 했다. 그만큼 그의 정치평론을 듣고 싶어하고 그를 찾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비호감을 갖는 ‘안티’도 많다. 누리꾼은 그를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한다’는 의미로 ‘박쥐원’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하고, 노욕을 부린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는 방송이나 강연에서 “제가/ 그/ 유~명한/ 박지원입니다”라고 너스레를 떤다. 이름부터 원래 열하일기를 쓴 연암 박지원과 같아 한국에서 의무교육을 받은 사람이면 다 아는 이름이다. 게다가 그 역시 언론과 SNS에 끊임없이 매일 등장하니 삼척동자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17화]에 이어 노무현 정부 이후 그의 행적으로 돌아가 보자. ● 대북송금 사건으로 구속돼 징역 3년 살아박지원이 검찰에 구속돼 징역 3년의 유죄 판결을 받는 계기가 된 ‘대북송금 의혹’은 2002년 9월 국정감사장에서 처음 불거졌다.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에서 현대상선이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해 산업은행에서 4900억 원, 당시 환율로 4억 달러를 긴급 대출받아 현대아산을 통해 북한에 넘겨줬다고 주장하면서다. 이듬해 1월 말 감사원은 ‘4000억 원 중 1760억 원은 현대 계열사 운영자금으로 사용됐고, 나머지 2240억 원은 북한에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의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파문이 커지자 DJ도 퇴임을 앞둔 이듬해 2월 사실관계를 인정하며 “어떻게 하면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고 민족이 서로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 국민이 안심하고 살면서 통일에의 희망을 일궈나갈 수 있도록 할 것인가 하는 충정에서 행해진 것”이라며 “저는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대국민 사과를 했다. 결국 송두환 특별검사팀은 6월 김대중 정부와 현대그룹이 2000년 4월 8일 북한과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최종 합의하면서 정부와 현대가 각각 1억 달러, 4억 달러를 북한에 지급하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을 파악해 이에 관여한 박지원을 직권남용 및 남북교류협력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그는 수감 중 녹내장 등 건강이 악화돼 구속집행정지와 형집행정지를 반복하다 석방됐고 2007년 2월 노무현 대통령의 특별사면 대상에 포함됐다.● 당 대표 1번, 비대위원장 3번, 원내대표 3번 기록재기는 순탄하지 않았다. 박지원은 DJ의 ‘정치적 고향’이자 자신이 고등학교를 나온 전남 목포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려 했지만 공천심사위원회의 ‘금고 이상 형 확정자 배제’ 원칙에 따라 공천을 받지 못했다. 그러자 “무소속으로 출마해 목포시민의 평가를 받겠다”며 탈당한 뒤 DJ의 부인 이희호 여사의 지원 유세와 동교동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당선됐다. 이후 재선 의원으로는 이례적으로 2010년 5월 민주당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그는 이를 시작으로 2012년 민주당 원내대표와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내는 등 의원 시절 동안 민주당에서만 원내대표와 비상대책위원장을 2번씩, 2016년 안철수 의원이 창당한 국민의당에서 원내대표와 비대위원장, 당 대표까지 지내는 정치사의 신기록을 세웠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선 정보력과 전문성을 중심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2009년 7월 당시 검찰총장 후보자였던 천성관 씨와 스폰서 박모 씨의 해외 골프 여행, 천 씨 부인의 면세점 쇼핑 명세 등을 폭로하며 후보자 사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를 포함해 원내대표로 청문회를 지휘하면서 7명의 청문 대상자를 낙마시켜 ‘청문회 낙마 7관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여의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도 거의 매주 지역구인 전남 목포를 방문할 정도로 지역에도 공을 들였다. 금요일 귀향해 지역구 업무를 보고 월요일 새벽 서울로 돌아오는 것을 뜻하는 ‘금귀월래(金歸月來)’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그 결과 18~20대 총선까지 목포에서 내리 3선에 성공했다.하지만 좋은 평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12년 ‘이해찬 대표-박지원 원내대표’로 친노(친노무현) 세력과 호남 세력이 결탁했다는 ‘이박 담합’ 논란도 불러왔고 구정치의 상징으로 비난받기도 했다. 잦은 SNS와 방송에서 가끔 근거 없는 의혹 제기나 말실수를 해서 구설수에 오른 적도 적지 않다. 2014년 1월 당시 같은 당 중진 의원의 비판이다. “SNS에 글 올리기 좋아하는 X들은 먼저 생각을 안 하고 말이랑 행동이 앞서서 문제야. 너무 경망스러워.” - 취재 메모 중 -박 전 원장은 DJ 정신을 기리고 국민들에게 계속 알리는 걸 사명으로 생각하지만 일각에선 지나치게 DJ를 팔아 자기 정치를 하려 한다는 비난도 제기된다. ● 2015년 2·8 전당대회 낙마 이후 탈당-신당 합류까지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2015년 2·8전당대회에선 2012년 대선에서 낙마한 뒤 당 대표 후보로 나선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고배를 마셨다. 당초 노무현 정부 시절 대북송금 특검법을 통과시키고 특별사면이 미뤄지는 등의 과정에서 친노·친문 세력과는 멀어진 그였다. 다음은 그가 2014년 12월 한 이야기다. “2년 전 문재인 낙선 직후 만났다. DJ의 길을 갈 거냐 이회창의 길을 갈 거냐 선택해야 한다며 설명해줬다. DJ는 낙선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갔다. 하지만 지지자들은 DJ가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고 언젠가 DJ가 돌아오고 대통령을 만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DJ는 결국 돌아와 대통령 후보가 됐지만 약점을 보충하기 위해 보수우파인 김종필 전 총재(JP)를 영입해 대통령에 당선되지 않았느냐. 이회창의 길을 봐라. 대통령 선거에 실패하고 정계를 떠났다. 그러나 바로 복귀해서 손에 피를 묻히더라. 자기에게 대통령 후보를 양보한 조순 총재를 쳐내고, 야당에서 여당으로 넘어온 이기택을 쳐내고 박근혜 당시 대표가 오겠다는 걸 쳐내버렸다. 피를 묻혀서 대통령 후보는 됐지만 대통령은 안 되더라. 그랬더니 그가 굉장히 좋은 얘기라고 참고하겠다더니…” - 취재 메모 중 - 대선 후보로서 정책 준비에 골몰해야지 당 대표로서 각종 논란에 휘말리면 안 되는 만큼 당 대표로 나서는 게 적합하지 않다는 취지였지만 이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당대회에서 낙마한 뒤에도 문 전 대통령과 각을 세우던 그는 2015년 당시 새정치민주연합(현 민주당)에서 ‘친노패권주의’가 논란이 되며 안철수 의원이 국민의당 창당을 추진하자 2016년 1월 탈당했다. 같은 해 3월 국민의당에 합류했고 4·13총선에서 국민의당이 38석을 얻는 기염을 토하며 박지원도 20대 총선에서 당선됐다. 당선 직후 그가 사석에서 했던 말이다.“안 대표가 미래를 보는 안목이 있다. 탁월하다. 그런 정치 지도자가 얼마나 있냐. 깜짝 놀랐다. IT 강국, 신지식을 얘기했던 김대중 대통령에 이은 안목이다. 나도 통합론자였지만 결국 김한길 천정배 박지원이 틀리고 안철수가 맞았던 거 아니냐. 깔끔하게 인정하고 따라가야지.” - 취재 메모 중 -4월 총선 전에 민주당과 국민의당이 야권연대와 후보 단일화 논의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지만 안 의원이 이에 동조하지 않은 덕분에 국민의당이 ‘녹색 돌풍’을 일으켰다는 뜻이었다. 이후 그는 국민의당 원내대표로 추대됐고 안 의원을 DJ급으로 모시며 킹메이커 역할에 전념한다.● 안철수 대통령 만들기 총대 멨지만… ‘문모닝’ 별명만 남아그가 당 초선 의원들에게 한 ‘십계명’ 강의는 지금 봐도 정치인들이나 예비 정치인들이 배울 점이 있다. 필자가 썼던 기사다. ▶초선의 선생님 된 박지원 ‘깨알 강의’박지원은 제3당의 원내대표로서 법안 처리 등의 캐스팅보트를 쥔 3당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국회의 중심에 섰고 안 의원이 국민의당 총선 리베이트 사건으로 대표직에서 물러나자 비대위원장을 맡았다. 그해 8월 당시 국민의당 6선 의원이었던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은 사석에서 이렇게 평가했다.“박지원 대표가 잘하고 계신다. 어떤 분은 몇백 년 만에 한 번 나올 분이라고 하던데…삼국지에 나오는 영웅들을 다 합친 것 같다.” - 취재 메모 중 -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 처리 국면에서도 그는 “탄핵 열차는 출발했다” “개가 짖어도 ‘탄핵 열차’는 달린다” “법꾸라지 김기춘” 등 어록을 내놓으며 정국의 중심에 섰다. 하지만 ‘정치 9단’인 그도 결국 틀렸다. 문 전 대통령 비판으로 하루를 시작해 ‘문모닝’이라는 별명도 얻었지만 점차 안 의원에게 실망했고 2017년 5월 대선은 문 전 대통령의 승리로 끝났다. 국민의 선택은 안철수 후보는 물론 박지원과 국민의당이 아니었던 것이다. ● ‘winter is coming’ 2017년 대선 이후 찾아온 암흑기… 국정원장 지명 반전2017년 5월 대선 이후는 시련의 계절이었다. 2017년 10월 안 의원이 당시 탄핵 사태를 계기로 갈라져 나온 보수 정당인 유승민 전 의원의 바른정당과 합당을 추진하면서다. 결국 안 의원을 비롯한 통합파와 박지원을 포함한 호남 의원이 결별하면서 이들은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으로 분당됐다. 단독으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기 위한 의석수(20석)가 모자랐던 민주평화당은 정의당과 공동교섭단체를 구성했지만 여야 관계에서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다. 대선과 그 이후 호남에서 문 전 대통령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문 전 대통령이 DJ의 햇볕정책을 계승한 남북 대화 분위기를 조성하자 박지원의 문 전 대통령에 대한 입장도 비판에서 지지로 선회하게 됐다. 2018년 2월 민평당이 창당된 이후 박지원의 입지도 쪼그라들었다. 민평당이 원내정당이긴 했지만 의정활동에서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고, 당 대표였던 정동영 전 의원을 중심으로 한 주류와 비주류의 반목이 심해졌다. 결국 박지원을 포함한 광주·전남 의원 9명은 탈당해 2020년 1월 대안신당을 창당하고 이후 민생당으로 통합됐지만 2020년 4월 21대 총선에서 원내 진출에 실패했다. 그도 전남 목포에서 더불어민주당 김원이 의원에게 패배하면서 2008년 이후 12년 만에 자유인이 됐다. 물론 그는 각종 방송에 출연 요청을 받으며 ‘과로사 직전의 백수’였다. 여의도 주변에선 총선에서 민주당이 180석을 얻으며 압도적 지지를 받은 만큼 문 전 대통령이 박지원 등을 중용해 통합 인사를 하고 협치 내각을 구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실제 문 전 대통령은 같은 해 6월 박지원을 국정원장에 내정하는 깜짝 인사를 발표했다. 그는 국내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국정원 개혁에 힘을 쓰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또 국회 인사청문회 서면 답변서에서 문모닝 행보에 대해 ‘후회나 반성을 하느냐’는 질의에 박 후보자는 “치열한 선거 유세 과정에서 나온 발언이었음을 양해해달라”고 답했다.그해 12월 사석에서 박지원이 한 이야기다.“내가 호가 단재(旦齋)야. 유명한 한학자 선생님이 지어주셨어. 주역을 만든 주공(周公)을 중국 사람들이 존경해서 ‘단(旦)’자를 이름에 잘 안 쓰는데 나에게 그 단자를 지어줘. 주공이 문왕에 이어서 무왕도 엄청 잘 모셔서 중국을 이끌었다. 당시 다 주공이 무왕을 치고 왕이 될 거라 했는데 오히려 무왕을 극진히 모셨다.” - 취재 메모 중 -당시 이에 대해 DJ에 이어 문 전 대통령, 두 왕을 모시는 것을 예견한 것이냐고 묻자 그는 “그런 것일 수도 있지”라고 답했다.● “정치는 생물… 다음은 나(next is me)”문 전 대통령이 박지원을 국정원장에 지명한 것은 그만큼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가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지원이 임명된 이후에도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이듬해 초부터 코로나19 위기가 찾아왔고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이 발생하면서 남북관계는 더욱 경색됐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면 남북정상회담이 재개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지만 미국 대선은 조 바이든 대통령의 승리로 끝났다. 박지원은 국정원 내부에서 여성 간부를 중용했다. 2020년 8월 사상 최초로 여성 차장이 임용됐고 여성 최초 선임 국장도 배출됐다. 정치개입 금지와 대공 수사권 이관을 골자로 하는 국정원법 개정안을 임기 중에 통과시켰고 국정원의 사이버보안 기능과 마약 등 해외 연계 범죄 대응 능력도 강화했다. 구설수도 여전했다. 그는 원장으로 재직하며 2021년 6월 창설 60주년을 계기로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으로 원훈을 바꾸고 원훈석을 교체했다. 그런데 원훈석에 고(故)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의 손글씨를 본뜬 ‘신영복체’가 쓰였다는 점이 논란이 됐다. 신 교수는 과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20년간 복역한 전력 등이 있어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SNS를 하루에도 몇 차례씩 직접 써온 그가 원장 취임 뒤에도 미국을 방문해 자신의 동선을 노출해 논란이 됐다. 재직 당시 벌어진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과 관련해 사건 다음 날 국정원 직원들에게 관련 첩보와 보고서를 삭제하게 한 혐의 등으로 기소돼 현재 재판을 받고 있지만 그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2022년 5월 대선 이후 국정원장 임기를 마친 뒤에는 다시 방송 등에 출연하며 정치 현안에 대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또 그해 12월 결국 복당해 약 7년 만에 민주당으로 돌아와 이재명 대표를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가 자주 하는 말처럼 ‘정치는 생물’이다. 박지원이 앞으로 어떤 경로를 거쳐 여의도 정치 현장에 복귀할지 아무도 모른다.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되거나 2024년 총선에서 지역구였던 전남 목포나 고향인 전남 해남·완도·진도에 출마할 가능성도 있고 총선에서 불출마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최종 목표는 ‘엉클 조’라는 친근한 별명이 있는, 동갑내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일 것이다. ‘다음은 나야(next is me)’라고 영어로 말하는 그를 보면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갈 뿐이다’는 맥아더 장군의 말이 생각난다. 물론 그의 ‘안티’들은 “제발 TV 방송 등 시야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라고 할 테니 그냥 채널을 돌리는 게 사라지길 기다리기보다는 현명할 것이다. 박지원 전 원장은 술자리에서 건배를 할 때 현직 대통령을 붙여 ‘○○○ 대통령을 위하여’를 많이 외칩니다. 박근혜 문재인 전 대통령부터 ‘윤석열 대통령을 위하여’는 물론 국민의당 시절엔 안철수를 위하여까지 들어봤습니다. 그의 정치엔 기본적으로 나라 걱정과 충성심이 깔려 있습니다. 물론 DJ 서거 이후엔 그의 충성심도 누구를 향했는지 오락가락하긴 했지요.한 독자분께서 박 전 원장의 정치관(觀)에 대해 물어보셨습니다. 그는 과거에 “정치는 곱하기의 예술, 종합 예술이다. 정치가 제 역할만 해도 경제 사회 문화는 잘 돌아가고 정치가 0이면 나머지가 아무리 잘해도 0이 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또 “정치는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으로 오지 않는다. 타 당이 잘못하면 결국 정치권 전반으로 문제다”라고도 했습니다. 이런 인식이 그를 정치인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17화]의 댓글에 많은 누리꾼이 ‘산소 같은 남자’를 O₂가 아닌 tomb(무덤)으로 해석해주셨더군요. 정말 대단한, 대한민국의 저력입니다. 한국 정치에 산소인지 연탄가스인지 판단하는 것은 개인의 몫입니다. 앞서 서두에 썼던 명리학자가 2021년에 7년간 박 전 원장의 운이 좋다고 했으니 다음 대선까진 운이 좋을까요? 그분이 ‘건진법사’급인지는 다음 대선까지 지켜볼 일입니다. 다음 [19화]의 주인공을 누구로 할지는 미정입니다. 애초에 염두에 뒀던 법조계 원로가 등장하길 원하지 않고 있어 설득 중입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 2023-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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